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연구소는 4·3 65주년을 맞아 오는 28일 오후 2시 제주시 열린정보센터에서 12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을 열었다.

이번 '증언본풀이 마당'의 주제는 '그때 말 다 하지 못헤수다'다.

이날 증언본풀이 마당에서는  '4·3 구술자료 총서'에 수록된 증언자인 고신종(78) 어르신, 김이선(82) 어르신, 변태민(74) 어르신이 당시 이야기를 생생히 증언했다.

고신종씨에게 4·3은 13살 나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특히나 그가 살았던 제주시 용강리는 대토벌로 주민 피해가 컸다. 눈앞에서 어머니와 가족, 친지들을 잃은 고씨는 생존을 위해 산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유, 나이를 불문하고 씌워진 도피자라는 족쇄는 수용소 생활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견뎠나 싶지만, 그래서 더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고신종 어르신이 4.3당시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고씨는 4·3 당시 제주시 용강리에 거주했다. '대토벌 작전'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 곳 중 한 곳이다.

고씨는 가족들과 거친오름 옆 견월악 서쪽 속칭 '샛머흘'로 피신했다고 했다. 그 곳은 군인들이 몇 차례 토벌에 나섰지만 적발되지 않았다고 했다.

고씨는 1949년 1월 7일은 평생 잊지 못할 날이라고 했다. 하루에 동네사람 105명이 무참히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고씨는 이날 군인들이 포위망을 점점 좁혀오더니 사람들을 한군데로 모아 놓고 총을 쐈다고 했다.

고씨는 "사람들을 포위한 후 총을 쏘는데 나는 목숨이 길어선지, 오래 고생하라는 운명인지 살아남았다“며 ”나는 살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고씨는 당시 부락 청년들과 함께 빨리 도망가라는 어머니 얘기만 듣고 뛰었다고 했다.

고씨는 "4·3평화공원 서북쪽인 용강·봉개·삼양 사이에서 모두 숨졌다“면서 ”그 때 나는 나이가 어려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도저히 도망칠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고씨는 "담 옆에서 눈을 감은 채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면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고씨는 “나중에 보니까 옷이 오줌에 젖어 있었다”면서 “군인들이 떠난 후 현장을 둘러보다 어머니가 총에 맞아 숨진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고씨는 어머니가 뛰지도 못한 채 겨우 밭 하나 넘어 도망가다가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씨는 이날 어머니를 비롯해 할아버지,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살아 있어 그 후부터 아버지와 숨어 지냈다고 했다.

이때 쯤 '계엄령'이 해제돼 많은 사람들이 귀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고씨는 군인들이 이들을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군 주둔지로 잡아간 후 헌병대 영창을 거쳐 제주시 건입동 산지공장(옛 주정공장)으로 데려갔다고 했다.

고씨는 석방 후 할머니와 봉개동에서 지내던 중 아버지도 석방돼 함께 지내게 됐다고 설명했다.

고씨는 "4·3으로 어머니 뿐 아니라 친척들이 많이 돌아가셨다“며 ”그놈의 세상을 생각하면…“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고씨는 “지금 정부가 하는 것을 보면 대단히 잘못하는 것 같다"며 "제주공항에서 희생자 유해를 발굴한다고 하는데 지금 발굴해서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고씨는 "제주4·3평화공원의 경우 돈을 들이면서 만드는지 모르겠다. 거기 가서 참배할 것이라면 부모 묻은 곳에서 술잔을 올리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이어 고씨는 "우린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고씨는 “우리가 돈에 욕심 내는 게 아니”라며 “광주사태처럼은 아니더라도 얼마라도 보상하는 게 예의"라고 정부 보상 필요성을 강조했다.<제주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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