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추석이 가까워졌다. 고국에서는 그 준비가 한창이겠지만 일본의 동포사회는 거의 없다.
한국처럼 음력 8월 15일의 그 절기를 지키던 "오봉"을 양력으로 일원화 시켰기 때문에 음력 8월 15일은 중추절이라는 단어가 남았을 뿐이다.

동포사회도 일본의 사회생활과 맞추기 위해 양력으로 추석을 지내는 곳이 많으며 음력으로 지낼 때에도 아침상처럼 간단히 치르고 나서 정상적으로 일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고국의 최대 명절의 하나인 추석은 일본의 동포사회에서는 완전히 희석되고 말았다. 이럴 때 고향에서 온 한권의 시집을 읽으면 향수의 원점으로 돌아가게 한다. 양전형 시인의 <꽃도 웁니다>이다.

말총

누구나 말총을 품고 산다
- 그것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말단 시절
상사의 말총에 맞은 상처가 아직 있다

동문시장 욕쟁의 할머니는 기관총이다
흥정이 안 맞아도 다다다다
옆 가게 시끄럽다고 다다다다
무차별 난사에
이웃 가게 강아지 꼬리는 세울 틈이 없다

말수 적은 할머니의 영감
기관총 소리에 방 안에서 고개 불쑥 내민다
순간, 사격이 멈춰지고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영감은 아마 대포인 듯하다

서서히 녹이 슬어 함몰된 말총
총신에는 담백한 탄알도 필요한 것
쏘는 것보다 받는게 주구장창 목마른데
가늠자 없이 세상을 겨누는 입들

북적일수록 늘어가는 말총이지만 상처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삶의 정들이 오가는 위로와 해학도 있다.
추석을 며칠 앞둔 지금은 더욱 그럴 것이다. 번드르한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동문시장의 풍경은 흑백사진 시대의 모습일런지 모르지만 시인의 말총은 역설적이다.

세상은 그리운 것

때 이른 봄나물이 돋아난다고
얼어 죽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도 그처럼 때를 기다리지 못하여
가슴에 뿌리한 호기심을 일찍이
아닌 듯 소곳소곳 내밀어 댔잖으냐
그런대로 한켠에 버티고 있잖으냐
때늦은 가을꽃이 피어난다고
어떻게 버틸까 나무라지 마라
너도 그처럼 설마 했던 욕망이
다스리던 체면과 자제를 밀어내고
만발한 꽃향기 슬쩍 감췄잖으냐
우리들은 아무 때고 그렇게
미지의 세계가 보고 싶은 것이다
문 밖의 세상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들려주는 자장가와 옛날 이야기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자에게 들려주지 않고 손자 이야기를 먼 남의 일처림 자기 자식에게 들려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고 스승이던 존경의 대상 인물이라도 좋다. 그들이 들려주는 가르침은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연륜의 무게가 듬뿍 베인 우리들의 자화상인 독백일런지 모른다.

어떤 노부부

세상 삶은
알맹이만 모으는 일
실하고 여문 것에 눈 밝히는 일이지만

가게마다 기웃거리면서
빈 상자 모으며 사는 어떤 노부부
다 여문 자식이
재산 몽땅 날려먹었답니다

속이 얼마나 텅텅 비었으면
껍데기라도 모아 가득 채워
킬로그램당 오십 원씩 한 수레 일만 원쯤

껍데기가 된 노부부
알맹이 잃고
지상에 버려진 껍데기들을
아득바득 건지며 살고 있답니다

<어떤 노부부>는 비유의 대상으로서 가슴에 와닿는 시이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이 시에 대해서 다른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오사카 이쿠노에는 1세 할아버지나 할머니 특히 할머니인 경우가 많다. 시의 내용처럼 빈 종이상자나 신문지들을 회수하려고 가게나 길거리를 기웃거린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노인들이 이렇게 고생하면서 사느냐고 말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 노인들의 자녀들은 회사나 공장을 경영하거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노인들이 모으는 빈 상자들은 자기들이 모으지 않으면 쓰레기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깝기 때문에 모으고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운동이 되고 또 일화 단돈 백엔이라도 수입이 된다.

일석 삼조인 생산적이고 건전한 삶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도 나이 든 1세의 자연감소로 좀처럼 불 수 없게 되었다.

나도 길이다

누군가
나를 밟고 가야 할 일이 있다면
나도 길이다
이 사막 같은 세상
누구라도 헤매지 않게
곧고 평평히 드러눕겠다
포도 위엔 돌맹이 하나 없다
숲이 있고 바다가 있고
약간의 바람
때로는 달빛 은은한 나는
누구라도 걷고 싶은 길이다

달관의 경지에 이르는 자기 성찰을 우리는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혼자서 뒤돌아보는 자신은 누구의 길을 걷고 왔을까. 그러나 또 한곳 이렇다. 철로처럼 곧게 벋은 길은 곧 권태로움을 안겨 준다.

시집 <꽃도 웁니다>에서 이상 4편을 소개했지만 5부로 나눠진 작품은 모두 72편이었다.
양전형 시인은 제주 오라 출신이고 1996년 시집 <사랑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로 시작 활동.
시집으로 <동사형 그리움> <허천바래당 푸더진다> <도두봉 달꽃> <바람아 사랑밭 가자> 등이 있고 한국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 한라산문학동인회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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