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사업이나 여행, 다른 일로 일본에 온 사람들이 동포들의 일본어 대화를 듣다가 "왜 동포들은 1세끼리 말할 때도 일본어인가?"라고 가끔 묻는다. 일본에서만이 아니고 동포들이 한국에 가서 일본말로 할 때에도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
 
묻는 사람에 따라서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항의조로 톡 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따끔한다. 그래서 내놓는 답변이 1세들이라도 일제시대부터 일본에 살아서 우리말을 잘 모르니까 일본어로 말한다고 대답한다.
 
"네. 그건 저도 이해합니다. 그런데 해방이 돼서 오래된 후에 일본에 간 사람들끼리도 일본말을 사용합니다. 그것을 저는 이해 못하겠습니다."
 
해방 후라면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글 세대를 의미하는데 그 질문 사실 그대로이다. 필자는 군대까지 갔다 오고 그래도 한글로 소설을 쓴다는 명색이 작가인데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당혹스럽고 난감하다.
 
지난 9월 1일부터 4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제16기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해외지역회의"가 서울 그랜드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참가자는 일본 4개지역의 협의회 230여명을 비롯하여 중국, 유럽, 중동, 아프리카지역에서 모두 570여명이 참가한 회의였다.

 1일 날은 등록, 숙실배정과 전체모임에서 일정 안내 및 협의회별 소개, 박찬봉 사무처장 인사와 현경대 수석부의장 주최 만찬이 있었다.
 
2일 날은 개회식과 더불어 현경대 수석부의장의 기조연설, 박찬봉 사무처장의 2014년 민주평통 주요업무보고, 김영수 서강대 교수의 "최근 북한동향과 남북관계 전망", 오후에는 청와대 춘추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통일대화가 있었다.
 
3일 날은 지성호 NAUH<북한인권 청년단체>대표의 "내가 겪은 북한"의 증언, 정종욱 통일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의 "한반도 통일시대를 위한 방향과 과제", 윤병세 외교부장관의 국정보고 "통일환경 변화와 외교정책 방향", 고학찬 예술의 전당 사장의 "소통과 예술", 오후에는 참가 14개 협의회의 분임토의와 그 결과 발표가 있었다.     
 
4일 날은 희망자에 한해서 통일안보현장 시찰로 도라전망대와 임진각 답사가 있었다. 오사카지역에서 참가한 위원들은 몇 차례 답사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곳은 가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위원이 대부분이었다.
 
강연 내용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월 28일 독일 방문 중 <드레스덴선언>의 "통일은 대박이다"를 중심으로 한 강연과 국정보고들은 이미 국내에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그 강연들 속에서 고학찬 사장의 강연은 예술인다운 이색 강연이었다. 뉴욕에서 생활할 때 뉴욕시장에게 처음 한국어 라디오방송을 제안한 이야기와 그곳 생활 이야기. 오래 뵙지 못한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자신을 못 알아봤을 때, 어머니가 잘 부르던 제주민요를 불렀을 때 아시드라는 이야기는 참된 소통의 의미를 일깨워줘서 장내를 숙연케 하고 감동을 안겨 주었다.      
 
특이한 것은 일본, 중국, 유럽, 중동, 아프리카지역의 14개 협의회에서 참가한 다양성이다. 분임토의는 14개 협의회별로 해서 그 결과를 전체모임에서 발표하는데 각 지역별 발표를 5분씩 계산해도 70분이 넘는다.
 
십여년 전만 하드라도 한국에서 왔다고 해도 북한이라고 인식했다는 아프리카에 북한의 실상을 알린다는 아프리카 위원의 보고, 북한의 인권문제에 중점적 논의를 한다는 유럽 위원의 보고, 중동에 파견된 북한근로자들에 대한 인권개선에 관한 중동 위원들의 보고와 각각 거주국 국민들과의 교류에는 신선하고 새로운 사실이 많았다.
 
제14기부터 출범한 중국 자문위원들의 민주평통의 역사는 이훈복 중국부의장의 인사말처럼 짧지만 그 지역성은 물론 중국과 북한 관계를 생각할 때 앞으로 민간 차원의 새로운 시각에서의 교류는 많은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일본에서는 조총련 문제와 탈북자 지원, 현재 동포 4세까지 이어지는 차세대 육성에 따른 민족교육과 걸끄러운 한.일관계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렇게 14개 협의회에서 570여명의 참가자 중 230여명의 참가한 일본지역 위원들을 위해서 유일하게 동시 통역 수신기가 준비되었다. 모두가 필요치 않지만 4세까지 일본에 뿌리를 내린 재일동포사회에서 우리말을 다 안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일본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모두 한글 세대들이 새롭게 진출했고 유창한 우리말로 자신에 넘치는 보고가 계속되었지만 일본측에서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은 2.3세의 인사와 약간 서툰 보고도 있었다.
 
회의 도중 식사 때는 서로 다른 국가에서 온 위원들과 같이 자리를 할 때가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가끔 명함 교환도 하는데 즐거운 시간의 한때이다.
 
3일째 아침 식사 때는 중국 칭다오협의회의 위원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왜 일본에서 오신 1세 위원들은 우리말을 알면서도 일본어를 사용하십니까?" 의아스럽다는 시선의 질문이었다.
 
식사는 물론 커피도 다 마시고 시간도 없어서 대강 설명을 하고 헤어졌는데 이번 회의 중 가장 머리에 남는 말이었다.
 
필자는 가끔 고향 제주에 가면 순수한 제주도 사투리만을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자리에서 나 혼자만 열심히 사투리를 쓰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고향 사람들은 사투리와 표준어를 섞어가면서 쓰고 있다.
 
그러면 나도 그 식으로 따라서 한다. 지금 제주에서는 제주사투리 아니, 제주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면서 "제주어 살리기" 운동을 전문가만이 아니고 다방면에서 전개하고 있다.
 
원인은 언어생활이 이중성 구조를 갖고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생활에 있어서 표준어와 제주어의 공사<公私>는 물론 다른 지역<육지>과의 인적 교류의 가속화가 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면 일본에서의 우리말 환경은 어떠한가. 제주에서 제주어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보다도 더 열악하다. 본인이 우리말을 사용 안 하면 하루 종일 우리말을 들을 수 없을 때가 허다하다.
 
모든 것은 일본어로서 일상이 이루어진다. 몇년, 몇십년의 일상 속에 그것은 언어 리듬만이 아니고 일상생활 전부를 좌우하고 몸에 베었다. 언어는 살아 있는 생물체의 하나이다. 우리말보다 일본어라는 생물체의 밀착도가 압도적인 생활 환경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 서로 우리말을 아는 사이일지라도 본능이 아니고 의식적으로 우리말을 써야 하겠다는 약간의 긴장감이 없으면 좀처럼 줄줄 나오지 않는다. 제주에서 제주도민들이 제주 사투리를 쓸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협의적인 의미에서 제주어를 예로 들고 비교한 것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지만, 언어권이 다른 국가에서의 광의적인 의미도 다름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본에서 그래도 필자는 아주 나은 편이다. 근무처는 모두 일본인이고 귀가해서도 마누라가 동포 2세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우리말 가르치지 않는 점은 반성하고 있음>
 
그러나 제주에서 일간지가 오고 한국 문예지를 정기구독하고 있으며, 아는 문인들로부터 책이 오고 이렇게 제주투데이에 글도 쓰고 우리말로 소설도 쓰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말을 아는 동포를 만나도 먼저 나오는 것이 일본어이다. 일본어가 능숙해서도 아니고 우리말을 거부하는 비애국적인 차원은 더욱 아니다. 몸에 베인 일상의 리듬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말을 배우고 아는 일본인들에게는 보통 만났을 때도 의식적으로 우리말을 쓰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살아 있는 진정한 한국어 가르침이고 자신 있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