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은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임진왜란 6년(1597) 단 12척의 배로 330척에 달하는 왜군의 공격에 맞선 '명량대첩'을 그린 전쟁액션 블록버스터다. <사진=뉴시스>
일본군에서 대좌로 복무하였으나 성남학원을 건립하여 교육자로 헌신한 김석원 장군은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매년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를 참배하였다. 그는 일본군에 복무할 당시 해군성 정문에 놓여 있는 닻에 ‘적장(敵將) 이순신이 쓰던 닻’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며 이를 전교생 훈화시간에 소개하여 청년학도를 감분(感奮)시켰다. 이순신은 적장이지만 일본인에게도 성웅(聖雄)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노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일본해 해전의 영웅 도고헤이하지로(東鄕平八朗)가 승전 축하연에서 그를 이순신에 비교하자 혹시 넬슨 제독에 비교한다면 모르겠으나, 이순신에 비유하는 것은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는 이야기에 감명을 받았다고도 하였다. 이것이 참교육이다.

이순신은 23전23승 전승이었다. 그는 이겨놓고 싸웠다(先勝而後求戰). 이순신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였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먼저 정보였다. 그는 갖가지 탐망(探望)을 통하여 적의 동태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듯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형지물, 특히 해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활용하였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여 승전으로 구현케 한 것은 우수한 무기체계였다. 일본함선은 기본적으로 수송선이었다. 그들은 적선에 올라 단병접전(短兵接戰)으로 승부하는 전법으로 싸웠다. 반면에 조선 수군의 거북선과 판옥선은 화포를 사용하는 본격적인 전선(戰船)이었다. 육전에서는 조총이 위력을 발하였으나 작동이 복잡하고 장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수발총(燧發銃)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창안한 ‘제대별 일제사격 이후 돌격’ 전법은 보병전술로서는 탁월하였으나 바다에서는 화포가 우수한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압도당했다. 이순신은 이 강점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전략적으로도 이순신은 탁월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은 일본 수군을 연파하여 호남을 보존하고 왜군이 한양으로 북상하지 못하게 막았다. “若無湖南이면 是無國家”라 함은 이를 말함이다. 이는 왜란 전반을 통하여 한중일 전체에서 가장 탁월한 전략적 판단이었다. 더불어 백성이 있어야 국가가 있고 국가가 있은 후에 임금도 있는 것이라는 애민사상은 ‘병의 기본은 도(명분)이다’는 손자병법의 진수(眞髓)와 통한다.

영화 <명량>(鳴粱)은 보기 드문 작품이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보고서 “이제야 한국에도 세계에 내놓을만한 감독이 나왔구나!” 했던 것은 1950년대 라쇼몬의 구로자와 아키라를 연상하였기 때문이다. 명량은 캐스팅도 훌륭하였고 김한민 감독의 해전 연출 장면은 톰 크루즈의 <Last Samurai>에 방불하며, 베이징올림픽을 연출한 중국의 장예모를 능가한다.

鳴梁은 한국 국민은 물론 일본인, 중국인들도 보는 것이 좋겠다. 이들은 여기서 16세기 동양을 흔든 대전역(大戰役)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 아베가 동북아가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유럽과 같다고 하는 것이 주제넘고 방정맞은 소리이기는 하지만 미상불(未嘗不) 전혀 엉뚱한 말은 아닐 수 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던 1894년부터 두 갑자가 지난 갑오년을 맞아 중국 전역은 대국굴기(大國屈起)와 해양사상, 애국주의가 범람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썩 반가운 조짐은 아니다. 지금 한중일 3국은 흡사 17~19세기 영국, 프랑스, 독일이 자웅을 겨루던 시기를 재현하는 것 같다.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 잘 되는 것 보지 못하였다. “모름지기 장기전이 국가의 이익을 가져온 적은 없었다”(夫兵久而國利者 未之有也)고 했다. <기사=아시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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