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강재언 박사 부인>

"조선인과의 결혼으로 가족에 폐를 끼치면 안되니까 칸도오(勘当:감당.인연을 끊는 행위)를 자청해서 호적을 저 혼자 따로 만들었습니다."

아직도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이 뿌리 깊게 남아있는 일본사회에서 해방 후라지만 1950년대의 조선인 차별은 마치 계급사회의 구조처럼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지방도시 기후현(岐阜県)에서 태어나서 대도시 오사카까지 와서 대학을 졸업한 딸이 당시 조선인과 결혼한다면 아버지의 비애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둘이 좋다면 그렇게 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딸이 스스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가 "칸도오"를 택하는 길이었다.

"칸도오(勘當)"라는 단어는 한국에서는 사용하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앞에서 간단하게 그 의미를 "인연을 끊는 행위"라고 썼지만 사전에는 "의절:義絶. 주군, 어버이, 스승이 아랫 사람의 실책, 비행 등을 책하여 인연을 끊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 타케나카 미에코 (竹中恵美子. 85) 여사는 제주시 삼양 출신인 "조선근대사. 사상연구가" 강재언(姜在彦. 88) 박사와 결혼을 했다. 그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의 인텔리층을 생각할 때 파격적이고 순애보적인 사랑의 결실이다.

"대의(大義) 없는 국회해산"이라는 야당의 강력한 비난 속에 아베 수상의 중의원해산을 강행한 11월 21일 마이니치신문 석간에 광고란을 제외한 16면 전면에 경제학자, 오사카시립대학 명예교수 타케나카 여사의 인터뷰기사가 게재되었다.

"오이니마나부:老いに学ぶ:노령(老齡)에 배운다."라는 의미의 난인데 여성의 활약을 성장전략의 하나로 추진해 온 아베 정권에 대해서 여성운동의 선구자인 타케노 여사에게 그 의견을 묻는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타케나카 여사는 고향에서 고교 졸업 후, 오사카부여자전문대학에서 배운 후, 1949년 오사카상과대학(현,오사카시립대학)에 입학했다.

학생 수 219명 중, 여학생은 단 3명뿐이었는데 이곳에서 운명을 결정 짓는 두번의 만남이 있었다고 했다. 하나는 스승이었던 나와 토오이치(名和 統一) 교수인데는 치안유지법사건으로 대학을 떠났다가 일본 패전 후, 복귀한 마르크스경제학자였다.

"경제학은 돈 벌기 위한 학문이 아니다. 정치를 바로 잡고 민중을 구제하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학문이다. 경제학처럼 휴머니즘에 넘치는 학문은 없다."라는 나와 교수의 말은 모래 속에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타케나카 여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 하나의 만남은 경제학 연구자를 목표로 진로를 결정할 때 같은 경제학과에 강재언 박사와의 만남이었다. 6.25동란 때 일본으로 건너온 그의 조국에 대한 뜨거운 생각과 자세에 마음이 끌리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강재언 박사 역시 나와 교수의 제자였으나 그 당시 각 대학에서 조선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은 경성제대에서 가르쳤던 선생들이 귀국한 사람들 뿐이어서 그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경제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내가 일본인들과 대화를 통해 왜곡된 조선사관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조선 역사를 바로 알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해서 강재언 박사는 조선근대사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민족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가정을 돌볼 여유가 별로 없었다.

타케나카 여사는 아이를 키우면서 경제학에 몰두하지만 당시 아이를 맡길 보육시설도 없어서 이웃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자전거로 대학과 집과 아이 맡긴 곳을 매일 다니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모자랐지만 수면 시간을 쪼개면서 극복했다.

아이가 있는데 어머니가 일하러 간다는 주변의 말들도 그렇지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남성 교수들의 모습에도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술회했다.

왜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가사노동을 떠맡야 하는가? 일하는 여성은 직장과 가정에서 이중 노동에 시달리면서 이류 노동자 밖에 될 수 없는가? 이러한 사회 시스템은 왜 만들어졌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연구자인 동시에 내 자신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인 거절> 속에 집 비는 고생은 물론 밀감 상자를 책상으로 시작한 신혼생활 속에 사물을 직시할 때 피라밋형의 정점이 아니고 저변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성해방도 엘리트보다 일반 여성의 지위가 어떻게 변하는가가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가치이고 자세입니다.

2001년부터 6년 2개월 동안 오사카부의 "동센터(당시 오사카부 여성종합센터. 현,오사카부립남녀공동참획.청소년센터)" 관장(비상근)을 역임했었다.

동센터는 여성의 힘을 키우고 그 정보를 발신하는 거점이었지만 퇴임 후, <재정재건>이라는 하시모토 오사카부지사의 개혁에 존속 위기에 처했었다. 맹렬한 반대운동으로 재단은 겨우 남았지만 여성의 권리는 이렇게 간단히 빼앗긴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

"위태로움은 지금도 느낍니다. 남성주의 사회가 그대로이며 <여성활약>이라고 해도 현재 여성이 7할이 저소득 비정규 노동자 확대에 이르기뿐이었습니다."

"지금 사회정책학회서 <타케나카이론의 제상:竹中理論의 諸相>이라는 분과회가 계속 열리고 있습니다. 저의 여성노동연구의 발자취가 전후(일본패전후) 여성노동환경변화와 겹치게 때문이겠지요."

"그때 그때의 논문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되니까 준비에는 많은 부담이 되고 있지만 연구자로서 큰 격려가 되고 있습니다."

50년 전부터 여성노동연구에 전념한 타케나카 여사는 자신의 경험은 물론 노동현장에 들어가서 격려하고 자치체의 여셩정책에 적극적으로 제언해왔다.

"연구 수준, 노동환경도 50년 사이에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남녀성별 역할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통념, 사회구조, 구조의 근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손을 안되고 출생률 저하 위기감에서 <더욱 일하라>라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활약>이 아니고 <활용:이용>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아베정권의 여성 활약을 성장전략의 하나로 자리매김 한 현정책의 부조리와 모순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타케나카 여사는 1929년 기후현 출생. 1952년 오사카상과대 졸. 오사카시립대 경제학조수, 강사, 조교수, 1974년 교수. 1986년 경제학부장. 1993년 정년퇴직. 하나조노(花圓)대 교수. 류코쿠(龍谷)대 교수. 오사카부립여성종합센터(동센터관장).

저서는 <현대노동시작의 이론> <부인회 임금과 복지 부인해방의 오늘의 과제> <나의 여성론 성적역할 분업의 극복을 위해> <전후 여자노동사론> <여성론의 프론티어 평등에서 형평에> <타케나카 에미코저작선 전7권>과 공저 다수.

한국과 재일동포사회에서는 강재언 박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부인 타케나카 미에코 여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나온 신문기사를 동포들에게 배부했을 때도 처음 알았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2014년 8월 6일 제주투데이에  강재언 박사에 대해 쓴 필자의 글을 첨부한다.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8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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