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나도 성묘 같이 가지."
모처럼 맞은 휴일 밀린 자료 정리와 글을 쓸려고 했는데 아침에 모녀의 대화를 듣고 나도 성묘를 같이 가기로 했다.
 
필자의 선친들의 산소는 모두 고향 제주에 있어서 일본에는 장인과 장모의 산소가 있었다.
 
필자의 휴일은 카렌다에 적힌 휴일과 달라서 서로 가족들과 쉬는 날이 같을 때가 드물었다.
 
이 날도 평일의 화요일인데 어쩌다 모두 쉬게 되어서 같이 가기로 했는데 가족들과 가는 것은 실로 몇년만의 일이었다.
 
산소는 오사카 아베노에서 열차를 타고 약 40여분 걸리는 전원도시 돈다바야시에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서 약 20여분 걸어서 가면 시가 관리하는 묘지가 있는데 시가지와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누라의 친정은 이곳 돈다바야시인데 재일동포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부모들은 경상북도 의성이 고향이고 일제시대에 일본에 와서 돈다바야시에서  살았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스스로 이곳에 산소를 정하고 묻히니 영원한 안식처가 되어버렸지만 이 묘지에는 동포가 없는 것 같았다.
 
생전에는 통명인 일본명을 사용하다가도 돌아가시면 비석에는 본명과 본관을 명시하지만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성묘를 마치고 귀가 때 마누라와 딸은 산소의 가까운 곳에 있는 사우나 목욕탕에 들러서 간다고 했다.
 
올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시간도 없고 별로 들르고 싶지 않아서 혼자 귀가 열차를 탔다.
 
그리고 가족들과 헤어져서 할 일이 따로 있었다. 헌혈이었다.
 
필자가 헌혈을 문득 생각한 것은 아침에 집에서 성묘를 나서기 바로 직전이었다.
 
요즘 며칠 간 전혀 술도 안 마시시니까 몸과 마음이 아주 건전한 상태였고 성묘 후의 헌혈은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헌혈하면서 받은 카드를 전부 챙기고 나왔다. 
 
귀가 열차 종점 아베노에서 내리고 지하가에 있는 헌혈 센터를 찾으니 없었다.
지난 1월에도 이곳에서 헌혈을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잘못 온즐 알고 다시 찾아도 장소는 같은데 없어서 주위 사람에게 물으니 이사 갔다면서 벽보를 보라고 한다.
 
그때야 다가가서 벽보를 보니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었다고 안내 말이 써 있었는데 3월까지 마치고 4월부터는 다른 장소에서 한다고 했다.
 
다시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 번거로워서 그냥 갈까 그러다가 모처럼 왔는데 마음을 고쳐 먹고 가기로 했다.
 
이사한 곳은 내년 봄에 오픈 예정인 일본에서 제일 높은 건물 <하루카스> 빌딩의 바로 옆 빌딩이었다.
 
헌혈 센터는 3층에 있었는데 지난 장소보다 아주 넓고 깨끗했다.
벳드도 지난 번 장소는 10개였는데 이곳은 15개가 있다고 했다.
 
이날은 비가 와서 우산도 갔고 갔는데 우산 보관대도 열쇠가 없는 번호식 잠금 장치인데 처음 보는 보관대였다.
 
필자는 지금까지 네번이나 헌혈을 했는데 처음에만 2백CC이고 18년 전 한신<코베>대지진 후로 4백CC를 요청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헌혈 때마다 받은 카드를 제시하고 하나에 전부 기입 요청하고 간단한 설문에 응했다.
 
이때에도 담당자가 묻는 경우와 자동화된 기계에 직접 응답하는 것도 있어서 경험자가 아니면 처음에는 복잡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피를 뽑기 전의 간단한 피 검사가 항상 필자를 긴장 시킨다.
 
나는 혈관이 제대로 안 나와서 눈으로도 제대로 찾을 수 없다.
 
감기 때 주사라도 맞게 되면 팔뚝의 혈관도 못 찾아서 손등으로 혈관주사를 맞은 적도 있었다.
 
지금까지 헌혈 신청을 해서 간단한 피 검사 단계에서 혈관이 안 나오니까 무척 죄송하지만 안 되겠다고 해서 세번이나 그냥 되돌아 온 적이 있었다.
 
이때에 주위 사람의 시선에 무척 신경이 쓰였다. 헌혈 직전에 거부 당하고 그냥 나오니 이유는 모르고 모두 의아한 시선을 보내니 위축될 수 밖에 없다.
 
오늘 같이 크고 넓은 곳이면 그런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개운치 않은 곳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헌혈을 기피했었지만 필자가 언제나 가는 의원의 베테랑 간호사는 단 한번에 혈관을 찾아 낸다.
 
그래서 다시 큰 마음 먹고 지난 1월 헌혈 센터에 지서 기금까지의 일을 자초지종 털어놓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여러분의 실력을 발휘해 달라고 했다.
 
담당 의사와 간호사도 필자의 말을 듣고 잘 알았다면서 혈관 찾기에 노력을 한 결과 몇년만에 헌혈을 할 수 있었다.
 
이번 갔을 때에도 혈관이 안 나오니까 따뜻한 수건을 양 팔뚝에 뚤뚤 말고 냉커피 마셨다니까 죄송하지만 따뜻한 음료수를 다시 마셔 달란다.
 
몸 온도가 차면 혈관이 위축되니까 몸을 따뜻하게 해서 혈관을 부풀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번도 4백CC를 헌혈하고 헌혈 카드도 한장에 전부 기입하고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혈관이 제대로 안 나오니까 이것은 담당 간호사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존심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서도 헌혈을 하는 필자를 언제나 탐탁지 않게 여기는 마누라와 딸의 소감은 다름없었다.
 
필자가 얘기 안하면 모르고 넘어갈 일이지만 그렇다고 감추지는 않지만 특이한 일인데 슬쩍 지나버리는 것도 납득이 안돼서 말했었다.
 
"아무리 헌혈이라 그래도 피를 뽑는다는 것은 피를 판다는 선입감이 강하고 또 판다는 것은 자기 피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과 같으니까 앞으로는 나이도 있고 그러니 하지 마세요."
 
이것은 마누라의 소감인데 딸의 소감은 차원의 다른 의견인데 걸작이다.
 
"술 잘 마시고 살이 찐 아버지 피는 아무리 잘 봐 줘도 깨끗한 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피를 남에게 수혈한다는 것은 그 분에게 죄송한 일이니까 헌혈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마누라의 발언에는 그래도 궁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딸의 의견에는 나의 피가 더러운 피라는 것이다.
 
딸에게는 사전에 철저한 검사 결과 이상이 없으니까 헌혈이 가능했는데 그 의견에는 동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어쨌든 마누라와 딸은 나의 헌혈을 반대하고 있다. 나이 문제도 있지만 만 칠십이 되기 전 날까지는 가능하다고 했다.
 
필자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고 그 중의 하나가 어쩌다 헌혈이다.
 
필자가 헌혈 신청하면 본명인 나의 이름만 보더라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피의 수혈자는 물론 동포도 있고 다른 외국인도 있겠지만 거의는 일본인일 것이다.  
 
재일 한국인인 필자가 지속적으로 헌혈을 하고 있는 것을 일본인 담당자는 업무처리 하면서 무엇인가 다르게 느끼는 감정이 조금이나마 있을 것이다.
 
광의적으로는 필자의 혈액형은 B형으로 B형을 필요로 하는 수혈자를 위한 헌혈이지만 협의적으로는 일본인을 위해 제공한다는 의미 역시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남아 있다.
 
제대로 잘 풀리지 않는 한일 관계에 대한 역발상의 좋은 의미에서 이러한 마음이 하나도 없다면 거짖말이 될 것이다.
 
"헌혈이 또 어쩌면 자기 만족일런지 모르지만 그래도 저는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누라가 반대 의견에 덧붙인 말이었다.
 
사실 자기 만족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누라와 딸에게는 안됐지만 필자가 칠십까지 건강한 상태에서 지낼 수 있다면 헌혈은 지속성 있게 계속할 생각이다. <제주투데이>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료(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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