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넓궤 동굴 내부

제주도의 4월은 노란 유채와 연분홍 벚꽃 물결. 그리고 출렁이는 옥빛바다 너무도 매력적인 풍광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이 섬을 참혹하게 물들인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만들었던 잊지 못할 아픔을 감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의 4월이 더욱 아름다움을 발하는지 모른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잊을 수 없는 4.3역사의 현장이다. 제주4.3 66주기를 맞아 이 곳 안덕면 동광리를 찾았다.

1948년 4월 3일 이날 이 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당시 제주4.3의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인 동광리를 비롯한 안덕면 학살관련 이야기를 그려본다.

4월 3일 무장봉기는 그해 겨울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 마을은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다.

1948년 11월 중순 토벌대(군대와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가 초토화 작전을 벌이자 동광리 주민들은 큰넓궤로 들어가 피신생활을 하게된다. 이 후 이 굴이 발각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되버렸다

#동광리 큰넓궤

동광리의 큰넓궤와 도엣궤는 동광 목장안에 있는 용암동굴이다.

1948년 11월 중순 이후 동광 주민들이 2개월 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곳이다. 동광리 주민들은 11월 15일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시행되자 이곳으로 숨어 들었다.

그 당시 이 굴에는 25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굴은 험한 대신 사람들이 숨어 살기에 좋은 곳이였다. 젊은 사람들은 토벌대의 습격에 대비해 망을 보거나 식량이나 물을 나르는 일을 했다.

큰넓퀘에서 살아남은 신원숙(81)씨는 그 당시 기억을 이렇게 증언했다

주변에 작은 굴에서 밥을 해먹다가 차롱에 담아서 가져와 먹고... 밖에 다닐때는 발자국이 남지 않게 돌위로만 다녔어.. 똥도 밖에 나가서 누지 못하고.. 젊은 사람들은 대나무로 만든 창을 들고 주변 작은 굴에서 망을 봤어....

하지만 주민들의 은둔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40여 일만에 발각됐다.

큰넓궤 동굴 내부

토벌대가 밀려들어오자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굴 안으로 대피시킨 후 이불 등 솜을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쌓아 놓고 연기를 피워대자 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토벌대는 총만 난사했다고 한다.

토벌대는 밤이 되자 굴 입구에 돌을 쌓아 놓고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다행히 인근에 숨어있던 청년들로 인해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지만, 달리 대피할 곳이 없어 무작정 한라산을 바라보며 산으로 들어갔고, 그 후 주민들은 영실 인근 볼레오름 지경에서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잡혀 서귀포로 끌려가거나 정방폭포 인근에서 학살됐다고 한다.


#동광리 주민 잠복학살

1948년 12월 12일 군토벌대가 동광리 주민들을 양씨가족 공동묘지 안 밭에서 학살한 사건을 ‘잠복학살’이라 부른다.

이날 희생된 11명의 가족들이 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나타날 것으로 보고 그날 밤 근처에서 잠복했다가 주민들을 모두 학살했다고 한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신원홍(75)씨는 “동짓날 열하루날 죽을 사람이 일곱, 열 이튿날 죽은 사람이 열아홉...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였어.. 그 어린애들을 죽창으로 찌르다가 힘드니까.. 보리짚을 던져 화형시켜 죽이기도 했어. 군인들이 숨어 있다가 시신을 수습하러 온 사람들도 모조리 몰살시켰지.. 그때를 기억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아

이처럼 국가권력이 저지른 제주4.3의 대규모 학살은 희생자와 유족자들의 가슴에 원통함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 세월속에서 제주4.3이 발생한지 40여년만에 제주도민과 언론 시민단체들이 본격적으로 제주4.3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앞장섰고, 그 노력의 결실로 1999년 제주4.3특별법이 제정, 2003년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오늘 제주4.3 66년만에 첫 국가추념일로 지정돼 처음으로 행사를 치뤘다.

이제 뜻 깊은 국가제례 봉행을 시작으로 과거의 아픈 상흔을 위로받고, 화해와 대통합의 차원에서 평화의 섬으로 한걸음 내딛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제주 4·3 항쟁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5.10 총선거를 반대하는 시민항쟁과 그에 대한 미군정기때 군인과 경찰들(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에는 국군), 극우 반공단체들의 유혈진압을 가리키는 사건이다.

제주 4·3은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과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들의 폭력에 대한 제주도 주민들의 반발 등 여러 복합요소들로 얽힌 것부터 시작된 됐다.

이 제주 4.3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2만5천 ~ 3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이 중에는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도 포함되어 있으나 희생된 사람들 대부분은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단체와 군경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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