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5월 20일자 중앙일보 <김진의 시시각각>에 게재한 "아베, 마루타의 복수를 잊었나"가 한일 양국에서 새로운 불씨가 되었었다.
 
일본 정계와 매스컴은 물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도 일제히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면서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시에서는 문제시 삼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의 중앙지에 게재된 컬럼에 원폭을 "신의 징벌"이라고 썼다는 것이다.
 
필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일본이 이렇게 들썩이는지 원문을 읽었다.
 
산케이신문은 원본을 일본으로 번역하여 게재했다.
 
"역사에는 대표적인 불벼락이 두 개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독일 드레스덴이 불에 탔다. 6개월 후 일본 히로시마와 나나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들 폭격은 신의 징벌이자 인간의 복수였다. 드레스덴은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의 복수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일본 군국주의에 희생된 아시아인의 복수였다."
 
이러한 내용을 주축으로 쓴 컬럼인데 일본에서 문제시 삼은 것은 일본에 떨어진  원폭 투하가 신의 징벌이라는 구절이었다.
 
일본에서 야스쿠니 참배, 종군위안부, 역사인식 등의 망언이 계속 되자 그에 대한 반론 기사였지만 원폭을 "신의 징벌"이라는 표현은 너무 지나쳤다.
 
일본에 대한 맞불넣기의 내용이나 다름없어서 일본에서 읽는 필자로서는 불쾌했다
 
일본 국내에서도 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을 때 이 컬럼은 이 흐름에 찬물을 끼쳤으며 백해무익이었다.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가 전쟁을 빨리 종식 시킨 점은 모두 공유 할 수 있는 인식이지만 23만여명의 사망자를 낸 원폭을 그 이상 미화 시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없는 것이다.
 
사망자 속에는 한국인이 히로시마에서는 3만명, 나가사키에서는 1만명의 동포도 포함 되었다.
 
피폭 생존자는 약 49만명 중에 한국인은 약 3만명을 넘었고 귀국자는 약 2만 3천명 이었다.
 
경남 합천에 있는 원폭피해자 복지회관에는 아직도 백명을 넘는 피폭자들이 입주 하고 있다.
 
히로시마에는 1970년재일본 한국 민단 히로시마본부가 한국인을 위한 위령비를 건립했다.
 
일본 야구계의 유일한 피폭자 장훈씨<72>는 다섯 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입었고 열 한살이었던 큰 누님은 근로동원 중에 원폭으로 목숨을 잃었다.
 
장훈씨는 이름을 날리던 현역 시대에는 원폭에 대해서 굳게 침묵을 지켜왔다.
 
환갑이 지났을 때 텔레비에서 "전쟁 따위는 관계없다."는 젊은 세대의 발언을 듣고  "우리들은 피폭 체험을 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이지 않을까"라는 인식 속에 다섯 살 어린이가 본 지옥과 같은 참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장훈씨의 이러한 원폭에 대한 체험담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지금까지 피폭자라는 것을 숨겼던 어느 의사도 스스로 고백하고 다른 피폭자들과 교류도 나누고 있다고 한다.
 
5월 27일자 일본 석간 신문들은 김진씨가 "<본래 전하고 싶었던> 취지와 달라서 일본 원폭 희생자와 유족을 포함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분들에게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라는 석명문을 27일자 중앙일보에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김진씨가 유감의 뜻을 표한 것은 당연한 처사이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폭 투하에 대한 논점은 절제된 시각과 역사인식이 필요하다.<제주투데이>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료(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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