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지 <몹쓸짓>을 우편으로 받고 그 제목을 보는 순간 일본에서 일어났던 <아쿠마쨩 명명소동>이 떠올랐다.

<아쿠마쨩 명명소동:惡魔 命名騷動>의 쨩은 어린이의 이름 다음에 붙이는 애칭인데, 이 소동은 1993년 8월 찜통 같은 무더위 속에 허우적거리는 일본열도를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1993년 8월 11일 토쿄도 아키시마<昭島>시청에 아쿠마:惡魔라고 이름을 지운 남자 아기의 출생신고가 있었다. 악惡자와 마魔자는 상용한자 범위이기 때문에 접수되었다.

아키시마시에서는 법무성 민사국에 이 출생신고의 수리에 관한 가부를 조회했다. 그 결과 아기의 복지<福祉>를 해칠 가능성이 있으므로 친권<親權>의 남용을 이유로 들고 수리하지 않았다.

신고자 부친은 토쿄가정재판소 하치오지지부에 불복의 소송을 걸었는데 명명권의 난용<亂用>으로 호적법위반이기는 하지만 신청 과정에 위법행위가 없기 때문에 수리하라는 승소 판결을 내렸다.

시에서는 이 판결에 불복하고 즉시 항고했다. 그후 아기 부모는 아기가 "아쿠마"라는 자기 이름을 인식하고 반응한다는 이유로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를 다시 신청했지만 시에서는 수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청자는 아쿠마와 비슷한 발음의 이름으로 신청해서 수리되었고 , 양친은 불복 신청한 것을 취하했다. 시에서도 이에 동의하여 합의를 보고 "즉시 항고"는 미결인 채 재판소동은 막을 내렸다.

<몹쓸짓>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외설적 행위를 이르켰을 때 순수한 우리말로 사용하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이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여 와이세쓰<わいせつ:猥褻외설> 행위라고 한다. 다만 한자대신 히라가나를 사용한다.

<아쿠마>라는 단어는 "귀여운 악마" 등 쓰기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의미도 제공하지만 사람 이름에서는 혐오 단어의 하나이기 때문에 일본 법정에까지 비화되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몹쓸 짓>도 혐오 단어 중의 하나이다. <못된 짓>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첫머리가 너무 길어졌지만 그러한 선입감 속에 시집을 펼쳤다.

<몹쓸짓>에 게재된 첫 작품이 김영란의 바로 <몹쓸짓>이었다. 그 전문이다.

몹쓸짓

나는 오늘 당신을
생각하지 않고
하루를 다 보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시이다. 한시도 잊지 않았다면 거짖말이 되겠지만 한날도 잊지 않았다면 사정이 다르다. 그런데 하루를 다 잊었기 때문에 죄송하고 그것이 <못쓸짓>이란다.

그래서 이 시의 제목이 작품집 첫번째 작품이고 하니 시집 제목에까지 비약한 것 같다. 외설적 의미만이 아니고 이러할 적에도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은 강태훈의 시 <제주는 목이 타고 있다>이다.

제주는 목이 타고 있다

한 줄기 소나기가 너무나
간절한 무더위 속 섬 제주

한라산 지나 북상한 장마가
육지에만 물벼락을 내리고 물러갔다

제주는 목이 타고 있다
비는 없고 폭염과 열대아뿐이다

삼십 몇 도 이 불볕 더위 속에
산천초목이 목말라 신음하고
밭작물이 중병을 앓고 있다

애타는 목마름으로
피가 마른다며
하늘을 원망하는 눈동자들

쩍쩍 콩밭 당근밭 갈라지는 소리
바짝바짝 말라가는 심은 자의 마음
타들어 가는 농심 무엇에 비길 것인가

강태훈의 다른 시도 언제나 견고하다. 이 시집에 게재된 <멀구슬나무에게 그리움을 묻다> <5월>등도 그렇다. 안심해서 읽을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간다. <제주는 목이 타고 있다>도 견고하고 안심이 된다. 사실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모험이 없어서 드라마틱한 부분의 결여를 가져올 걱정도 있다.

김영순의 <구인광고>이다.

구인광고

부르면 황급히 갈 그자리에 있습니다
안 불러도 화급히 갈 그 자리에 있습니다
밖으로 나온 메뉴판
잡아채듯
"손님 급구"

시어의 반짝임보다 전개하는 시의 이외성에 화들짝 놀라게 한다. 김영순의 다른 작품 <초파일 근처>도 그렇게 읽히운다.

다음은 문순자의 <어떤 병작>

어떤 병작

한철 농사 반타작
멀구슬나무 멀거니 본다
앙상한 가지마다 떼거리로 달린 까치
깡통도 허수아비도
반사테이프도 소용없다

처음부터 까치와 병작할 걸 그랬는가
내 이마 쪼아대듯 아작낸 양배추밭
낮술에 얼근한 농심
톱날을 만져본다

모든 밭의 상처는 갈아엎어야 끝나는 거
묵정밭 언저리에
그리움의 씨앗은 남아
병작도 못 해본 노을 저 혼자 타고 있다

이 시도 강태훈의 <제주는 목이 타고 있다>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다만 강태훈의 시가 자연재해라면 <어떤 병작>은 까치에 의한 피해이다.
제주에 들어온 까치의 논공행상은 별도로 두더라도 수확을 막 앞에 두고 입은 막대한 피해 상황을 현실 묘사로 국한 시키지 않고 <그리움의 씨앗은 남아/ 병작도 못 해본 노을 저 혼자 타고 있다>라는 시심의 여운은 노을처럼 아련하다.

다음은 오승철의 <한가을>이다.

한가을

한여름과 한겨울 사이 한가을이 있다면
만 섬 햇살 갑마장길
바로 오늘쯤이리
잘 익은 따라비오름 물봉선 터뜨리는

고추잠자리 잔광마저 맑게 씻긴 그런 날
벌초며 추석명절 갓 넘긴 봉분 몇 채
무덤 속 갖고 가자던
그 말조차 흘리겠네

길 따라
말갈길 따라
청보라 섬잔대 따라
아직도 방생 못한 이 땅의 그리움 하나
섬억새 물결 없어도 숨비소리 터지겠네

<한여름과 한겨울 사이 한가을이 있다면>이라고 시인은 기정 사실을 모른 척하고 일부러 가정으로 제시하여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면서 한가을의 묘사만이 아니라 그 여운으로 그리운 삶을 노래하고 있다. 언제나 느끼고 있는 시인의 독특한 묘사법으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제주 사는 사람은 잘 알런지 모르지만 이럴 때에 <갑마장>이라는 단어 설명도 작품 밑에 설명하는 것도 독자에 대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순의 <갑마장.1.2.3>의 세편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끝으로 최원정의 <견고한 대답>이다.

견고한 대답

입을 벌리지 않아도
오므리지 않아도 되는,
그냥 자연스레
내 뱉을 수 있는
저 긍정의 힘

긴 설명 필요 없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견고한 결속의 한 음절

높지도 낫지도 않은
보통의 음계로 감싸 안는
무한의 생명력을 내포한
겸허한 수긍
사랑해?
응-

<응>이라는 짧은 한 마디에 이러한 오묘함이 있다는 것을 읽는 독자들은 놀랄 것이다. 필자도 그러한 독자의 한 사람이다.

여기에 또 다른 <응>의 작품을 소개한다. 2013년 9월 23일 제주투데이에 게재했던 기사이다.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70538

정드리문학회 동인지 제5집에서 시 6편을 전문 소개했다. 동인 16명의 작품 74편이 게재되었는데 고<故> 허은호 시인의 5편도 포함되었었다. 동인들의 그 애정에 가슴 뭉클했다.

이 외에도 특집 정드리 창에 비친 좋은 시. 시조 20명의 20편과 지역동인 <구좌문학회> <다층> <애월문학회> <한라산문학회>의 시 8편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시들의 소개와 지역 동인들과의 끈끈한 교류는 시집을 대한 독자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안겨 준다.

다른 동인들의 작품은 예외로 치드라도 정드리동인들의 작품을 지면 관계상 많이 소개하지 못함을 늘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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