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부터 오사카부 사카이<堺>시내에는 고개를 갸웃둥거릴  포스터가 여기저기 나붙었다.
 
타케야마 오사미<63> 사카이 시장과 카와부치 사부로<76> 전 J리그 체어맨이고 현 일본 축구협회 명예회장 사진이 크게 찍혀 있었다.
 
그것까지는 일반 포스터들과 다름없지만 그 포스터에 써 있는 선전 문구가 이목을 끌었다.
 
"사카이는 하나 사카이를 없애나! 堺はひとつ堺を無くすな:사카이는히토쓰 사카이를나쿠스나"라는 표어와 타케야마 시장과 카와부치 명예회장의 가두 연설를 2004년 1월 10일 오전 7시 반에 <사카이 동>역 앞에서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그 포스터를 보았을 때 필자는 날자 인쇄를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약 반년 후의 현직 시장의 가두연설의 선전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나붙여야 할 필요성이 무엇인지 필자만이 이니고 모두가 의아스러웠다.
 
일본 프로 축구를 창설하고 제10대 일본 축구협회 회장인 카와부치씨는 타케야마 시장과 사카이시에 있는 고등학교 동문이며 선배였다.
 
일본 전국에서 지명도가 높은 카와부치 선배와의 사진과 가두 연설의 포스터에는 타케마  시장측의 치밀한 전략의 소산이었다.
 
사카이시는 9월 29일 시장 선거가 있었다. 임기 1기를 마치고 타케야마 시장은 2기 출마를 표명하고 선거 준비를 진행 시키고 있었다.
 
4년 전 당시 하시모토 오사카부 지사의 전면적인 응원 속에 현직 시장을 물리치고 타케야마 시장이 압승했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달랐다. 하시모토 <유신회> 공동 대표, 오사카 시장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선거가 되고 말았다.
 
오사카부 산하 시들과 오사카시를 통합해서 토쿄도와 같은 거대한 지방 자치제를 만드는 것이 하시모토 시장의 정치적인 꿈이었다.
 
그래서 오사카 지사를 사임하고 유신회 간사장을 오사카부 지사로 자신은 오사카 시장으로 나와서 동시 선거에서 압승을 했다.
 
사카이시는 4년 전 응원했던 시장이 있으니까 자신의 꿈은 착착 실현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타케야마 시장의 이 구상에 반기를 들었다. 인구 50만 이상의 정령도시로 승격해서 예산 집행 등에서도 자치권이 많아 지고 오사카부 관할에서는 오사카시와 사카이시 밖에 없는 정령도시로서 오사카시와 대등한 관계였다.
 
그리고 오사카부 전부를 통합한 거대 자치제가 실시될 경우 현재의 사카이시는 여기 저기의 구<區>로 분활되어 사카이시가 없어져 버릴 위기감도 있었다.
 
하시모토 시장으로서는 사카이시의 찬성이 없는한 자신의 추진하는 통합 오사카 자치제의 꿈은 실현 불가능에 가까웠다.
 
4년 전 자신이 응원했던 시장이 정치적 배반도 가슴 아프지만 이 선거만은 질 수없는 선거로서 어느 선거보다도 이겨야 했다.
 
서로가 질 수없는 선거로서 사카이 시장 선거는 일개 지방 선거가 아니고 전국의 주목을 끄는 선거가 되었다.
 
2014년 1월 10일 타케야마 시장과 카와부치 가두 연설의 포스터는 승부를 예측할 수없는 선거이지만 반드시 이겨서 이 날 꼭 실행하겠다는 여유의 선제 공격용 포스터였다.
 
하시모토 시장이 이끄는 유신회는 초강경 보수인 이시하라 신타로 유신회 공동대표를 비롯한 중앙 정치인은 물론 소속 국회의원들을 동원하여 인해전술로서 사카이시를 누볐다.
 
자민당과 공명당의 중앙 본부 지지를 얻지 못한 타케야마 시장측은 유신 이외의 모든 정당이 똘똘 뭉쳤다. 오사카부 자민당, 공명당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결과는 타케야마 시장이 약 19만 8천표, 유신회 니시바야시 후보가 약 14만표로 5만표 차라는 압승을 했다.
 
불패의 선거 신화 속에 승승장구 하던 하시모토 시장이 유신회 텃밭 아니 안방인 오사카부의 사카이시에서의 패배는 충격적이었다.
 
하시모토 시장은 확고한 이념없이 가볍게 들떠 있던 민심이 지금까지는 자신을 적극 지지했었지만 그 민심이 자기를 떠났다고 패인을 분석했다.
 
그의 패인 분석은 사실 그대로이지만 들떠 있던 민심이 떠난 이유에 대해서 가장 큰 핵심적 요소였던 종군위안부 발언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아직도 강력한 거부반응을 이르키고 있다.
 
오키나와 주둔 미군은 당당히 영업허가를 받고 영업하는 풍속영업<유흥가>점에 가서 젊은 장병들이 성처리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자랑처럼 늘어놓았던 발언이 집중포하의 비난을 받자 용두사미처럼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종군위안부 발언에 대해서는 미국과 유럽의 제국가들마저 끌어들여서 전시하의 군인 성처리를 정당화 시킬려다가 미국의 자매도시 센프란시스코시 방문도 시장으로부터 거절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오사카 시민글럽인 <감시역> 단체에서는 이 방문의 중지로 일어난 캔셀요금 69만엔을 하시모토 시장이 지불해야 한다고 오사카시에 <주민 감사:監査 청구>를 10월 22일 요청했다.
 
그렇지만 그는 말에 말을 덧붙이면서 종군위안부에 대한 자기 발언의 타당성과 정당성을 합리화 시킬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으며 진행중이다.
 
하시모토 시장의 이러한 궤변은 그의 가장 큰 무기였던 카리스마성을 희석 시키고 포플리즘을 최대로 이용했던 그의 정치적 수법의 붕괴를 자초하고 있다.
 
이 영향은 오사카 시정의 정책 결정에서도 그의 리더십의 저하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2015년도에 완전 민영화를 부르짓던 오사카시 지하철 민영화 법안이 의회 통과를 보지 못한 채 계속 심의로 방황하고 있으며, 유신회 소속 시의회 의장이 불신임안이 통과되어 의회가 공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는 몇년 전 정계를 떠난 고이즈미 전 수상의 오사카판이었다.
 
반드시 정적 아니면 정책상 공격의 대상을 만들어 가차없이 자가당착적인 논리 속에 공격하고 비난한다.
 
그럴 때마다 미디어는 그를 놓치지 않고 연일 텔레비는 물론 신문, 심지어는 주간지까지 보도 경쟁을 벌인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하루에 한번 어디서나 그의 얼굴을 보아야 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이 전략 속에서 매일 자신을 노출 시키고 화제의 중심 인물로 스스로가 클로즈업 시켰었다.
 
이제 그 한계성이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다. 몇겹으로 도금되었던 하시모토 시상의 인물상이 서서히 벗겨지고 있다.

중앙 정계에서의 그의 입지와 위상은 날마다 더욱 위축되고 있다.

작년의 중의원, 금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한 자민당의 위력 앞에 주도권을 잡으려던 유신회의 정치력은 완전히 퇴색되고 말았다.

중천에 떠있던 태양처럼 열기를 내뿜던 그의 존재감은 석양을 향한 사양길로 기울어지고 있다.
 
사카이시 시장 선거에 압승한 타케야마 시장 후원회 사무실에 필자가 전화를 걸었다.
 
"내년 1월 10일 아침 7시 30분 가두 연설은 포스토 예정처럼 실시합니까?"
"네. 카와부치씨는 잘 몰라도 타케야마 시장은 꼭 실시합니다."
 
하시모토 시장과의 선거 승리를 자신감과 약간의 조소 속에 당당하게 붙였던 포스터가 지금도 필자의 머리에 가끔 떠오른다.<제주투데이>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료(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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