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3월 5일<화> 일본 5대 중앙지의 하나인 산케이신문 조간 7면에 오피니온 플라자 <나의 정론> 입선 작품 1, 2위가 게재되었다. 필자도 응모했었는데 1위 입선이었다.

신문사가 한달에 한번 주제를 제공하여 작품을 모집하는데 1996년 1월 모집한 <나의 정론>은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였다.

모두 288편<여성 36편>이 응모가 있었는데 엄정한 심사결과 입선 1위와 2위는 각 1명, 가작은 3명이라고 발표하면서 심사위원의 평과 함께 게재했었다.

약 18년이 지난 지금도 한ㆍ일관계는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 역사인식에 발목이 잡힌 채 그 당시보다 더 악화 일로에 있다.

1995년 8월 15일 당시 무라야마 수상이 "전후<해방 후> 50주년 담화" 발표에 대해 에토 타카미 총무처장관이 이의를 제기하여 한ㆍ일간에 험악한 관계였다.

한ㆍ일합방이 강제적이라는 내용들에 대해 그 담화는 틀렸다면서 식민지시대에 일본은 나쁜 일도 했지만 좋은 일도 했다는 발언으로 비판을 받고 사임했다.

이 정도의 발언 수준은 일본 정치가만이 아니고 지금은 책임 있는 지위의 현직 각료들 사이에도 일상화되어 그 위험수위는 날로 높아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어로 쓴 산케이신문 입선에 대한 필자의 글 내용을 가끔 질문 받곤 했었지만 약 18년 전보다도 더 악화되버린 지금 그 전문을 소개한다.

신문사에서는 "미래 지향의 새로운 발상을"이라는 제목을 붙였었다.

해방 후 50년이었던 지난 해<1995년>에는 <일본> 각지에서 신년 인사도 채 끝나기 전에 한신대진재<코베지진>가 일어났고 또 그 위에 몰아붙이기라도 하듯 지하철 사린 사건<이단교 옴교에 의한 무차별로 화학 독가스 사린을 뿌린 테러>이 일어났다.

이 미증유의 지진과 테러로 인하여 해방 후 50주년이라는 상징성이 활발히 논의되지 못한 채 퇴색해버린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었다.

특히 한ㆍ일간에 있어서는 그것만이 아니고 한ㆍ일기본조약에 조인하여 만 30주년이어서 한ㆍ일양국이 공유할 수 있는 역사의 재인식이 강조될 해였다.

그러나 일본 국회의원들에 의한 <부전:不戰결의안>이 용두사미로 끝나버리고 8월 15일 무라야마 수상의 전쟁책임에 대한 수상담화 발표도 있었지만, 그 후 에토 타카미 총무처장관의 발언으로 오사카에서 열리는 에펙<APEC:아시아지역 경제협력회의>회의에서 한ㆍ일양국회담이 무산될 위기에까지 처했었다.

이러한 한ㆍ일간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5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이 무엇 때문에 인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느냐는 역사관에 의한 한국측이 비합법성 주장과, 그 시대의 필연성과 합법성을 주장하는 일본측이 대립이기도 하다.

이율배반적인 역사인식의 갈등은 양국의 정치가와 역사학자에 의해 논리적으로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미래 지향의 한ㆍ일관계에 있어서 두 곳의 실레<實例>를 들겠다.

한 곳은 미야자키현 히가시우스키군 난고손<南鄕村.합병으로 현재는 미사토쵸:美鄕町>인데 인구가 약 3천 백여명의 큐슈 중앙산지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고대에 일본에 망명한 백제 왕족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 중앙에 있는 미카도<神門>신사에 망명한 정가<禎嘉>왕을 모시고 마을 사람들은 옛날부터 우지가미<氏神:마을마다 그 지역의 신도:神道의 신>로서 신앙해 왔다.

이렇게 천 몇백년 전의 백제 전설을 현실화 해서 고대의 모습을 복원 시킬려는 것이 <백제 마을 만들기>였다. 그 동안 <백제관>을 건립할 때는 한국으로부터 기와를 갖고 오고 한국의 단청<丹靑>장인이 협력을 했다.

<백제 마을 만들기>는 예상외로 한국의 반향이 커서 친선방문단과 시찰단만이 아니고 지금은 큐슈지방에서 가장 잘 알려진 관광명승지가 되었다.

또 한 곳은 야마카다현 모가미군 토자와무라<戶沢村>이다. 인구 약 7천여명의 마을인데 1999년에 모가미강을 중심으로 개발기본계획을 만들었다.

풍부한 자연과 농촌문화를 지키고 미래를 개척하는 이상향을 추구하면서 유구한 역사를 새긴 모가미강의 흐름이 고대 조선반도의 문화 원류임을 알기 위한 <인생을 풍요스럽게 즐기자>라는 발상이 있었다고 한다.

교류는 1985년 <국제청년의 해>를 기회로 마을 청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된 것인데 1989년에 농업기술교류를 주목적으로 한국 송학면<충북 제천시>과 상호 방문이 이루어졌다.

이 교류가 여름방학 때는 어린이 교류 외에 부인들에 의한 송학면에서의 김장담그기 연수 등, 토자와무라에 시집 온 한국 신부의 지도로 <토자와김치>가 특산품으로 팔리고 있다. 이것은 이 마을에 국제결혼을 하여 한국에서 온 한국 신부들의 힘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토자와무라에 <아줌마회>가, 송학면에는 <토자와회>가 생겨서 가족이나 부부들이 상호 방문을 하고 토자와무라에서 한국민속무용단 공연 등도 하고 있다.

한ㆍ일우호의 토자와무라에서는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테마파크 <고려관>이 내년 완성된다고 한다.<당시 완성된 고려관에서는 현재 한국특산품 판매도 하고 있음>

이상 두 곳의 예를 들었지만 난고손과 토자와무라의 공통점은 농업의 저미<低迷>와 고령화로서 전형적인 과소촌이었다.

그러나 난고손은 먼 옛날부터 전해 오는 전설문화를 토대로 그 문화를 계승하여 승화 시킨 점이다.

또 토자와무라는 폐쇠적 이미지가 강한 농촌에서 여성 부족으로 인해 국제결혼이 갖어온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들고나와 서로 다른 생활문화를 이해하고 인정하므로 인해 새로운 국제문화로 발전 시킨 것이다.

이것은 과감한 발상 전환에 의한 한국과의 교류가 마을 부흥의 원점이 되어 성공한 예이다. 성공의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소규모 단위로 지속성을 갖은 인적 교류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교류를 포함하여 나는 다른 차원의 교류도 제안하고 싶다. 한ㆍ일간의 학교 사이의 교류이다. 지금 교류하는 학교들도 있지만 이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많은 망설임과 개운치 못한 감정도 있을런지 모르지만 연중행사로서 지속성을 갖고 교류를 쌓아가면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수학여행이나 교환 유학생 제도도 좋다. 이러한 교류 속에서 제기된 문제나 의견들은 상호 학교의 커리큘럼에 꼭 넣어서 서로 확인해야 한다. 왜냐하면 학교 사이에는 교류가 지속되어도 학생들은 입학과 졸업에 의해 다르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로서 같은 세대가 역사, 문화, <자신들의>고민, 미래 등을 서로 대화로 주고 받을 때 공유할 수 있는 미래 지향의 새로운 발상이 나오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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