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조선전쟁<6.25동란.한국전쟁>중이어서 조선인 학생은 얼마 없어서 학교 선생이나 학생이 조선에 관한 질문은 전부 나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나는 제대로 대답을 못했습니다."

지난 7월 19일 오사카 이쿠노구에 있는 KCC회관에서 <KMJ:재일코리언 마이노리티 인권연구센터> 30주년 모임 기념강연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서"에서 강재언<姜在彦.88> 전 하나조노<花園>대학 교수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꺼낸 서두였다.

"일제시대 황국신민화교육만을 받아서 민족적인 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물음에 대답을 하기 위해 조선 역사, 혹은 조선전쟁에 이르기까지의 문제 등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인이 쓴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말이다. 일본인이 쓴 조선사라는 것은 조선은 역사이래 자주독립의 역사는 없고 주위의 대국, 중국을 비롯해서 일본도 임나<任那>일본부가 있어서 주위의 대국에 의존해온 역사이다."

"자주독립이 아니고 주위의 대국에 언제나 종속되온 역사이다. 문화도 그렇고 유교와 불교 어느 것 하나도 독립성이 없고 이것은 중국문화의 카피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조선은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모든 것이 종속국가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가 느낀 소박한 의문은 나의 생활체험에서 볼 때 조선인은 중국과 일본과 다른 독자의 언어와 글자가 있고 또 중국과 일본과 다른 전통적인 생활문화도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한 민족적 독자성이 있는 것은 일조일석에 이루워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조선사관이 교과서나 일반적 독서물로 보편화되면 일본인이 조선인을 멸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에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조선사회의 <정체성:停滯性이론>인데 가령 일본에 합병되기 전의 조선사회라는 것은 일본에서 말한다면 <헤이안죠:平安朝시대.724-1192년. 약 720년 차이>의 단계의 사회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식인데 이럴 경우 자력으로 근대에 이행할 수 있는 내적요인이 없으니까 타율적 근대화 밖에 길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능한 민족이기 때문에 일본의 힘을 빌지 않으면 근대화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식민지화 숙명론>입니다."

1926년 제주 삼양 태생인 강재언 박사는 1945년 5년제인 제주농업고등학교를 전시중이어서 1년 단축하여 4년제로 졸업하고 징병검사를 피하기 위해 제주를 떠나 서울 임업시험장 연수생으로 있다가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갔다.

당시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했던 때여서 징집되기 전에 부모를 만나기 위해 제주로 가기 위해 광주로 왔지만 제주 가는 모든 연락선은 제주요새화로 도항이 금지되었었다. 해방 1주일 전이었다.

해방 후, 강재언 박사는 동국대학교 정경학부에 입학한 후 청주에서 고등학교 교사직을 맡다가 6.25때 일본으로 건너왔다. 오사카에 있는 오사카상과대학<현 오사카시립대학>에 입학했다.

이때에 많은 도움을 준 은사가 동대학 학장이었던 쓰네토오쿄<恒藤恭> 씨와 교수 나와토오이치<名和統一> 씨인데 쓰네학장은 소설 아쿠다가와상으로 유명한 아쿠다류우노스케<芥川龍之介>와 고교시대의 친구였다고 한다.

"그 당시 각 대학에서 조선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경성제대 등에서 가르쳤던 선생들이 귀국한 사람들 뿐이어서 그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경제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내가 일본인들과 대화를 통해 틀린 조선사관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조선의 역사를 바로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사에 손을 대게한 동기였습니다. 또 하나는 근대사에 손을 댄 것은 일본인이 중세, 고대사를 쓴 것은 많지만, 조선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조선 근대사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조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런지 몰라도 자신의 실력을 생각도 않고 그후 반세기를 지나 왔습니다만 내가 조선사 연구자로서 여러 책을 남기게 된 것은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조총련과의 관계,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료오타로오<司馬遼太郎>와의 교우 관계 등을 시간 범위 내에서 들려주었다.

강연 후 질문 시간에 나카오 히로시<仲尾 宏.78>KMJ이시장이 시바료오타로오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사카노우에노구모.坂の上の雲>에서 민비암살사건에 대한 왜곡적인 부분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나카오 이사장은 도오시샤<同志社>대학 졸업 후 쿄토조경예술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재일동포 제문제 운동에 힘을 기울이는 활동가이다.

나카오 이사장의 질문에 강재언 박사는 그는 역사가가 아니고 소설가이니까 나도 역사가로서가 아니고 소설가로서 그를 보고있다는 대답에 필자는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7월 26일 날 밤, 시바료오타로오에 대해서 NHK TV에서 방영되었는데 생전 시바 작가와 제주에 함께 갔던 강재언 박사가 금년 6월 다시 그 길을 다니는 모습도 나왔는데 한림공원에서 그 공원을 개척한 송봉규 회장도 나왔다.

한림공원에는 시바 작가의 기념비도 건립되었는데 "세기의 문호"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일본에서도 그러한 수식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는데 잠깐 들린 그곳에 이렇게 과장된 기념비 내용에 어느 NHK프로듀서는 시바 작가가 문호라면 일본에는 백명도 넘는 문호가 있다고 놀란 적이 있었다. 이번 방영된 내용에는 그 기념비는 나오지 않았다.

시바 작가에 대해서 제주투데이에 필자가 2010년 12월 21일 쓴 것을 첨부한다.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048

이렇게 일본의 학자, 작가, 문화인들과 교류를 나누면서도 날카로운 지적을 받으면서 그에 대한 이론적 반론을 위해 쓴 강재언 박사의 저서는 조선 근대사를 비롯한 30권을 넘는다.

강재언 박사는 쿄토대학에서 문학박사를 받았으며 23년 전 제1회 한국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했고 2006년 목단장을 받았다.

2006년 11월 8일 제주투데이에 <강재언 선생님 축하 파티>라고 쓴 글을 첨부한다.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8579

이 날 모임에는 KMJ사무국장이며, <관서제주특별자치도민회 청년회> 회장이고, <NPO법인 재일코리언고령자지원센터 산보람> 이사장인 고경일<高敬一> 씨의 종합사회로 제1부 강재언 박사의 기념강연과 배이화<裵梨花> 씨의 조선무용과 패널 디스커션 <젊은 코리어세대들은 이렇게 생각한다.>가 있었다.

패널 디스커션에는 나카오 이시장의 사회로 송유경<宋柔京>KMJ사무국직원, 최굉기<崔宏基>변호사, 오철<吳哲>행정서사이며 KMJ이사가 참석했다. 제2부에서는 가수 조박<趙搏> 씨의 노래와 이야기 후에 간친회가 있었다.

KMJ조직체제는 이사장, 부이사장, 상임이사 각 1명, 이사는 8명, 감사2명, 사무국 2명을 두고 운영하고 있는데 원로이신 강재언 박사도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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