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비 유통업계를 마음대로 주물러 왔던 다이애 창업자인 나카우치 이사오(中內 功 83세)씨가 9월 19일 사망했다.

최고 전성기인 1994년도에는 187사에서 매상고 52조 2930억을 올리는 거대 그룹으로 우뚝 섰다.

그는 오사카에서 태어나고 코오베에서 자랐다.1957년 오사카에서 “좋은 상품을 더욱 싸게”라는 가격파괴 유통혁명을 캣치프레이즈로 오사카에 <다이애약국주부의가게>를 개업했다.
그 후 식품,의료,잡화 등을 종합 판매하는 슈퍼를 전국적으로 전개하면서 대량구입. 대량판매로 저가판매를 정착시켰다.

“가격을 정하는 것은 메커가 아니고,소비자라야 한다.”라는 유통 혁명을 부르짖는 그에게 저가판매를 저지할려는 마쓰시타 전기산업(내쇼날)등과 대립하면서도 1972년도에는 소매업 매상고 일본 최고를 기록했다.
이렇게 고도성장 속에 대중 소비사회의 막이 열림과 동시에 소비자 본위의 가격파괴 성공으로,그는 소비 유통업계의 카리스머로 군림하게 이르렀다.

그의 사업욕은 슈퍼에 국한되지 않았다.1988년에는 프로 야구 구단을 매수하고,1994년에 소규모 슈퍼 13사를 합병했으며 유원지 외식(外食)산업 파징코 가게 등을 산하단체로 두면서 1994년 그룹의 피크를 맞이했다.

그러나 거품 경제의 붕괴로 인해 사업확대 노선을 적극 추진하여 승승장구하던 다이애 그룹은 추락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엎친데 덮친 격으로 코오베 지진 때는 5천억원의 피해를 입으면서 더욱 박차를 가했다.

거품 경제와 함께 1990년도 후반에 들어서면서 소비자의 지향은<대량소비>에서 기호품에 대한 상품 선별 의식이 예민해지고, 저가판매를 주축으로 한 전문점이 새로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신봉하던 토지신화의 붕괴였다.

“땅값은 다시 분명히 오른다.일본의 토지는 한계가 있다.”거품 경제의 원흉이었던 토지 값의 일방적인 추락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378의 점포를 낸 다이애 슈퍼의 토지는 또 다른 사업 투자였지만 최대의 실패였다.
이러한 것이 외부적인 요인이라면 내부적인 요인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창업자 특유의 독선적인 원맨 경영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측근이라도 경영면에서 두각을 나타날 때에는 가차없이 배제했다.이 배타적인 경영이 인재 부재를 초래했으며 위기에 처한 그룹을 회생불능케 했다.
문어발식 사업 확장 속에 지역 밀착형으로 성공한 다이애 구단은 귀화 한국계 일본인 손 정의 회사인 소프트뱅크에 작년에 매각 되었다.

결국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나서,1988년에 설립한 <유통 과학 대학> 학원장으로 재직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여담이지만 코오베시에 있는 그 대학에 필자의 아들이 2학년 재학중이다.
그의 사거(死去)기사를 다룬 9월20일자 요미우리,마이니치 신문은 각각 <나카우치 왕국절정과 실추>.<천국도 지옥도 보다>라는 기사 속에 일본 소비 유통의 역사였던 그를 대서특필로 다루었다. 물론 다른 미디어들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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