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체류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이 시작됐다. 4년이상 불법체류자에 대한 당국의 단속은 단호하다. 몇 무리의 이주노동자들은 명동성당이나 가리봉동의 교회에 모여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자유로운 노동의 권리다. 붉은 조끼에 새겨진 ‘Achieve Labor Right’.

강제추방 위기를 맞아 차가운 거리를 헤매고 있는 그들이 정녕 피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민족과 인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일지 모른다. 마치 식민지 시절 내지인들의 거주지에는 조선인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반만년 역사를 언제나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한국인들에게 그들은 철저히 이방인이다. 한국의 실정법은 오로지 단군의 자손들에게만 적용될 뿐이다. 이 도저한 순혈주의의 폭력을 보라.

아메리카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행했던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해 또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선택된 자는 언제나 백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과 배제의 논리는 이주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은 이주노동자에서 여성, 지방으로 쉽게 전이된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또 다른 배제의 대상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토니 모리슨의 「파라다이스」는 우리 안에 내재된 선택과 배제의 논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백인들의 탄압을 피해 건설한 흑인들만의 공동체 ‘루비’. 어느날 루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도망친 여인들의 은신처인 수녀원이 그 흉흉한 소문의 진원지이다.

책은 ‘그들은 제일 먼저 백인 소녀를 쏜다’는 첫 문장으로 루비 주민들의 수녀원 습격을 알린다.

하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그들이 과연 백인 소녀를 겨냥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백인들이 흑인을 차별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이 흑인 여성을 차별화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일 뿐이다.

흑인들만의 공동체인 루비는 외관상으로 지상낙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낙원은 이방인을 반기지 않고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절이라고는 전혀 없는 배타적인 마을이다. 낙원은 선택된 자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은 책에서 사람에게 가장 비본질적인 정체성인 ‘인종’이라는 것의 허구성을 여실하게 드러낸다.

인종간의 갈등을 단순히 백인과 흑인들만의 문제가 아닌 인류의 문제로 환원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는 책 곳곳에서 등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단서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우리가 즐겨 사용해 마지 않는 민족주의라는 이름은 다름아닌 선택과 배제의 기제였음을.

근대가 발명해낸 추악한 범죄가 있다면 그것은 ‘민족’과 ‘인종’의 발견일 것이다. 단일 민족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민족이라는 테두리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을 철저한 타자로 대상화하는 것. 그것은 인간이 한 인간에게 행하는 범죄일뿐이다.

민족과 인종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타자에 대한 폭력적 시선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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