바다를 떠돌던 섬을 떠안은 파도 위에서저 비췻빛에 물들면 짐작할 겨를도 없이 푸른 줄기가 몸을 뒤덮는다. 식물성 본능이 깨어나는 것이다. 광합성의 시간이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살강대는 갯바람에 취해 초록 삼매경에 한참을 빠졌다가 불현 듯 정신을 가다듬는다. 반복되는 자각의 혼잣말이 새어나온다. ‘저 섬 때문이었지.’ 그렇다. 비양도 때문에 예까지 온 것이 맞다. 행랑 가득 설문대를 향한 의문부호를 잔뜩 넣고 끝도 떠돌던 터라 광합성 휴식은 물음표를 쉼표로 만들어주는 이 바다의 은혜였다. 비양도에도 끊
최초와 최후의 발자취를 찾아서솥바리, 삼솥바리, 웨솥바리, 공깃돌바위 등 설문대의 신성이 깃든 전설지가 몰려있는 애월읍의 상가리, 애월리, 곽지리는 가히 창조주의 메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곳이다. 한라산부터 시작해서 제주섬 곳곳에 설문대가 빚어내지 않은 데라곤 한 군데도 없으니 이 곳만 메카라고 하기엔 자칫 억지스럽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음표는 이 세 마을을 설문대의 메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물음표가 내린 결정의 근거는 바로 이야기다. 바위며 오름이며 다양한 자연물에 이름과 사연을 부여한 설문대의 이야기는 태초의 첫걸음부
오름자락을 타고 밀물지는 바다에서과물이라는 토명(土名)이 더욱 어울리는 곽지리 바닷가 소로기통에서 출발한 한담산책로는 밀물지는 파도처럼 굽이 돌며 서쪽 마을 애월리의 한담코지까지 이어진다. 치솟은 현무암들이 저마다 희한한 포즈를 잡고 개성을 뽐낸다. 신화적인 변상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풍경이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옛사람들은 바위 하나하나에 이름과 그에 어울리는 이력을 심어넣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담산책로를 곽지부터 걷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소로기통도 그러하다.문자속을 들먹이기 좋아했던 옛 양반들은 곽금팔경이라는
공깃돌 바위에 스며든 여신의 지문하늘과 땅이 하나로 붙어 있었던 혼돈의 태초, 홀연히 나타난 엄청난 거인이 하늘을 떠받치고 땅을 떠밀며 갈라놓으니 틈이 크게 벌어지며 세상이 자리 잡을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 거인을 일러 누군가는 도수문장이라고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설문대라고 부르며 저마다 창조주를 찬양한다. 섬사람들이 말하는 창조주가 누구였든 세상을 만드는 일은 단숨에 만물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갈라놓는 빅뱅을 시작으로 해와 달과 뭇별을 만드는 단계로 이어졌다. 이렇게 우주가 만들어진 뒤에 비로소 대지와 만물을 빚어냈
홍릿물은 어디로 갔나물음표는 거대한 여신의 발자국을 보고 싶었다. 한내의 하류 망망한 바다와 만나는 용의 연못에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코흘리개 시절 바다가 보고 싶어서 한참을 걸어 찾아갔던 구름다리 출렁대던 계곡 사이의 깊은 물이다. 아무렴 물 위에 발자국을 새겼다고 한들 밀물져오는 바닷물과 뒤섞여 사라졌겠지. 그럼 어디일까? 다른 곳을 떠올렸다.한내의 용연보다 깊다는 산 너머의 홍릿물이다. 한달음에 전설의 홍릿물을 찾아 서귀포로 넘어갔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도시가 개발되고 도로와 건물들이 들어서는 사이 매립되고 말았다는 동네
세상의 시작이며 끝인 곳에서하늘이 갰다. 수평선이 바다와 하늘을 위아래로 나누지 않았다면 끝없이 파란 무한의 공간이라고 착각할 만도 했다. 물음표는 바다를 향해 불거진 성벽 같은 바위 언덕을 천천히 타고 올랐다. 누가 다듬은 것처럼 반듯하게 각이 진 바위들이 거대한 돌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물음표는 체스판의 말처럼 바위 무더기 위를 칸칸이 디뎠다.언덕 끝의 높다란 바위 끝에 올라선 물음표는 마치 바위의 정령이 빙의한 듯 한참 동안 굳은 채 생각에 빠졌다. 생각이라기보다 의문부호 투성이의 궁상이 도진 것이 적실했다. 이곳에 오르면 밀
섬 동녘 끝 전설의 모래톱을 찾아서설문대, 선문대, 설멩지, 설명주, 세명주, 세명뒤, 설만뒤, 설만두... 여신의 이름을 헤아려보니 끝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설문대와 세명주는 다르다느니 같다느니 옥신각신 논쟁이 숱해째 이어지고 있었다. 물음표는 자기만의 논리로 이 많은 이름들을 하나로 갈무리했다. “하나이며 여럿이고 여럿이고 하나이며, 하늘만큼 크면서 모래알처럼 작고, 드러나 보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여신이야. 그러니 제주섬이라는 우주의 모든 곳에 제각각인 모습으로 임재해 계신 거겠지.”누가 동의를 하든 어깃장을 놓든 물음표
전설을 쫓아간 곳에선송당마을이 고향이랬다. 그곳은 두말할 필요 없는 신성의 발원지다. 선흘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익히 알려진 금백조며 소로소천국의 본풀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송당마을에 있다는 오봉이굴왓, 그곳에 가면 여신 설문대가 거대한 솥을 안쳤던 화덕의 받침돌이 있을 것이란다. 어린 날 당신께서 고향마을에 살 때에는 그 바위를 ‘새덕앚인밧’이라고 불렀다며 지금은 아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물음표는 그길로 송당마을을 찾았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새덕앚인밧의 정체를 탐문했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포기하려던 차에 전
산이 바다에 있다 하여연초록 물감을 개어놓은 비췻빛 해변에 홀려 듬성듬성 서 있는 여행자들과는 다른 팔자였다. 물음표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거대한 바람개비들을 좌표 삼아 전설을 쫓았다. 그의 눈은 잠깐이라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발의 생각은 달랐는지 여러 차례 디뎠던 바닷길을 능숙하게 디뎌갔다. 물음표의 발은 김녕과 월정 사이 ‘덩개빌레’를 향하고 있었다.덩개빌레는 널따랗게 펼쳐진 용암대지였다. 수만 년 전 뜨겁게 타올랐던 마그마가 바다를 그리워하여 마침내 다다른 곳이 덩개빌레다. 마당처럼 펼쳐진 너럭바위 틈바구니에 드문
[설문대루트탐사기]①설문대할망과 만나기에 앞서[설문대루트탐사기]②섬과 산의 창세기#망망한 바다 위에 섬 하나망망한 바다 위에 섬 하나가 태어났다. 행여나 큰 물살이 섬을 삼킬까 싶어 한가운데를 도드라지게 퍼 올리니 높다란 산이 되어 마음이 놓였다. 이만하면 제아무리 큰 물살이 밀물져 와도 섬이 잠길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생명이 움트기에 아직은 부족한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해와 달이 비치지 않아 밤과 낮이 없었다. 계절이 흐르지 않으니 바람도 없고 비도 눈도 내리지 않았다.고심하던 할망은 시간의 씨줄과 날줄을 엮으리라 작정했다
구름 속의 손 물결 속의 발할머니의 갈린 목소리는 다른 세상을 잇는 게이트였다. 아이는 할머니로부터 노일저대와 자청비, 콩데기 ᄑᆞᆺ데기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갈 수 없는 세상과 만나곤 했다. 그들은 모두 할머니가 꾸며낸 실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의심이 없진 않았지만 단 하나의 증거 때문에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산이었다. 얼마나 컸으면 한라산을 만들었을까. 커다란 할망이 섬을 만들고 그 가운데 높은 산을 만들었다니. 아이는 구름결을 매만지는 커다란 손과 일렁이는 물결을 헤치는 거대한 발을 상상했다. 하얀 솜털이 꽃수염으로 바뀌어 거뭇
제주 사람치고 설문대할망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내 또래나 그보다 윗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심심찮게 설문대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니까.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다. 제주 역사상 최초로 열린 1998년 전국체전 개막식이다. 개막식의 하이라이트인 성화 최종점화 장면에서 백록담을 닮은 성화대가 위용을 드러냈고 거대한 여신의 상반신이 TV 화면에 등장했다. 설문대였다. 최종점화자가 여신의 손가락 위에 오르자 거대한 할망은 그를 백록담으로 인도했고 마침내 먼 옛날 그러했던 것처럼 활화산의 불길이 다시 치솟았다. 이 섬의 창조주는 그렇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