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통장은 ○○만원이고, 법인통장은 ○○만원 입니다. 퀵서비스 기사에게 돈을 주면 통장을 직접 받을 수 있습니다."

전화금융사기를 비롯해 부동산 대출사기 등 각종 범죄에 이용되는 대포통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대포통장을 이용한 범죄들의 수법이 진화하면서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떠안거나 형사입건까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법당국이 지속적으로 단속에 나서고 있지만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대포통장은 이미 각종 사기 범죄에 반드시 필요한 '범행도구'로 전락해버렸다.

대포통장을 만드는 조직들은 모집책과 관리책 등 체계적인 점조직 형태로 운영된다. 특히 조직원이 누구인지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철저하게 분업화·전문화돼 있어 수사기관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실제 대부업체를 직접 운영하거나 무작위로 문자를 발송해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의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 정보를 빼내 이를 대포통장을 만드는데 악용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범죄조직 뿐만 아니라 누구나 대포통장을 쉽게 사고 팔 수 있을 정도다. 특히 주요 인터넷포털사이트에 대포통장 관련 검색어를 입력하면 관련 사이트와 카페 등이 우르르 쏟아진다. 대포통장의 무분별한 유통을 차단하기 위한 사법당국의 단속 강화 등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법인명의 대포통장까지'… 대포통장, 어떤 경로로 공급되나

대포통장의 공급경로는 전화금융사기 수법이 빠르게 진화하는 만큼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대포통장이 범행에 악용된 초창기만 하더라도 노숙인에게 일정금액을 지불하고 인적사항 등 개인정보를 빼내 제작됐다. 당시에는 일반인들에게 대포통장은 낯설었고, 증거를 은폐하고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일부 사기범죄조직에게만 암암리에 공급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대포통장을 사고 팔 수 있을 정도로 활성화(?)됐다.

대포통장은 어떻게 유통되는 걸까. 유령 금융업체를 차려놓고 '소액대출'을 미끼로 통장과 현금카드를 보내주면 대출해주겠다고 속인 뒤 통장이나 카드를 발급받아 대포통장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수법이다.

또 인터넷 주요 포털사이트에서는 대포통장과 관련된 검색어를 입력하면 자극적인 홍보문구의 페이지가 수백개 넘게 쏟아진다. 관련 카페와 개인 블로그 등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판매가격과 구입방법 등을 안내하는 글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최근에는 대포통장을 만든 조직들이 유령회사인 이른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법인 명의의 대포통장을 만들어 유통시키고 있다.

이들은 법인 명의의 등기부등본과 인감도장을 만든 뒤 신분 노출을 방지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은행에서 유령회사 명의의 법인통장을 발급받아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업자나 스포츠 베팅업자 등 범죄조직들에게 공급한다.

정부가 증가하고 있는 전화금융사기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개인 간 계좌이체를 어렵게 만들자 유령 법인명의의 대포통장이 등장한 것이다. 사기범죄조직들은 피해자가 돈을 입금한 뒤 사법당국에 신고할 경우 곧바로 지급정지 되는 개인명의의 대포통장보다 법인명의의 대포통장을 더 선호한다.

◇10대 청소년부터 조폭까지… 대포통장 거래에 나서

유흥업소나 안마시술소 등을 상대로 돈을 뜯어낸 조직폭력배(조폭)들이 수입원이 줄어들자 대포통장에 유통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또 10대 청소년들도 대포통장을 만들어 보이스피싱 조직에 파는 일까지 벌어졌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 8월30일 유령회사(페이퍼컴퍼니) 명의로 대포통장을 만들어 판매한 조폭 행동대원 조모(31)씨 등 6명을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하고 이모(38)씨 등 10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조씨 등은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50여개의 유령회사를 설립해 대포통장 500여개를 개설한 뒤 개당 35만원을 받고 판매해 모두 1억7000만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회사 명의로 여러개의 통장 개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통장 개설에 필요한 회사대표 위임장과 재직증명서 등을 직접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들은 대포폰과 대포차량을 이용하고, 대포통장은 퀵서비스를 통해 배달했다"며 "조폭들이 경찰의 지속적인 단속으로 수입원이 줄어들자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대포통장 개설과 유통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에는 10대 청소년 5명이 위조한 학생증을 이용해 대포통장을 발급받아 보이스피싱 조직에 팔다 경찰에 적발됐다.

서울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에 따르면 김모(15)군 등 10대 청소년 5명은 위조한 학생증을 이용해 금융 기관에서 70여개의 대포통장을 발급받아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팔았다.

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통장 한 개에 5만원씩 받고 넘겨 모두 350여만 원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단속이 강화돼 대포통장을 쉽게 만들 수 없게 되자 범죄조직이 청소년들에게 접근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며 유인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중·고등학생은 주민등록번호가 적힌 학생증이 있으면 은행에서 통장을 발급이 가능하다"며 "'대포통장을 만들면 돈을 주겠다'는 범죄조직에 넘어가 범죄 수렁에 빠지는 10대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통장, 타인에게 대여·양도는 명백한 범죄행위

인터넷에서는 대포통장을 사고파는 불법 행위가 성행하고 있다. 사기범들은 통장을 만들어주기만 해도 수십만원의 돈을 챙길 수 있다며 온·오프라인에서 무차별적으로 유혹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수법도 교묘해져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사기범들은 금융거래가 생기면 신용등급이 높아진다는 점을 악용해 신용대출 등 2차 범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터넷 등에서 은행 계좌를 사고팔다 처벌받는 사람이 매년 2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청에 따르면 대포통장 거래에 대한 처벌이 시작된 지난 2009년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2만여명이 단속됐다. 2010년 4월부터 지난해 3월 사이에도 1만9800여명이 적발됐다. 또 지난해 6만여개가 넘는 통장이 대포통장을 판정돼 지급정지 됐다.

사법당국과 금융당국이 대포통장과 관련해 대대적인 대책을 내놨지만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사법당국은 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나 각 지방경찰청도 전화금융사기 전담수사팀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고, 금융당국도 은행계좌 통합관리시스템을 구축하고 불법거래 의심계좌에 대해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대포통장 관련 범죄는 피의자를 특정하기 어려울 만큼 갈수록 교묘해지고, 판매자나 매수자 수사에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다보니 이를 근절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본인 명의의 은행통장을 대여·양도하는 행위는 형사처벌 대상이다. 예금통장을 대여·양도하는 것은 전자금융거래법상 3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경찰 관계자는 "예금통장을 타인에게 대여하거나 양도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로 형사처벌 대상"이라며 "예금통장은 보이스피싱이나 대출 사기, 불법 도박 조직에 넘어가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하게 되고, 그 피해를 예금주가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대포통장을 산 사람은 물론 판 사람도 처벌 대상"이라며 "범죄조직에 현혹돼 통장 매매를 한 경우에는 반드시 해당 은행 콜센터에 연락해 지급정지를 신청하고 가까운 영업점을 찾아 통장을 해지해야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밝혔다.<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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