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가수 보아(26)가 자기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1953년에 발표된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자 색다른 감흥이 밀려왔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작곡가 박시춘(1913~1996·박순동)의 주옥같은 명곡들은 그렇게 시간의 침식에도 퇴색하지 않고 신선한 생명력을 얻었다.

9일 밤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펼쳐진 '국민작곡가 박시춘 탄생 100주년 헌정음악회-애수의 소야곡 2012'은 시대가 흘러도 변치 않는 박시춘 히트곡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날 공연은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작곡가 손석우, 원로가수 금사향, 가수 송창식 등의 헌정음악회 축하 영상 메시지와 함께 이은규 화백이 박시춘의 초상화를 그리는 모습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실시간 중계하면서 막을 올렸다.

고인을 나름의 방식으로 기억하는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부터 K팝을 이끄는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 보아와 한류그룹 '슈퍼주니어'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가수들이 목소리를 높여 박시춘을 기렸다.

본 공연은 퓨전 재즈밴드 '윈터플레이'의 트럼페터 이주환의 박시춘 히트곡 메들리로 포문이 열렸다. 이어서 윈터플레이 보컬 혜원이 등장, 박시춘의 '칼멘야곡'을 재즈풍으로 재해석한 뒤 자신들의 히트곡 '집시걸'을 선보였다.

이어서 소리꾼 장사익이 박시춘의 '봄날은 간다'를 국악풍으로 시원하면서도 구슬프게 소화했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표현한 이 노래를 부르는 약을 먹은 것 같이 헤롱헤롱하고 행복하다"면서 "박시춘 선생님의 노래는 즐거울 때 더 즐겁고 슬플 때는 더 슬프다. 어머니와 누이들이 많이 부르던 노래라 더 행복하다"고 밝혔다. 이어서 '대전블루스'를 들려줬다.

▲ 국민작곡가 박시춘 탄생 100주년 헌정음악회가 열린 9일 저녁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보아가 멋진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뉴시스>
트로트가수 주현미는 박시춘의 '비 내리는 고모령'과 '삼다도 소식'을 애절하게 들려줬다. 그녀는 "제가 '가요무대' 세대라 박시춘 선생님과 함께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포크가수 추가열은 박시춘의 '물 새우는 강 언덕'과 자신의 히트곡 '렛츠 고'를 선보였다. 소프라노 이미경은 박시춘의 '고향초', 드라마 '명성황후' OST '나 가거든'을 들려줬다.

박시춘의 손자이자 포크듀오 '그린 빈스'의 멤버로 지난 7월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뜬 박재정(56)의 아들인 박창조 군이 특별 게스트로 나섰다.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 중인 박군은 자신이 작곡한 '소나무'와 할아버지의 곡인 '럭키서울'을 직접 편곡해 들려줬다.

박군은 "리허설 때는 긴장했는데 너무 기쁘다"면서 "할아버지께서 이 자리에 계시면 더 좋겠습니다. 너무 존경하고 사랑했던 아버님이 더 그리워진다. 아버지와 할어버지의 명예가 흔들리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MBC TV '우리들의 일밤-서바이벌 나는 가수다'로 스타덤에 오른 김범수가 박시춘의 대표곡인 '애수 소야곡'을 R&B로 재해석해 들려줬다.

김범수는 "저도 이제 13년 활동했는데 떨린다. 가사도 틀리고 영광스런 자리 초대해줘서 감사드린다"면서 "이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 뜻깊다. 창조군도 어렸을 때 봤다. 그 때도 이미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박시춘 선생님의 따님인 박미연씨와도 친분이 있다"고 알렸다. "앞으로 열심히 활동해서 (박시춘 선생님처럼) 저를 위해서 음악회가 만들어지는 가수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자신의 히트곡 '보고 싶다'도 빼놓지 않고 들려줬다.

▲ 국민작곡가 박시춘 탄생 100주년 헌정음악회가 열린 9일 저녁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김범수가 멋진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뉴시스>
한류그룹 '슈퍼주니어'의 유닛 '슈퍼주니어 K.R.Y'(규현·려욱·예성)는 '낭랑 18세'와 자신의 히트곡 ‘스카이’를 선사했다. 규현은 "'낭랑 18세는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노래 중 하나"라면서 "오늘 출연자분들 중 우리가 가장 18세에 가까운 나이가 아닐까한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가수 보아는 '굳세어라 금순아'를 R&B 발라드로 재해석, 색다른 분위기를 선사한 뒤 자신의 히트곡 '온리 원'을 들려줬다.

박시춘이 작곡한 700여곡을 부르는 등 그의 생전 시 각별한 인연을 맺은 이미자는 전속 15인 악단과 함께 '벽오동 심은 뜻은'과 '청춘고백', '노래는 나의 인생'으로 이날 공연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이미자는 "너무 보고 싶다. 이 시대가 지나면 앞으로 이렇게 훌륭한 작곡가가 태어날 수 있을까 생각을 했다"면서 "50여년 동안 노래를 했기 때문에 박시춘 선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고 전했다.

모든 출연진과 합창단이 역시 박시춘의 대표곡인 '신라의 달밤'을 함께 부르며 공연이 마무리됐다.

약 3000명이 운집한 이날 공연에는 박시춘을 명확히 기억하는 50대 이상은 물론 그의 노래만 들어온 10~30대까지 전 연령대가 섞여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자와 손녀가 함께 찾아온 가족단위 청중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슈퍼주니어를 좋아하는 일본인들까지 찾아오는 등 박시춘의 노래가 세대뿐만 아니라 국경을 초월할 수 있는 힘도 보여줬다.

예전부터 박시춘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는 김모(58)씨는 "박시춘 선생님이 살아있으면 더 좋았을 법했다"면서도 "후배들의 축하 무대를 하늘에서 흥겹게 보셨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박여진(23)씨는 "슈퍼주니어를 좋아해서 공연에 왔는데 박시춘 선생님의 노래가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면서 "집에 가서 박 선생님의 노래를 더 찾아봐서 들어봐야겠다"고 전했다.

약 2시간30분 동안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회장 백순진)가 주최한 이날 공연은 가수 겸 뮤지컬제작자 유열 사회를 봤다. 대중음악평론가 겸 저널리스트 박성서씨가 주도한 '박시춘 탄생 100주년 기념 기록전'도 겸했다.

'애수의 소야곡'의 원곡인 '눈물의 해엽' 가사지,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이 노랫말을 쓴 '금오산아 잘있거라'의 비매품 초판 음반과 가사지, 박시춘이 1949년 설립한 럭키레코드사의 음반과 당시 광고 등 자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타 독주음반을 발표한 박시춘이 남긴 작곡집들, 6·25동란 당시 음반, 박시춘이 설립한 오향영화사의 영화포스터와 주제가 음반들 등 대중음악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100점이 전시됐다. 3000여곡을 작곡한 박시춘의 손때가 묻은 무대의상, 기타, 아코디언, 친필악보 등 유품도 걸렸다.

박씨는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힘이 돼 준 이 노래들은 지친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일종의 응원가였다"면서 "박시춘 선생은 대중가요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려준 인물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민족의 격동기와 함께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준 작곡가이기도 하다"면서 "시대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박시춘의 기록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가히 우리나라 대중음악사 자체"라고 강조했다.<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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