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년째 서한두기에 꽃을 심고 있는 김형주 씨.
26년째 길거리에서 홀로 꽃을 심어온 남자가 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은 아니였다.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아내도 '그만 하라'고 말리다 지쳐 포기했다고 했다.

꽃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의 직업은 택시기사다.

그 남자의 손에서 450m에 달하는 '명품꽃길'이 탄생했다.

지난 10일 제주시 용담2동 서한두기에서 혼자 묵묵히 꽃을 심는 김형주(59, 용담2동)씨를 만났다.

서한두기는 탑동광장과 용연다리, 용두암, 해안도로를 잇는 곳으로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장소다. 또 제주공항과 가까운 올레 17코스가 있어 관광객들의 단골 방문 코스로 꼽힌다.

◆'꽃바보'의 26년 내력 보니

김씨는 장갑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기분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1986년부터 서한두기에 꽃을 심기 시작했다. 1980년 초 마을 청년회 활동이 활발할 시절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활동했지만 청년회 활동이 점차 수그러들면서 자연스레 꽃길을 혼자 조성하게 됐다고 했다.

또 당시 사업이 실패하면서 몸도 마음도 허약해져 있을 때 집 앞에 꽃을 보고 물을 주고, 다시 꽃을 심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됐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꽃길은 450m 정도다. 꽃길 곳곳에는 김씨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화단에서 그의 정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심은 꽃들을 하나 하나 소개하기 바빴다. 꽃길에는 봉선화, 백일홍, 금잔화, 문주란, 해바라기 등 10여종이 넘는 꽃들이 만발했다. 딸기나무는 20년도 더 됐다고 했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선 행복함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 김형주 씨가 꽃길조성에 여념이 없다.
그는 일주일에 2번 이상 꽃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는 오전 7시부터 저녁 무렵까지 꽃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꽃길은 30cm 정도의 좁은 땅. 그가 직접 쌓아올린 돌담 위에 꽃을 심어둔 터라 물이 돌 아래로 바로 흘러버리기 때문에 물을 제때 주지 않으면 꽃이 말라 죽기 십상이다.

그는 면적이 좁다보니 그곳에 씨앗을 뿌려도 잘 자라지 않는 경우가 많아 꽃이 자라지 않을 때는 인근 밭에 미리 심어둔 묘종을 가져와 이식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서한두기에 3대째 살아오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서 서한두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느낄 수 있었다.

자비를 들여 화단을 조성하는데 힘이 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시작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비용적인 부분보다는 혼자서 화단을 관리하는 것이 힘에 부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들은 사서 고생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처럼 바보같은 사람이 한사람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겠냐"며 웃어 보였다.

◆"꺾지 말고 바라만 봐 주세요"

김씨는 "이곳은 제주시 공원관리과 소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신경쓰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고민"이라며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는 꽃길 면적이 점차 넓어지면서 꽃에 물을 주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라고 말했다.

김씨는 집에서 물 호스를 끌어다 일일이 꽃에 물을 주고 있다. 호스가 닿지 않는 곳은 물을 날라다 주고 있다. 때문에 물을 주는 시간도 족히 2시간은 걸린다고 했다.

그는 제주시 공원관리과에 여러 번 문의를 해봤지만 돌아오는건 '묵묵부답'이라고 했다. 그는 이 길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무관심한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해당 과에서 가뭄대비 물차를 동원해준다거나, 인력을 지원해준다면 '더 아름다운 마을, 더 아름다운 제주'가 될 수 있을텐데 안타까울 뿐"이라고 전했다.

그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묘종을 뽑아가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래도 올해부터 용담2동사무소에서 경고(?)문구를 적은 팻말을 세워줘서 예전보다는 관리가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팻말에는 '저는 서한두기의 얼굴입니다, 꺾지 말고 바라만 봐 주실래요'라는 친절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 꽃길에 세워진 '팻말'
◆"사계절 아름다운 꽃길 만들고 싶어요"

그의 꿈은 소박했다. 그는 제주멸종위기 보호식물인 해녀콩과 황근나무를 용두암으로 이어지는 길까지 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해녀콩과 황근나무는 제주도에서만 자생하는 아열대성 해안식물이다. 그는 "제주의 식물을 길가에 심어 놓으면 경관조성은 물론 관광객에게도 우리 것을 널리 알리게 되지 않겠냐"며 되물었다.

그는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묘종을 심고 싶지만 더 넓어진 화단을 혼자서 가꾸는 것이 힘들것임을 알기에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 곳을 사계절 아름다운 길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사계절 동안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도록 계절마다 피우는 꽃을 골라 심고 있었다.

▲ 김형주 씨가 20여년 가꿔온 꽃길
김씨는 여름에는 봉선화나 왕관초, 금잔화를 주로 심는다고 했다. 또 겨울에는 유채꽃을 심어 유채꽃 거리를 조성한다고 했다. 때문에 사계절 사람들의 포토존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는 힘든 나날에도 묵묵히 꽃길을 조성하는 가장 큰 이유는 꽃길을 걷는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역시 행복해 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도 여건이 되는 한 계속해서 아름다운 꽃길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마을, 우리 것, 우리 고장의 꽃을 가꿔 아름다운 제주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최종 목표라고 강조했다.<제주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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