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언론중재위원>이며 2003년 당시 <제주투데이> 대표였던 조맹수씨로부터 원고 의뢰를 받았다.
 
필자가 한글 세대라는 점도 있었지만 한국 문단에 등단한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부터 한달에 평균 4회정도 연재하는 <김길호의 일본이야기>가 이번회로서 4백회를 맞이했다.
 
"김길호씨. 글 쓰는 사람 중에는 재일동포 생활을 아는 사람은 혼자뿐이니까 그 생활상을 써서 고국 사람들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1987년 김동리 선생님으로부터 완료추천을 받았을 때의 추천사이다.
 
필자는 김동리 선생님으로부터 완료추천을 받았지만 초회추천은 1979년 이범선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
그후 이범선 선생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김동리 선생님께서 두번째 추천을 해주셨다.
 
오사카에 살고 있는 필자에게 토쿄에 오셨던 김동리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그게 첫인사 드림이었는데 약 18년전에 선생님께서 서울 백병원에 혼수상태 속에 입원하셨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었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우리말로 동포생할상을 써서 고국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필자에게 유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게을러서 작품을 별로 쓰지 못했었다.
 
"추천 작가로 데뷔했다고 거들거리면서 안 쓰는 작가가 어디 작가입니까? 그런 소설가 필요 없습니다."
 
현재 제주문인협회지부 회장 김순이 시인으로부터 쓰지 않는다고 호된 질책을 받았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제주문인협회>에 가입 시켰다. 그후부터는 제주문인협회지에 작품을 게재해야 한다면서 작품 독촉을 빚쟁이 이상으로 해왔다.
 
그 결과 나는 조금씩 작품 쓰기에도 시간을 투자해서 <이쿠노 아리랑>이라는 작품집도 7년전에 내게 되었다.
 
내가 등단했던 1987년 당시만 하드라도 한국인이 해외 나들이는 선택 받은 사람들만이 특권처럼 여겨졌던 시대이다.
 
재일동포의 삶을 작품화 한다는 것은 자전<自轉>을 못하는 달의 뒷부분을 쓰는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의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오고 한일간은 당일치기 생활권으로 시대가 바뀌었다.
 
그러면서 재일동포의 실상은 달의 딋부분처럼 베일에 쌓였던 것이 한국의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면으로 클로즈업되면서 표면화 햇다.
 
해방 후부터 대명사처럼 불리웠던 60만 재일동포의 베일이 고국에 그 모습을 드러냈지만 동포사회는 지금 과도기시대로 접어들었다.
 
60만 동포라는 수식어가 58만명으로 줄어들고 약 3년전에 재일중국이 60만명을 넘으면서 해방 후부터 지켜온 재일외국인 1위 순위를 넘겨줘야 했다.
 
재일동포의 감소는 자연 감소가 아니라 약 10년전부터 일본 귀화자가 연간 1만명을 넘고, 재일1세의 비율은 10%이며, 국제결혼은 90%에 이르고 있다.
 
"고국 한국이 그렇게 가난하고 어렵던 시대에도 귀화자가 줄었는데 선진국이 된 한국이 뒤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귀화자가 매년 늘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우리 국적을 자랑스럽게 지켜 주십시오."
 
한국 정부 고위직 인사가 민단에서 강연하면서 하소연과 같은 호소가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은 필자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종주국 일본열도에 민단 조직은 47지방본부와 279지부가 있고 토쿄에 중앙본부가 있어서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거미줄처럼 뻗어있다.
 
식민지 종주국에 이렇게 만든 조직체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민단의 우선 순위 사업 속에 언제나 포함되는 사항의 하나가 <차세대육성>이다.
한글 세대가 없는 재일동포 사회 속에 1세가 10% 이내로 줄어든 현실에 차세대육성론은 미래 동포사회의 사할에 직결 된다.
 
그들은 우리말, 우리글, 우리 풍습, 한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를 이어받아 동포사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
 
다른 한편 한류붐과 함께 한글 세대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들어와서 뉴컴머사회를 형성하고 토쿄와 오사카에 그들의 조직체 <한인회>가 최근 몇년 사이에 탄생했다.
 
동포사회의 이러한 과도기시대에 이십 여년전에도 우리글 작가는 필자 혼자뿐이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총련조직에는 <조총련문학예술동맹위원회> 산하에 문학부가 있어서 우리글로 거의 작품들을 쓰고 있지만 그들의 활동은 북한과는 작품 교류가 없으며 문학부 중심에서 맴돌고 있다.
 
필자도 우리글, 우리말 공유 인식 속에서 오사카에서 그 모임에 가끔 참석하지만 소설은 없고 시가 전부이며, 어른이 읽는 동시와 같은 내용이 대부분이다.
 
일본으로 쓰는 동포 문인들과 동포사회의 문화행사에서 가끔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지만 서로 쓰는 창작 언어가 달라서 문학적 공통 요소점은 한계가 있다.
 
우리말 모르는 2.3세의 문인들과 만나면 그 한계성은 더욱 벌어진다.
동포 문인들의 구심력 역활을 할 수 있는 어떤 조직체도 없으며 문예지도 거의 없다.
 
아무리 창작은 혼자하는 작업이라지만 강제성을 띈 조직체와 문예지가 없으니 서로 주고 받는 공유의
자극성도 없어서 창작은 그야말로 고독한 작업이 될 수 밖에 없다.
 
문학의 우리글 <차세대육성> 일본에서는 사치스러운 바람이다.
생활 용어인 일본어가 그들의 모국어가 될 수 밖에 없고 한국어는 이름뿐인 모국어이고 외국어인 것이다.
 
새로운 한글 세대가 날로 늘어나는 현상이지만 문학의 영역까지 접근하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고 필자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곤 한다.
 
일본에서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적인 차원이 아니고 필자에게 있어서는 우리말 지키기일런지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시를 썼었지만 약 40년전에 일본에 왔을 때 동포사회를 쓰기 위해서는 소설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80년 <오사카문학학교>에서는 시의 창작과에 적을 두었었다. 일본어 실력의 한계로 소설은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우리말로 소설을 계속 써왔다.
앞으로도 미력이나마 동포사회의 삶을 필자는 나에게 주어진 문학의 길로 접근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김길호의 일본 이야기>는 문학을 떠난 동포들의 삶과 한일간의 오늘을 나름대로 전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필자는 이 난도 계속 쓸 것이다. <제주투데이>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료(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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