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42) 주연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감독 추창민)가 개봉 38일 만에 한국영화 사상 7번째로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2009년 '해운대'(감독 윤제균) 이후 2년 동안 잠잠하던 1000만 관객 영화는 '도둑들'(감독 최동훈)에 이어 올해 들어서만 두 번째다.

21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광해, 왕이된 남자'는 20일 하루 618개관에서 2925번 상영돼 22만1229명을 모았다. 누적관객 1004만1566명이다. 개봉 8일 만에 200만, 18일 만에 500만 명을 모으더니 31일 만에 900만을 넘어섰다.

'광해'는 왕을 둘러싼 권력 다툼과 당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조선 15대 왕 광해군 8년을 배경으로 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점점 난폭해지는 왕 '광해'(이병헌)가 도승지 '허균'(류승룡)에게 자신의 대역을 찾을 것을 지시하면서 시작된다. 갑작스레 의식을 잃고 쓰러진 왕 '광해'를 대신해 왕의 자리에 오른 만담꾼 '하선'(이병헌)이 벌이는 15일 간의 정치담이다.

'광해'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똑같은 얼굴을 가진 왕과 거지라는 쉬운 소재를 택했다. 여기에 폭군과 선왕, 역사적 해석이 엇갈리는 조선의 광해군을 끌어들였다. 선왕으로 평가받던 때 조선을 통치한 것은 '하선'이라는 상상을 구현했다.

'하선'은 '광해' 자리에 앉으면서 낯선 환경에 당황해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매화틀에 앉아서 변을 보는 장면에서 "경축 드리옵니다"는 궁녀들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세숫물을 한 번에 들이키는 등 우스꽝스러운 '하선'은 관객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또 밖으로만 도는 '광해'와 달리 '하선'이 궁녀와 중전, 주위사람을 챙기는 모습에 대리만족하며 호감을 품게 된다. 독이 든 단팥죽을 대신 먹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월이'(심은경)를 맨발로 안고 의원에게 달려가는 모습,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며 칼을 들이밀던 '도부장'(김인권)이 자결하려고 할 때 칼을 돌려주며 "네가 칼을 뽑아 내 목에 겨눈 것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네가 살아야 내가 산다"고 말하는 장면 등이 보기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하선'의 가짜 왕 행세를 지휘하는 '허균'과의 무거울 수 있는 에피소드도 소소한 웃음거리로 가볍게 풀어낸 것도 흥행성공을 거들었다.

이병헌과 류승룡(42)의 연기도 몰입도를 높였다. 이병헌은 이 영화로 데뷔 20년 만에 첫 사극, 첫 1인2역을 소화했다. 근엄한 왕과 경박스러운 천민 사이를 잘 조율했다. '광해' 따로 '하선' 따로는 물론 '하선'이 연기하는 '광해'간 균형을 잘 맞춰 영리하게 연기했다.

추창민(46) 감독의 "이병헌은 내가 생각한 왕 그 자체였다"는 평가는 '광해'를 본 관객이라면 수긍할 수 있다.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감독 민규동)에서 보여준 카사노바 '성기'의 코미디를 벗어던진 류승룡의 연기도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이번 영화에서는 모든 코미디 요소를 이병헌에게 양보했다. 내 역할은 받아주는 것뿐이었다. 코미디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엉뚱한 이병헌의 행동과 진지한 내 행동에서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올 것"이라는 계산에 따라 시종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이병헌과 앙상블을 통해 큰 웃음을 자아냈다.

'광해'를 따르는 충신, 제대로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왕이 된 '하선'의 태도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결국 지지해주는 '허균'의 모습을 넘치지 않게 보여줬다.

'하선'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묵묵히 내조한 '조내관' 장광(60), 깨끗하고 사랑스럽지만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궁녀 '사월이' 심은경(18), 코미디를 벗고 진지한 정극으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도부장' 김인권(34)의 연기도 안정적이었다.

경쟁작들도 없었다. 할리우드 기대작 '본 시리즈'의 속편 '본 레거시'(감독 토니 길로이)는 일찌감치 나가 떨어졌고, 액션과 드라마에서 제자리를 못 잡은 '간첩'(감독 우민호)과 극과 극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호러 코미디 '점쟁이들'(감독 신정원)도 '광해'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2월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하선'은 "있는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내라"는 대동법을 내세우며 벼슬아치들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은 채 잘못된 것은 꾸짖고 바로잡는다. 정치 근처에는 가보지 못한 천민도 아는 '기본이자 상식'인 얘기에 관객들은 시원함을 느끼고 공감한다.

야권 대선후보들의 관람도 이어졌다. 9일 무소속 안철수(50) 후보는 "약자를 대하는 지도자의 진정성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59) 후보는 12일 5분 가까이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가 전해지며 '대선 전 꼭 봐야 하는 영화'로 재평가 받았다.

동시에 메이저 배급사의 상영관 장악에 따른 독과점 논란은 '광해'로 인해 한층 가열됐다.

9월20일 개봉 예정이던 '광해'는 갑작스레 개봉일을 1주 앞당겨 9월13일부터 관객들을 맞았다. 이병헌이 할리우드 영화 '레드2'(감독 딘 패리소트) 촬영 차 캐나다 몬트리얼로 출국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주연배우 없이 10일 정도 홍보, 마케팅을 벌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 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의 해명이었지만 9월 초 개봉작들이 모조리 직격탄을 맞고 간판을 내려야 했다.

상영관 수에서도 경쟁작들을 압도했다. 689개관으로 시작한 '광해'는 10월1일 기준 1000개가 넘는 상영관을 확보해 26.1%의 스크린 점유율을 보였다.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52) 감독의 '피에타'가 153개로 출발한 것에 비하면 불공정 게임의 극치다.

김 감독은 "멀티플렉스의 극장을 한 두 영화가 독점하고 있고 동시대를 사는 영화인들이 만든 작은 영화들이 상영기회를 얻지 못하고 평가도 받기 전에 사장되고 있다"고 멀티플렉스 배급형태를 지적했지만 공허한 외침이었다.

1000만 관객 돌파 가능성이 높아질 때쯤 CGV는 쌍둥이 가족이나 이름에 '광' 또는 '해'가 들어가는 관객에게 동반 1인 무료티켓을 주는 1+1 이벤트를 내놓았다. 배급사가 아닌 CGV가 기획한 행사였지만 같은 CJ그룹 계열사이기에 '무리한 1000만 관객 만들기'라는 비난을 자초했다.

한편, '도둑들'에 이어 '광해'까지 1000만 관객을 넘기면서 올해 한국영화 관객수는 벌써 8867만6991명이 됐다. 영진위는 연말까지 한국영화 관람객이 1억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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