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리왓 퐁낭과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
늙은 팽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아랫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부녀자들의 수다도 자취를 감춰버린 아픈 역사의 기억만이 봄바람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자리왓'으로 향했다. 자리왓은 250여 년 전 남평 문씨가 처음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도 2구는 자리왓을 중심으로 지름기, 열류왓, 멀팟, 고들리왓, 상시머름, 솔도 등 7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마을 주민은 4·3 당시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아랫마을인 어도1구로 내려가 피신을 해야만 했다. 이곳을 떠난 주민은 돌아올 수 없는 비극을 맞으면서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어도2구 주민은 어도1구에 살다가 봉성리 입구 신명동을 형성하면서 정착했다.

어도2구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자리왓에는 늙은 팽나무만이 스산한 바람에 빈 가지를 흔들어대고 있다.

그날의 악몽을 씻어내듯 몸부림치는 팽나무의 흐느낌이 들려오는 듯하다.

팽나무 옆에는 '잃어버린 마을 자리왓'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나지막한 돌담, 올레길, 집터였던 곳에는 목멘 설움소리가 들려오는 듯 대나무의 서걱거림이 스산하다.

▲ 자리왓 올레길.
불타버린 집터는 밭으로 개간하여 그 당시의 흔적이라곤 밭 후미진 곳에 남아 있는 대숲과 구불구불 휘어지는 올레길, 마을 주민의 쉼터 역할을 했던 팽나무만이 남아 있다.

지름기의 고향이신 강재휴 할아버지(77)는 자리왓에 도착하자 악몽 같았던 그 당시의 상황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강 할아버지는 "신명서당 3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4·3 난리 국에도 강몽규 선생님은 학생들을 데리고 들에서 보따리 수업을 할 만큼 후학 양성에도 게을리하지 않을뿐더러 민족의식이 남달랐다."라면서 신명서당 터를 안내했다.

신명서당은 일본강점기에 세워져 구학문을 가르쳤으나 1940년대부터는 신학문을 가르쳤던 교육기관이었다.

당시 강몽규 선생이 어도1.2구의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 강재휴 할아버지.
강 할아버지는 신명서당 터 옆에 외롭게 서 있는 팽나무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며 "이 퐁낭도 이 늙은이처럼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거"라면서 "그때 맞은 총알이 뿌리에 박혀 그날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라며 눈물대신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정겨운 살내음이 풍겨오던 집과 집, 마을과 마을 길을 연결했던 자리왓 올레길을 따라 강 할아버지의 태가 묻힌 지름기로 향했다.

좁다란 올레길을 거니노라면 금방이라도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뛰어나올 듯하다.

또는 물허벅을 지고 가는 처자와 마주칠 듯싶다. 이런 착각이 일 만큼 자리왓 올레길은 제주의 옛정취가 풍겨온다.

▲ 대숲만 남아 있는 집터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강재휴 할아버지.
지름기 마을의 고향인 강 할아버지는 그 당시 말방아가 있었던 곳을 가리키면서 어릴 적 뛰놀았던 올레길과 대숲만 남아 있는 집터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 할아버지는  "4·3사건이 일어나자 마을에 불을 붙인다 하여 부랴부랴 어도1구에 내려가 간신이 목숨을 건졌다."라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이닥치는 토벌대들의 습격에 살아지카부덴 못했주"라면서 그 당시의 악몽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어디 4·3 당시 잃어버린 마을은 이곳뿐이랴, 곤을동', '어우눌' '해산이', '리생이', '원동' 등 100여 곳이 이를 만큼 초토화됐었다.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잃어버린 마을'표지석이 세워졌으나 그 비통함은 달래 길이 없다.

꽃이 핀다/눈물 꽃이 설움 삼키며/4월의 밤을/숨죽이며 불 밝힌다/촛불처럼 사르르 사르르/눈물 꽃으로 피다 지는/ 4월의 꽃이여.<제주투데이>

 


<문춘자 기자 / 저작권자ⓒ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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