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일본에서 간 우리 일행이 제관일줄은 전혀 몰랐었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됐으니까 가기만 하면 된다는 허근일 회장의 말에 준비라는 것이 어느 기준을 두고 하는 말인지 미리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만 김수로왕 추향대제가 봉행되는 제례 참석차 일본에서 모처럼 갔으니까 내빈석 자리쯤에나 앉아서 관람하는 줄 알았다.
 
"재일 가락 오사카 종친회"에서 제10대 회장인 허근일 회장외 5명, 초대 손님으로 홍성인 "민단 오사카 지방본부" 상임고문외 6명 모두 13명이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이 제례에 참가했다.
 
필자는 본관이 김해 김이어서 종친회 일원으로 참가했는데 김수로왕능은 물론 김해에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18일 오사카에서 같이 가신 당종친회 제7대, 9대 회장과 참봉을 역임하고 현재 명예회장이신 김이태 <92> 민단 오사카지방본부 상임고문이 김수로왕능에 갔을 때 검은 제복을 주시면서 예를 올려야 한다고 했다.
 
이 날 처음으로 어릴 때 교과서에서 배우고 말로만 들어서 필자에게는 역사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던 김해 김씨, 아니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능을 참배했다.
 
실 구름 한점 없이 저물어 가는 오후의 맑은 가을 날씨였다. 참배를 마치고 잘 가꾸어진 아담하고 고요한 숲 속의 왕능을 돌아볼 때 역사의 시공을 초월한 생명의 맥이 따뜻하게 주위를 감싸고 흐르고 있는 듯한 감개에 젖었다.    
 
"어떤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했는지 모르지만 이 왕능 훼손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그러한 사건을 막기 위해 센서를 설치했습니다."
 
안내 해주신 분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왕능을 돌아보는 우리 일행에게 설명하는데 그 분이 쓸쓸한 미소보다도 그러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연민스럽고 안쓰러웠다. 
 
참배를 마치고 나서 추향대제를 집행하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간단히 음식을 들면서 설명을 들 때야 19일 오전 11시에 실시되는 대제의 제관으로 선정된 것을 알았다.
 
다음 날 오전 9시 30분부터 제복으로 갈아 입고 제례 순서에 대한 설명과 연습을 마치고 11시부터 시작하는 대제에 임했다.
 
가락국 제2대 도왕에서 부터 제10대 양왕에 이르기까지 각 대마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의 삼헌관과 학생을 두고 제례는 엄숙하게 봉행됐는데 역사의 파노라마였다.
 
일본에서 간 13명 중 김이태 명예회장만 따로 참봉 제복을 입고 다른 장소에서 행사를 치르고 남은 일행은 2대 도왕에서 3대 성왕의 삼헌관과 학생 신분의 제관역을 맡았다.
 
김창식 재일 가락 오사카 종친회 고문이며 민단 오사카 지방본부 상임고문이 2대 도왕의 필두 초헌관으로서 추향대전을 마쳤는데 필자는 3대 성왕의 아헌관역을 맡았었다.
 
가락국 연도 1972년이고 초대 김수로왕으로부터 10대 양왕까지 491년간의 왕조였다.
 
해마다 치르는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 숭안전에서 열리는 춘향대제와 추향대제는 김수로왕의 건국 정신과 위업을 기리고, 후대의 화합과 번영을 기원하는 전통제례로서 경남 무형문화제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성에서 제일 많은 김씨 성에서도 김해 김씨가 가장 많아서 2012년 현재 약 5백만이라고 했다.
 
"우리가 처음 김수로왕능을 참배했을 때는 지금과는 아주 달라서 정말 초라했었지요."
 
추향대제 참배를 마치고 10월 29일 이 기사를 쓰기 위해 오사카 이쿠노쿠의 김이태 명예회장댁을 방문했을 때 들려준 말이었다.
 
1978년 7월 27일 "재일 가락 오사카 종친회"가 창립됐다. 당시 민단 오사카 사무국장이던 김상만씨의 노력으로 종친들이 모여서 창립했는데, 토목업을 경영하던 김경업씨가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당시 김이태 명예회장은 50대였다고 한다. 다음 해, 1979년 4월 11일 종친회 일행은 처음으로 김해 김수로왕능과 유적이 있는 산청, 경주를 방문했다.
 
방문을 마치고 둘아온 종친회에서는 본격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다고 했다. 우선 김수로왕능 일대의 토지를 구입하여 확보하고 정원 조성과 화장실 등을 세롭네 만들고 주변 환경 조성에 힘썼다.
 
모든게 그렇지만 사업계획이야 세울 수 있지만 재정적 뒷바침이 없는한 한계가 있었다.
 
"한국 종친회에서도 많은 노력을 했지만 재일동포 종친회 역할이 컸습니다. 지금도 나는 해마다 춘향대제와 추향대제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습니다."
 
90대이면서도 종친회 명예회장은 물론 민단 오사카 지방본부 상임고문과 아직도 제조기업의 현역 경영자로서 활발히 활동하는 김 명예회장의 행동력에는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었다.   
 
김해시 중심가에 있는 김수로왕능은 성지로서 김해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당국의 재정 지원도 받고 있다고 하지만 재일동포 종친회가 앞장섰다는 약 35년 전의 이야기로부터 들려주는 김이태 명예회장의 술회 속에는 감회 서린 모습이 역력했다.
 
오사카 종친회 활동이 아주 약해지고 말았는데 그게 걱정이라는 말에 필자는 가슴이 찔렸다.
임원직을 맡으면서도 그에 걸맞는 일을 제대로 한번 한 적이 없었던게 솔직한 사실이다.
 
이 참배에 참석한 초대 손님은 홍성인, 박소병 민단 오사카 지방본부 상임고문, 이용권 당본부 부단장, 박도병 당본부 부회장, 문희원 당본부 감찰위원, 강길용, 정선박 당본부 직선위원이고 종친회에서는 김이태 명예회장, 김창식 고문, 김운용 8대 회장, 허근일 회장, 허명신 부회장, 그리고 감사인 필자였다.
 
정현권 민단 오사카 지방본부 단장은 민단 업무가 있어서 참가하지 못했다.<제주투데이>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료(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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