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차:5월 7일, 서울- '생장 피드 포르')

60세가 될 때까지 군 생활과 직장 생활을 해 오는 동안, 법적으로는 년 25일 간의 휴가가 보장 되었지만, 선뜻 휴가 가겠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시대에 살아 온 나는, 5일 이상 휴가를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20대에 우연히 세계 배낭여행에 대한 정보를 접한 이후,'여건이 되면 세계 각국을 배낭여행으로 다녀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은퇴 2년 전인 58세 때부터는 세계적인 도보 여행가인 '한비야'씨의 '세계 오지탐험'여행기를 읽으면서 배낭여행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여행 작가인 김남희씨의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여행'을 읽고는 곧 바로 배낭여행의 첫 출발지를 '산티아고 길'로 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목표가 정해지자, 180km의 제주도 일주, 5.16도로 횡단과 추자도,우도. 비양도 일주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제주 올레길이 만들어 졌다는 얘기를 듣고, 2008년 1월부터 산티아고로 떠나기 직전인 2009년 4월까지 올레 길 82회, 2.100km를 걸으며 착실하게 걷는 준비를 하였습니다.

동시에, '네이버'의 '카미노 까페'를 매일 방문해 카미노를 다녀온 사람들의 여행수기를 읽으며 제반 정보 수집을 했습니다.

2009년 5월 9일 프랑스 '생장 피드포르'에서 출발, 6월 7일 산티아고, 6월 12일 피니스테레, 6월13일 묵시아 까지 총 920km의 산티아고 카미노 길 걷기, 9일간 스페인 마드리드와 프랑스 파리를 배낭여행을 한 후, 총 49일간의 도보 및 배낭여행을 마치고 6월 24일 무사히 귀국 하였습니다.

심장병 등, 몇 가지 지병이 있고 영어도 서툴고, 나이도 63세인데다 배낭 및 유럽 여행은 처음 하는 것이라, 떠날 때는 약간의 불안함도 있었든게 사실입니다. 허나 막상 가보니 모든 게 기우였습니다.

특히 외국인들은 70-80여세의 사람들도 무척 많아서, 나도 앞으로 20-30 년은 충분히 걸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같이 걸은 사람들 중 최고령자는 85세의 독일인 남자였고, “노르웨이의 92세 노인은 매년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는 말을, 노르웨이 사람한테서 직접 듣기도 했습니다. 또한 한국을 포함 35개국의 사람들과 이메일 주소를 주고 받았으며, 자연스럽게 한국, 제주도, 제주도 올레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미리 한국과 제주도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알고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기도 했습니다. 카미노를 준비 하는 1년 동안, 걷는 연습은 물론 영어공부도 나름대로 조금 했었지만, 영어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바디 랭귀지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행의 목적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정보 수집을 포함, 항공기, 기차, 게스트 하우스 예약 등을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해결 해 해외 배낭여행의 경험을 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것을 직접 해결 하다 보니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 49일을 되돌아보면 첫째,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었고, 둘째 영어와 나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셋째 '카미노 까페‘로 부터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제주올레'길에서 연습한 게 주효해 실전에는 더욱 쉽게 느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카미노 길을 걷는 자 중 많은 사람이 영어를 제2 외국어로 사용하는 유럽사람들이기에, 그들도 아시아인과 영어로 소통하는 게 영어회화 연습하는 기회로 여기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얘기를 알아듣기 위해 경청하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서, 나는 하루 중 그들과 2시간이상을 얘기 할 수 있는 저녁시간이 가장 기다려졌고 그 시간이 제일 행복 했었습니다.

'네이버 까페'에 글을 올리신 '백두산'님의 얘기가 정말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외국인이 "영어할 줄 아느냐"고 물으면 처음에는 ‘못 합니다’.라고 하다가, ‘조금 할 줄 압니다’..‘할 줄 압니다’...‘물론이죠’...그러다가 나중에는 거꾸로, 만나는 외국인에게 ’영어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던데 꼭 맞는 말이었습니다. 다만 외국인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긴 합니다.

길을 물었을 때마다 항상 상냥한 미소와 더불어, 가던 길을 멈추고 바른 길을 안내 해주는 수많은 경험을 거의 매일 겪었으며, 그때마다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특히 내가 발등이 부어 절뚝거리며 걷자, 걸어가는 나를 붙잡고 막무가내로 신발과 양말을 벗겨내서는,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말씀 하시며 맛사지 해주신 시골의 할아버지, 버스 정류장에서 앉아 쉬고 있는 나에게, 걸음을 멈추고 가방에서 약을 꺼내 주신 독일 순례자, 길가 BAR에 앉아 있는 나에게 다가와서는 내 발을 당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정성스럽게 맛사지 해주신 오스트리아 할머니,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을 본 스페인 주민이 차를 타고 가다 멈추어서는, '잘못 왔다'며 20여분 이상을 오던 길과 반대로 태워주신 일, 등........

한 가지 꼭 하고 싶은 말은,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그 걷는 길이 더욱 즐거워지고 보람되려면, 걷기 전에 먼저 감동을 받을 자세가 되어 있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꼭 같은 길을 걷는데도 어떤 사람은 도로 상태가 안 좋다, 길 표시가 잘못 되었다, 숙소가 안 좋다, 코 고는 사람 때문에 잠 한숨 못 잤다,음식이 안 맞는다는 등 불평, 불만을 토로 합니다.
허나 저는, 까미노 길에서 바라보는 하늘, 구름, 나무, 꽃, 성당, 소, 양, 개...등과 만나는 사람, 음식, 숙소 등 모든 게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음식도 짜면 짠 대로, 맞닥뜨리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가능한 즐기도록 노력하니, 항상 기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낼수 있었습니다. 딱딱한 바케뜨 빵을 하루도 안 거르고 매일 세끼 먹었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이런 경험을 하겠느냐’하고 생각하고 먹으니 맛이 좋기만 하였습니다.

연 6일이나 비가 올 때는, 하루에도 10여 차례나 비옷을 입고 벗기를 반복하였으며 바지와 신발, 양말까지도 흠뻑 젖었지만, 전혀 귀찮거나 힘들지 않았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한참 헤매거나, 카미노를 끝내고 스페인 마드리드와 프랑스 파리를 9일 간 여행할 때도, 전철과 버스를 잘못 탄 경우가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힘들긴 해도 ‘좋은 경험을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 했기에,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고 즐거운 추억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감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일 정

1) 5,9 : St.Jean Pied De Port -Orrison...(7.5km)
2) 5,10: Orrison-Roncesvalles..................(24.8km)
3) 5,11: Roncesvalles-Larrasona...............(26.5km)
4) 5,12: Larrasona-Cizurmenor..................(20.3km)
5) 5.13: Cizurmenor-Cirauqui.................. (27.4km)
6) 5.14: Cirauqui-Villamayor................... (24.5km)
7) 5.15: Villamayor-Viana........................ (31.2km)
8) 5.16: Viana-Ventosa............................ (30km)
9) 5.17: Ventosa-Santo Domingo............ (30.8km)
10)5.18:Santo Domingo-Belorado............ (23.5km)
11)5.19: Belorado-Ages........................... (28km)
12)5.20: Ages-Burgos.............................. (25.9km)
13)5.21: Burgos-Castrojeriz.................... (40.7km)
14)5.22: Castrojeriz-Fromista.................. (25.9km)
15)5.23: Fromista-Calzadilla.................... (37.3km)
16)5.24: Calzadilla-Bercianos................... (33.3km)
17)5.25: Bercianos-Mansilla..................... (26.5km)
18)5.26: Mansilla-Leon.............................. (17.3km)
19)5.27: Leon-Orbigo................................ (37.6km)
20)5.28: Orbigo-Astroga............................ (17.8km)

21)5.29: Astroga-Acebo............................. (39.9km)
22)5.30: Acebo-Ponferrada........................ (16km)
23)5.31: 발등 부어 휴식
24)6.1 : Ponferrada-Cacabelos.................. (17.9km)
25)6.2 : Cacabelos-Pereje.......................... (13.9km)
26)6,3 : Pereje-La Faba..............................(17.5km)
27)6.4 : La Faba-Triacastella.................... (26km)
28)6.5 : Triacastella-Barbadelo.................. (22.7km)
29)6.6 : Barbadelo-Areixe............................(35.5km)
30)6.7 : Areixe-Arzua.................................. (37.6km)
31)6.8 : Arzua-Monte Do Gozo................... (38km)
32)6.9 : Monte Do Gozo-Santiago............... (4.6km)
33)6.10: Santiago-Negreira.......................... (23.8km)
34)6.11: Negreira-Olveiroa.......................... (32.3km)
35)6.12: Olveiroa-Finisterre......................... (31.1km)
36)6.13: Finisterre-Muxia.............................. (28.3km) 총계:920.9km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산티아고 가는 길)의 유래

​ -전설에 의하면 성 야고보(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큰 야고보-야고보가 둘 있었음)는 이베리아 반도 서 쪽 끝까지 선교하러 왔었고 그 후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돌아간 그는 서기 44년 헤롯왕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합니다. 성 야고보의 시체를 그의 두 제자들이 사공도, 닻도 없이 돌배에 태워 바다로 보냈는데, 그 배가 이베리아 반도 끝 갈리시아 해변에 도착합니다.

그 후 시체는 '리브레돈'이라는 산에 묻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무덤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졌습니다. 특히 5세기 서고트족과 8세기 이슬람교도들의 침입과 전란을 겪으면서 그의 무덤은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다가 9세기에 은둔자인 수도승 '페라요'가 별 빛을 따라 간 들판에서, 한 구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고 영주와 왕으로 부터 그 유골이 성 야고보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 되자, 이 기적적인 사건은 유럽전역으로 일파만파 전해졌습니다.

이 전설에 따라 이 곳 지명이 라틴어인 campus stella(별들의 들판)라고 불리다가 후에 콤포스텔라로 굳어지게 되고, 야고보의 스페인어 이름인 산티아고를 붙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새로운 성지의 지명이 되었습니다.

성 야고보의 묘가 발견 된 9세기는, 이슬람교도에 대항하는 레콘키스타 운동이 막 시작 하던 시기였으며, 강대한 적과 싸우기 위한 정신적 지주가 필요하던 때 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영토에서 발견된 산티아고의 묘는 이 정신적 지주에 딱 어울리는 조건을 지녀, 역대 아스투리아스 왕에 의해 묘는 보호되고 성지와 순례의 길이 갖추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에 일대 센세이숀을 일으키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무덤을 보기위해 몰려 들었습니다. 결국 콤포스텔라는 12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며 로마 중세때 부터 예루살렘과 로마와 나란히 그리스도교의 3대 성지 중 하나로 손 꼽혔습니다.

특히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성지순례를 한 번하면 '평생지은 죄의 반을 감면 받을 수 있고 7월 25일과 일요일이 겹치는 성스러운 해에 성지순례를 하면 평생지은 죄를 감면 받을 수 있다'는 칙령을 발표한 이 후로, 15세기까지 순례의 길은 번성하게 됩니다.

이후 점점 쇠락하다가 20세기 들어서는 극소수의 스페인 사람들만이 이 길위에 섰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산티아고를 방문한 이후, 프랑스의 국경도시 생장피드포르에서 산티아고로 향하는 메인도로를 1993년 유네스코에 의해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습니다.

또한 프랑스 각지에서 산티아고로 향하는 4개의 도로도 198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습니다.

(야고보에 대한 설명)

야고보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등에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영어식 발음이 '제임스' 혹은 '지미', 프랑스어식 발음이 '자크',독일어식 발음이 '야코프', 스페인어식 발음이 '이야고'인데 그 앞에 성자 (saint)호칭이 붙어 산티아고(santiago)가 된 것입니다.

전 세계 국가에서 산티아고란 도시가 많이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009,5,7(목)-5,8(금)맑음

ST,JEAN PIED DE PORT/(알베르게: 8 유로) 20:00-22:45(3시간 45분)....인천-홍콩(cx419) 23:45-06:30( 12시간 5분)...홍콩-파리(cx261)드골공항 07:30-08:00(30분)..............드골 공항-몽파르나스 10:20-16:20(6시간)............몽파르나스-바욘-생장 피드 포르 서울-파리 왕복 항공료(케세이 퍼시픽):1.100.000원 파리-생장 피드 포르 열차료(떼제베및 일반열차):200.000원

- 처음 타 보는 홍콩의 '캐세이 퍼시픽' 항공기 ! .....

승무원, 식사, 운항 상태 등 매우 좋았습니다. 한글자막 영화를 보다가, 자다가, 식사 두 번을 하고 예정 시간인 파리에 5월 8일6시30분에 도착 하였습니다.

배낭 속에 '몽파르나스' 가는 기차 안내 메모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서, 배낭 외부 포켓의 전자티켓을 꺼내 '몽파르나스'라고 인쇄된 것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중 2명이 친절하게도 버스 정류소에 안내해 주었습니다. 16.5유로를 내고 버스에 승차하였습니다.

유럽에 성공적으로 첫 발을 내 딛었다고 안도하며 긴장을 풀었습니다. 10여분 쯤 지나자 그때서야 갑자기 잊었던 기억을 되살립니다. 공항에서 ‘몽파르나스’(MONPARNASS)까지는 기차를 타고 가야하며, 기차 값은 이미 한국에서 지불 된 상태라는 것을...

‘몽파르나스’에서 ‘바욘’(BAYONNE)까지 가는 '떼제베' 고속열차의 출발 시간은 10시 20분이라 시간은 충분 하지만, 프랑스에 도착 하자 마자 16.5 유로를 쓸데없이 낭비한 게 너무 억울하였습니다.

'몽파르나스'에 도착하여 역사(驛舍)를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매표소에 가서 출력해 간 영수증을 보여주며 표로 바꾸려고 카드를 제시하였습니다.

"결재한 카드와 틀리다" 면서 "다시 결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카드가 왜 재발급 되었는지를, 짧은 영어로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입니다.

한국에서 결재한 카드의 영문 이름이 여권의 이름과 스펠링이 다르기에, 재 발급 받고 왔는데 결국 그게 문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결재한 것은 취소시킬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습니다.

핸드폰을 안 가지고 갔기 때문에, 카드사에 전화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시간을 보니 아직도 세 시간이나 남았습니다.

역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 쉬기도 하면서 보니, 사람들이 우체통 같은 노란 '체크기'에 가서 표를 체크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위 사람에게 물으니 표를 본인이 체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체크 하였습니다.

10시 10분, 전광판에 '이룬'(IRUN)가는 열차의 플랫폼 번호가 나왔습니다. 9번이라 표시되어 있기에, 9 번이라 쓰여 진 팻말 앞에서 승차 하려는 승객에게 표를 보여주며 문의하니, 프랑스어로 말을 하므로 알아듣지는 못하겠으나 더 가라고 손짓합니다.

한 참 더 가다가, 복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젊은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의 열차표를 가리키며, 내가 탑승 할 열차는 16번 열차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서야 표를 보니 16번 열차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16번 열차 타기직전에 또 다시, 탑승하는 신사에게 표를 보여주며 물어보자 다행히도 영어로 "이 객차가 맞다" 고 하였습니다.

짐을 선반 위에 올려 놓고 그의 옆 좌석에 앉았습니다. 그가 나 보고 다시 표를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표는 입석이다. 조금 기다려 보고 자리가 비면 앉아도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복도에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서야 다시 한 번 표를 찬찬히 살펴 보았습니다. 국내에서 출력한 전자 티켓에는 좌석이 분명히 있었는데, 아까 재 발급하면서 역무원이 고의인지, 실수인지 입석표를 발급한 것이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객석이 다 차서,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 젊은이가 기둥을 한 손으로 붙잡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기댈 대 라곤 창 쪽으로 나온 가느다란 문기둥이 유일합니다. 조그만 의자에 앉아 창 기둥을 붙잡고 밖을 보니,

출입구의 창문이 조그만 하여 시야도 매우 좁습니다. 이곳에 앉아 4 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심 하기도하고, 불안 하기도 하였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전혀 어렵지도 않은 일에 미스에 미스를 거듭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2시가 되자 객실에 있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빵과 치즈, 과일, 음료수 등을 꺼내 먹기 시작했습니다. 먹는 장면을 보니 갑자기 배가 고픕니다.

아까 역에서 빵과 음료수라도 사 올 껄 하는, 때 늦은 후회를 하였습니다. 한 가지가 꼬이니 연속해서 일이 꼬입니다.

‘그래 오늘은 실컷 꼬여라, 이것도 나중엔 다 좋은 추억이 될 터이니..' ’내일부터는 정신 바짝 차리고 오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생장’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한 후, 오후 5시경 독일인 '노베르뜨'(NOBERT)와 식당에 갔습니다. 7시나 되어야 문을 연다고 하여, 시내를 구경하다가 7시에 점심 겸 저녁으로 우리나라의 볶음 밥 비슷한 '빠에야'(PALLEA)를 주문했습니다.

나는 약간 짜서 맛이 별로인것 같은데, 노베르뜨는 맛이 좋다고 합니다. ‘노베르뜨’는 나 보다는 영어를 잘 하지만 그도 아주 능숙하지 않기에, 만만해서 더욱 좋은 것 같습니다.

출국직전 인천공항에서
전(全) 여행기간 난생 처음으로 수염을 길러서, 수염이 났을 때와 안 났을 때를 비교해 보기 위해 출국 하는 날 ,면도를 한 모습입니다.
몽파르나스의 노숙자
대 낮에 대로에서 자고있는 노숙자를 보니, 이 곳이 과연 세계에서 부국이라고 일컫는 프랑스 땅이 맞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열차 출발시 까지 충분한 여유가 있었읍니다만, 파리에 도착하자 마자 발생한 몇가지 사건으로 인해 긴장한 탓에, 점심 준비를 하지 못해 저녁 8시까지 아무것도 못 먹고 쫄쫄 굶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열차표를 펀칭해 봅니다. 예약된 좌석이라고 하여 좌석을 뺏기고는 통로에 나오니 현역군인인 이 친구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 자세로 4시간 를 가야 한다니 처량한 기분이 듭니다. 갑자기 문이 열리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마음 편하게 쉴 수도 없었습니다

노베르또는 맛있다고 하는데, 전 음식이 너무 짜서 별로입니다

1일차) 2009,5,9(토)맑음

...ST.JEAN PIED DE PORT-ORRISON(7.5km-2시간 13분)
(알베르게:30 유로)

'생장'이라는 도시는 매우 작은 마을이지만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생장'은 전 세계 순례자들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 관문이며 또한 피레네 산맥을 통해 론세스 바예스 (RONCESVALLES)로 가는 통과 구간이기도 합니다.
이곳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자 증명서(크리덴시알:CREDENCIAL)와 마을에 대한 지도,가이드 맵등을 얻을 수 있습니다.

06시 30분 기상, ‘알베르게’식당에서 '바게뜨'(딱딱한 빵)에 '까페 꼰 레체'(밀크 커피)를 먹고 07시 07분에 생장을 출발하였습니다.

날씨는 청명 하였고 새벽이라 곳곳에 안개가 자욱하였습니다. '오리손' 산장에 도착하기 직전, 앞서가는 사람이 있어 뒤에서 보았는데,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고 있었습니다.

'올라‘ (OLA:안녕이라는 스페인 인사)! 하고 인사하며 옆에서 보니, 과연 추측대로 나이가 아주 많아보이는 남자 분이셨습니다.

국적과 나이를 물어보고 싶었으나 말을 붙이면 더 힘드실까봐 그냥 지나쳐서는, 멀리서 풍경을 찍는 것처럼 하며 그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 나이에 ‘카미노’ 길을 걷는 게 대단해 보이기도 했지,만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 떼들과 야생화, 그리고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예쁜, 산 밑의 집들을 보며 즐거운 마음으로 피레네 산맥을 2 시간가량 넘어 9시 20분경 ‘오리손’에 도착 하였습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제주 올레 길에서 충분한 연습을 한 탓인지, 날아갈 듯 몸이 가쁜 합니다. 거기다가 동행하는 ‘노베르뜨’도 나와 보속이 비슷하여 너무도 좋았습니다.

숙소는 12시 되어야 연다고 하여, 밖에서 맥주 한 잔 씩을 하였습니다. 12시에 방 배정을 받아 침낭을 펴고 샤 워와 빨래를 한 후 야외 벤치에 앉아 ‘바게뜨’ 빵과 ‘까페 꼰 레체(밀크 커피)’로 점심을 대신 하였습니다.

오후 1시경이 되자 ‘오리손’에 묵는 여자 순례자 2 명이 숙소 뒷 산으로 올라가는 게 보였습니다. "우리도 한 번 둘러보자"고 ‘노베르뜨’에게 제안하니, “지나가는 순례자와 주변 경치를 보는 게 너무 즐겁다”며 “ 안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냥 주저앉아, ‘내가 이곳에 단순히 걷거나 구경하러 온 게 아니지않은가?

60 평생을 바쁘게만 살아오다가 처음으로 맞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 만의 시간인데, 제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하루를 음미하며 보내자’ 하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10시간을, 한 의자에 앉아 지내 봤는데 역시 색다른 묘미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지겹지 않을까’ 하고 생각 했는데 막상 마음을 달리 먹고 앉으니, 너무도 좋았습니다. 만일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하루종일 앉아 있으라면 너무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세상사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다‘ 라는 말이 실감 나는 하루였습니다. 오후 2시 쯤, 한국인 여자 2명이 도착했으나 숙소를 미리 예약 안 한 탓에 25 유로를 주고서도, 숙소 뒷 편에 있는 텐트에서 자기도 하였습니다.

난 미리 예약을 했기에 천만다행으로 침대에서 잘수 있었습니다.

우리 테이블엔 독일인 남자 2명, 아일랜드 여자 2명,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서 환담을 하며 즐거운 저녁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일랜드인 ‘로르나’(LORNA)는 2주간의 휴가를 얻고 온 직장인인데, 성격이 매우 쾌활하고 사교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와는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에서도 저녁 식사 후 만나,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알베르게의 문 위에 걸어놓은 신발이 눈길을 끕니다.
( 안개 낀 새벽길을 걸어가는 순례자들 모습입니다)

-나를 제외하고는 외국인들 모두 스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장'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27 km 지점인 '론세스 바예스'까 지 가는 이 길이'까미 노 프란세스' 전 구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데, 정말 경치가 너무 예뻐서 숨이 막 힐 지경입니다. 공기가 맑고 풍경이 너무 예뻐, 기분도 짱이고 걸음도 한결 가볍습니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과 염소들이 퍽 평화로워 보입니다

(해발 650M의 '오리손' 산장에서~)

오른 쪽 건물 1층은 식당겸 '바르'(BAR:바)이고, 2층은 순례자 숙소, 오른 쪽의 텐트는 숙소가 모자랐을 때 이용하는 야외 숙소이며, 왼 쪽의 지하는 순례자 숙소, 위에는 야외 벤치가 놓여 있습니다.

지나가는 양 떼를 찍기 위해 모두 바쁩니다
아일랜드인내년에 남은 여정을 마치겠다고 하였습니다.

​2일차) 2009,5,10(일)피레네 정상 돌풍과 비

....ORRISON-RONCESVALLES(17.3km-4시간)
(알베르게: 6 유로)

-아침을 먹고 동행하기로 했던 ‘노베르뜨’는 비가 갠 다음 걷겠다고 해서, 8시 10분에 비를 맞으며 혼자 출발 하였습니다.

앞서가는 사람들 15명 정도를 계속 앞지르기 하는 바람에 출발 후 1시간 30분부터는 오늘 종점인 ‘론세스바예스’갈 때까지 계속 나 혼자 걸었습니다.

두 시간 반가량 계속 오르막이었는데도 ‘콘디션’이 무척 좋아서 평지 걷는 속도로 계속 걸었습니다. 이 처럼 높은 오르막길을 평지처럼 걸을 수 있었든 이유는, 평소에 25km의 거리를 10kg의 배낭을 메고 평균 3일에 한 번씩, 근 1 년 동안 제주올레 길을 걷다가 평소 때 보다 2.5kg이나 가벼운 7.5kg배낭을 메고 걷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정한 배낭무게는 자기자신 체중의 10분의 1이라고 한 이야기를 '카미노'카페에서 보았기에 그 규칙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전 ‘카미노’ 기간 동안 나처럼 가벼운 배낭을 맨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피레네 산맥의 경사도 대한민국의 산처럼 가파르지 않아 어렵지 않았습니다.

‘카미노’ 사이트에서 너무 많은 정보를 머리에 입력해 놓았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결국 길을 잘못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브라질 사람 무덤의 다음 길에서 무조건 우회전 하라’는 강력한 추천을 너무 신봉한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 상을 보고(마리아 조각은 길에서 20여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그곳까지 가서 확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 상 옆에 브라질 사람 무덤이 있겠거니’ 하고 멋대로 추측 하고는, 조금 걸어가니 두 갈래 아스팔트길이 나타났습니다.

직진하는 길엔 산티아고에서 오는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길이 맞을 것도 같은데, 머릿속에는 우회전 하라는 메시지가 떠오릅니다.

가이드북을 보고 확인키 위해 30여m 떨어진 바위 옆에 비바람을 피해 가방을 열고 확인 했는데, 워낙 비바람이 세어, 대충 오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 가기 전 마을 이름만을 확인 하였습니다.

다시 이정표에 되돌아가서 보니, 그런 지명은 표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뒤에서 오는 사람을 한참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직진키로 마음을 먹고 5m쯤 걸어갔습니다. 웬걸, 길가에 확연한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찬 비바람 속에 10여분 정도를 그렇게 허비하고 나니, 많은 정보를 얻고 온 게 오히려 원망스러웠습니다.

정보에 의한 선입감이 없었다면 결코 실수할 수 없는 길이었기에 더욱....

그 후 종점까지 혼자서 쉽게 이정표를 찾으며 잘 걸어 왔는데, 도착해서 시간을 재보니 12시 10분, 4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도착해서 조금 있으니 비가 개어, 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예약하고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만원이라고 주문을 받지 않았습니다.

가이드북을 보고 수도원 건물을 찾아가니 모든 문이 잠겨있었습니다.

배낭 멘 사람에게 스페인어로 사무실 위치를 확인하고 거기서 숙소를 예약 하였습니다. 숙소는 2시에 연다고 하였습니다. 조금 있으니 ‘노베르뜨’가 도착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맥주와 점심(5.8유로)을 먹고 숙소에 가서 침대를 배정받은 후, 목욕과 빨래를 하였습니다. PC가 있는 벽면에는 ‘인터넷은 고장’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혀있었습니다. 저녁 6시에 ‘노베르뜨’와, 2년 째 세계 여행을 하고 있다는 독일청년 ‘필립’(PHILLIP)과 미사 참석을 하였는데, 갑자기 ‘필립’이 눈을 허옇게 뜨고 의자 위로 넘어 지더니 발작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물을 먹이고, 맛사지 하고...4-5 명이 달려들어 한참동안 가료를 하였습니다.

2분 후 쯤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제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허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니 아찔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녁 후 야외 테이블에서 ‘노베르뜨’, ‘로르나’, ‘필립’과 함께 9시 30분까지 있었는데,내가 ‘로르나’를, ‘로리나’(LORINA)로 계속 불러서 놀림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로리나‘(LORINA)란 ’20년 이상 나이를 더 먹은 노인을 좋아하는 아주 젊은 여인‘을 말 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빨강과 초록의 조화
우의를 입고 피레네 산맥의 정상을 향하여 묵묵히 걸어가는 부부 순례자
하얗고 빨간색의 카미노 표식
아스팔트 끝 부분에서 우측으로 가서 정상 오른 쪽으로 갑니다.

유럽은 대부분이 평지로 되어있어서, 유럽인들은 조금만 오르막이 되도 무척 힘들어 하는데 반해, 등산을 자주하는 한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오르막이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등산을 자주 한 사람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이지만...

노베르뜨,레이첼과 론세스바예스 식당 야외 벤치에서
귀국 후 레이첼에게서 받은 이메일에 의하면, 그녀는 발목 부상으로 Leon에서 스코틀랜드로 가서 병원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10년 이내에 반드시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마치겠다는 말과 함께...노베르뜨는 생장에서 만난 후 론세스바예스에서 헤어졌다가, 41일만인 6월18일 파리가는 공항에서 다시 만나는 인연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불필요한 물건을 이 곳에 놓아두면, 필요한 사람이 누구나 가져가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배낭무게 때문에 가져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론세스 바예스는 순례 첫 날부터 피레네 산맥을 오르는 것이 부담스러운 순례자들이 시작점으로 많이 선호하는 곳입니다. 생장 피드포르에서 시작한 순례자들과 버스를 타고 도착한 순례자들로 꽤 붐비기 때문에, 늦게 도착하면 순례자 숙소(2층 침대로 110개의 침대가 있다)가 만원이 되어 다른 숙소를 알아봐야 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특이한 모습의 교회 건물입니다.

2년 째 배낭여행중인 24세의 독일 청년 Philipp군과
필립군처럼 젊은이들이 몇 년째 배낭 여행을 하는것을 볼 때마다,그들이 대견스럽고 부러웠습니다. 

3일 차) 2009,5,11(월)맑음

.RONCESVALLES-LARRASOANA(26.5km-6시간)
(알베르게:6유로)

-7시 노베르뜨와 출발, 7 시 20분경 ‘부르게떼 아우리쯔’(BURGETE AURITZ)

‘바르’(BAR)에서 아침(바게뜨,까페꼰레체=2.2유로)을 먹고 막 출발 하려는데 ‘레이첼’이 도착 하였습니다.

‘노베르뜨’가 “레이첼‘과 천천히 갈 테니 먼저 가라” 고 하였습니다.

“저녁에 ’수비리‘(ZUBIRI)서 만나자”며...나랑 같이 보조 맞추려니 무척 힘든 모양이었습니다.

12시에 목적지인 ‘수비리’에 도착하여 슈퍼에서 사과 2개, 요구르트 4개, 부드러운 빵을 6 유로에 구입하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4시에 문 연다고 적혀있었습니다.

계단에 앉아 조금 전 구입 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알베르게’ 문이 열릴 때 까지 앞으로 3시간 3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너무 지루할 것같았습니다. 힘은 남아돌고...

​다시 출발하여 오후 2시 20분경 ‘라라소냐’에 도착했습니다.

삼일 째 변을 못 봐서 요구르트 4개와 과일 1개를 먹었으나 그래도 감감 무소식입니다.

​타지(他地)만 나오면 긴장한 탓인지 항상 이처럼 변비로 고생을 합니다.

언제쯤 변이 나올 런지...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는 발 상태가 괜찮다는 점입니다.

 

제주에서는 서너 시간 걸으면 오른쪽 발목이 참을 수 없이 아프곤 했었는데... 서너 번 화장실에 가서 용 쓰다가 결국 저녁 늦게 변 한 방울을... 변 한 방울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바르’에 저녁 먹으러 갔는데, 다들 끼리끼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혼자 시켜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알베르게’로 쓸쓸히 돌아와서 배낭에 있던 빵으로 저녁을 때우고 8시부터 침대에 골인 하였습니다. 침대에는 나 혼자 밖에 없습니다.

‘노베르트’가 그립고 외롭습니다.

내일 부턴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사귀어 오늘처럼 혼자 식사하는 비극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이 곳에서 아침을 먹었습니다. 스트레칭을 하는 순례자의 모습도 보입니다.​
수비리( Zubiri) 다리
수비리라는 마을 이름은 바스크어의 뜻으로는 다리로 이어진 마을'이라 하고 이 다리의 애칭은 '천국으로 가는 다리'라고 합니다.

4일차) 2009,5,12(화)맑음

LARRASOANA-CIZUR MENOR(20.3km-6시간 50분)
(알베르게:5유로/만찬:10유로)

06시 30분 혼자서 출발하였습니다.

근 3시간 동안 계속 숲 길 이더니 ‘아레’(ARRE) 마을서 부터는 아스팔트길입니다. 다리 벽면에 산티아고 까지 배낭을 운반해 주는 택시 안내문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이 곳부터 배낭이 무거워 배낭을 차로 부치고, 맨몸으로 걷는 사람이 있는가 봅니다.

'팜플로나' 끝나는 지점에서 땅 바닥에 ‘까미노’ 길 표시가 이중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앞에 있는 안내판을 보니 ‘공사 중이라 돌아가라’는 뜻인 것 같아 보였지만, 확실한 뜻을 모르기에 그대로 직진하였습니다. 이때 70대로 보이는 노인이 “산티아고 ?“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를 따라 오라고 손 짓 하였습니다. 약 5분쯤 같이 가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후 우회전 하라’고 다시 손으로 가리키 길래 ”고맙다“하고 횡단보도를 건너서 쳐다보니, 그때까지 그 자리에 그냥 서 계셨습니다. 손을 흔들어 감사 표시를 하였습니다.

말로만 듣던 스페인 사람들의 친절함을 실감하는 첫 계기였습니다. 중간에 31세 난 스위스 청년과 30여 분간 동행 하였습니다.

그는 ”2일 전에 한국인을 만났는데, 한국인들끼리만 다니는 것 같더라.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카미노’ 길은 혼자 다니는 게 사색하기에도 좋고 걷는 도중 외국인들과도 친교를 맺을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 한다” 고 하였습니다.

​“나도 100% 동감 한다”고 대답 하였습니다.

‘팜플로나’(PAMPLONA) 중심지에 오니 역시 대 도시 답습니다.

변이 급하게 마렵지 않았지만 스페인의 공중변소는 어떤지, 그동안 익혀온 내 스페인어 실력으로 찾아 갈 수 있을 지 경험도 할 겸, 행인에게 공중변소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말을 다 알아듣지를 못한 채, 손으로 대충 가리키는 곳으로 갔습니다. 대형 마켓 지하에 있는 화장실이었는데, 10여 분 간 끈기 있게 있었더니 다행히도...

1시 20분 경 '시스르 메노르'에 도착 하였습니다.
도착 즉시 ‘알베르게’로 직행 하였습니다. 빨리 도착한 덕택에 아래층 침대를 배당 받았습니다.

윗 침대는 31세 독일인 '토마스'(THOMAS), 앞 침대는 미국인, 옆 아래는 이스라엘인 '라즈레비'(RAZLEVY), 그 위는 폴란드인이었습니다.

미국 청년은 전날 4시간 밖에 못 잤다면서 오후 1시 30분부터 다음 날 6시까지 계속 잠만 잤습니다. 4시간을 잤으면 충분히 잔 것인데...?

폴란드인은 와인을 잔뜩 마신 채, 와인을 들고 다니며 아무에게나 한잔 하자며 횡설수설하였습니다....나중에 들어보니 와이프가 낙태하여 괴로워 마신다고 하였습니다.

허나 제 눈에는 주정뱅이처럼 보였습니다. 술병을 들고 방에 들락날락 하더니 아침 출발 시 까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미안해서인지 딴 '알베르게'에서 잤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 집 앞에 놓인, 순례자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모습의 조각품
길을 잘 못 들은 내게, 올바른 길로 안내해 준 스페인 할아버지
스패니쉬 Sole 아줌마와 시스르 메노르 식당에서 알베르게에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식당의 냉장고에는 먹을 게 많고 슈퍼에서 음식 재료를 사다가 직접 해먹을 수도 있었으나, 이 때만 해도 영어에 자신이 없어서 일반 레스토랑으로 갔습니다.

한 테이블에 두명 씩 앉아 있었습니다. 두명 앉은 자리엔 와인을 한 병 주는데 나는 혼자라고 한 잔만 주었습니다.

마침 옆 테이블에, 론세스바예스에서 함께 식사한 스페인 여자가 있었습니다. 양해를 구하고 합석 하였습니다.

스페인어 배운 실력을 써 먹기 위해 직접 주문했습니다.
엘 살라다(EL SALADA=사라다), 쎄르도(CERDO=돼지고기),엘라도(ELADO=아이스 크림)를... 스페인 여자가 놀랍니다. '스페인어를 언제 배웠냐'고? ...

'팜플로나'시 중심지에서
배우긴? 그냥 단어 몇 개 외워온 것 뿐인데...

5일 차) 2009,5,13(수)맑음
...CIZUR MENOR-CIRAUQUI (27.4km-6시간 50분) (알베르게:9유로)

6시10분, 랜턴을 모자 위에 끼우고 출발 했으나 랜턴이 없어도 카미노 표식 찾는데 불편이 없었습니다. 출발 1시간 후 쯤 ‘뻬르돈’(PERDON) 고개 올라가는 언덕 중턱에 서 쉬고있는 이스라엘인 '라즈레비'를 만났습니다.

내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 후 그의 사진도 찍어 주겠다고 하였더니, “‘카메라를 안 가지고 왔다’ 고 하였습니다.

​“내 카메라로 사진 찍은 후 나중에 이메일로 보내 주마”고 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독일인 '토마스'와 함께 6일 간을 같이 걷는 인연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오후 1시 ‘시라우키 ’에 도착 하였습니다.

 ‘E-A’는 상속받은 공장을 남동생과 같이 경영하는 독일여성으로, 계속 담배와 큰 병의 우유, 오렌지, 과자, 빵 등을 먹으면서 토마스에게 쉴 새 없이 말을 하였습니다.

토마스는 싫은 기색 없이 “예, 예” 하면서 수긍하였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응대 하느라 혼이 났다고 하였습니다.

만찬은 지하(돌로 된 벽)식당에서 하는데 우리 좌석은 독일여자 ‘E-A’가 늦게 도착하였는데, ‘오스삐딸레로’(HOSPITALERO=봉사자)가 우리에게 "저 여자와 합석해도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싫다고 하여서 그녀는 딴 좌석으로 갔습니다. 왕 따 당한 그녀가 불쌍해 보입니다.

​핀란드 여성 2명과 식사를 했는데 메뉴는, 수프. 미트볼, 누들이 나왔는데 맛이 좋았습니다.

-6시 30분경의 풍경으로 저 멀리 보이는게 뻬르돈 고개 정상입니다. ​

( 순례자의 무덤 )

순례자들은 길을 가다가 이런 무덤을 만나게 되면 돌이나 야생화를 올려 놓으며 고인에 대한 추모를 합니다.

드넓은 평야와 나즈막한 산이 나를 부릅니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11세기에 지어졌습니다.

이 다리가 세워지기 전에는 순례자들이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휩쓸려 떠내려가 버리곤 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왕비가 다리를 세우게 해서 지금 이 작은 도시가 '왕비의 다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6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이 다리는 로만식 건축의 전형적인 아름다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르막을 힘들게 올라가는 사람이 있어 추월 하면서 쳐다보니 70세 이상 되어 보이는 할머니였습니다. 국적과 나이를 물어보니 74세로 미혼이신 독일 할머니셨습니다.

무척이나 상냥하신 분이셨습니다.

힘이 들 터인데도 선 채로 즐거운 대화를 하고 사진을 서로 찍었습니다.

다음 날 만찬에서도 같은 테이블에 앉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6월 14일 산티아고에서 다시 한번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얼마나 반갑게 대해 주셨던지....

귀국하여 사진을 다시 보니 50여년 전에 돌아가신 친 할머니와 모습이 너무 흡사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6일차) 2009,5,14(목)비가 오다 말다를 계속

...CIRAUQUI-VILLAMAYOR DE MONJARDIN(24.5KM-5시간 45분)
(알베르게:5유로/만찬:10유로)

('라즈레비와 '토마스'가 비를 맞으며 새벽길을 나서고 있습니다)

-'토마스'와 나는 헤드렌턴으로 불을 밝히며 걸어갔습니다.
 

집집마다 꽃으로 온통 도배되어 있습니다
꽃, 밀 밭, 조각, 와인, 친절이 스페인을 대표하는 상징처럼 느껴졌습니다.

(도로에 핀 개 양귀비
-베레모를 쓰고 힘차게 걷는 부인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에스테야의 santo sepulcro 성당앞을 지나가는 토마스와 라즈)

12세기에 세워졌다는 이 성당은, 고딕식 문에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모습과

십자가에서의 모습의 조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한적한 마을을 힘겹게 걸어가는 순례자의 모습)

-시골마을에서는 이 처럼 마을 주민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특히 하루 중 햇빛이 가장 강력한 1시부터 3시 까지는, '시에스타'(스페인어로 낮 잠이라는 뜻)라고 하여 바르를 제외하고는 모두 문을 닫습니다.

중세에는 교회나 수도원이 이 시간에 기도를 했으며, 서민은 정오 전에 점심을 마치고 이 시간에는 쉬었는데, 이게 '시에스타'의 유래라고 합니다.

앞서 가는 순례자(브라질 여성)가 다리를 절며 걷고 있었습니다. ‘언제쯤 알베르게에 도착 하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가이드 북을 보면서, ‘30분만 더 가면 알베르게‘가 있다’ 하니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배낭이 15kg은 족히 더 되어 보였습니다. 이처럼 무거운 배낭을 메었으니 힘 들 수밖에...

‘라즈레비’와 ‘토마스’는 쉬고 가겠다면서 땅 바닥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나 역시 앉고 싶었지만, 쉴만한 장소가 없어서 엉거주춤 서서 휴식을 취하였습니다.이게 바로 동서양의 문화 차이인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서양 사람들은 예외 없이 아무데나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65세 뉴질랜드인 ‘샌디’는 4월 30일부터 (나 보다 8일 전) ‘생장’에서 ‘카미노’를 시작 했다고 하였습니다.하루 10km씩, 석 달 계획으로....걷는 모습을 보니 몸도 성한 것 같지 않은데, 저 몸으로 석 달 동안을 걷겠다는 그녀의 용기와 느긋함이 부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

동네구경을 하다 보니 ‘바르‘ 앞의 테이블에 ‘라라소냐 ’공원에서 보았던 부부가 앉아 있었습니다.

아는 체를 하니 옆에 앉으라며 와인 한잔 하자고 하였습니다.

“좋다” 하고는 내가 3유로를 미리 냈더니 조금 후 그가 한 잔을 다시 샀습니다.

49세 동갑내기의 네델란드 부부로, 아이는 일부러 낳지 않은 채 여행만 하며 산다고 하였습니다.

네델란드에선 아이를 갖는 것은 선택의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애를 낳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내게 “네델란드에서 3대 유명한 게 뭔지 아느냐 ?” 고 물었습니다.

‘풍차와 튤립은 아는데, 다른 한 가지는 모르겠다’ 니 “나무신발” 이라고 하면서 나무신발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 주었습니다. ‘오스비딸레로’는 남자 한명과 여자 두 명인데 매우 친절하였습니다.

식사 직전 남자가 영어와 스페인어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내가 “카톨릭 신자냐”고 물으니 “개신교 신자이다. 그러나 종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믿는 신이 유일하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식탁에 앉을 시 네델란드 부부는 나와 같이 앉기를 원했으나 ‘오스피딸레로’의 권유로 나눠 앉았습니다. 우리 테이블엔 ‘헤드윅’,베로니카’, 나, 이탈리아인 3명이 앉았는데, 이탈리아인들은 전혀 영어를 못해, 셋이서만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네델란드 부부인 ‘헨크’와 ‘안자’는 그 후에도 여러 번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제 만난 Hedwig 할머니와 만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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