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는 왜 자기 호적에 올라 있는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통명(속칭 일본명)을 사용하는가는 동포의 숙명적인 명제이다.

민단(정식 명칭은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의 문교부 활동 방침 속에 <일본 공교육에 있어서의 민족교육 및 국제 이해 교육의 추진>에 <본명 사용 환경 조성>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연중사업으로 언제나 게재된다.

제각기 가정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통명이 있지만 동포 자녀들이 다니는 일본학교의 공식 서류에서만이라도 본명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공식서류라면 매일 부르는 출석부는 물론 통지표, 졸업장 등을 말하는데 본명만을 기입하는 예와 본명에다 통명을,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통명에다 본명을 추가하는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서는 학교생활 속에서 본명으로 서로 부르자는 활동 방침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 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추진하는 예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일본교육위원회에서 정식으로 통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일본교육위원회는 적극적으로 스스로 이 활동 방침을 시달하는 것이 아니고 민단으로부터
공식 요청이 정기적으로 있기 때문에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나 학교 밖에서는 자연스럽게 통명을 사용하다가 학교에서 본명을 사용할 때의 위화감은 어느 누구보다도 본인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것을 장려하는 교사들은 그러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 위화감 속에 응어리진 아픔까지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1939년 제령 제19호 20호>에 의해 황민화정책 일환으로 <창씨개명>이 강제적으로 추진되면서 당시 조선인에게는 많은 저항감 속에서도 일반화 되었었다.

"학교에서 동포 자녀들에게 본명을 장려하는 것은 새로운 역차별이 아닙니까?"
진심으로 동포 자녀들을 걱정해서 본명 사용 요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일본인 교사들도 있는데 극소수지만 그것 또한 솔직한 발언이다.

"본명 사용 요청을 학교 당국에 하지 말고 부모들이 집에서나 사회에서 사용한다면 자세히 해소될 문제인데 왜 아이들에게만 그렇게 하십니까?"

그들은 통명을 사용하는 동포사회의 부모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항의하고 싶겠지만 이 발언만은 터부이다.

그럼 왜 재일동포들이 통명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를 일본이 만들었는가라는 반문이 화살처럼 그들의 가슴에 바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차별과 일본 정부의 정책이 만든 산물이 결과이다.

통명을 사용하지 않고 본명만을 쓰는 것은 행정상으로 아주 간단하다. 일본 관할 구청이나 시청에 가서 자신의 <주민기본대장>에 통명 삭제 신청을 하면 바로 끝난다. 다른 증명서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여태까지 사용해 왔던 통명은 어디에도 기재되지 않는다. 학교 당국에도 통명이 삭제된 증명서를 갖고 가서 제출하면 구태여 본명 사용 요청을 하지 않드라도 자연히 하게 된다.

즉 물이 쏟아지는 수도꼭지를 잠가 버리면 물은 흐르지 않는다. 수도꼭지를 잠글 생각은 않고 흐르는 물만 닦으려니 아무리 닦아도 그대로이다.

본명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행정상으로 통명을 삭제해버리면 이러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본명과 통명이 헷갈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순과 부조리를 동포 자신들이 뻐저리게 잘 알면서도 본명 하나만을 고집 못하는 슬픈 일본사회 현실이 있다.

이러한 교육의 성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본명을 사용하다가 사회에 나가 자신이 원하는 회사에 들어갔을 때 통명을 요구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개인의 권리와 인권 차별 측면에서 법적 소송을 제기하면 틀림없이 승소한다. 그 시련을 겪으면서 획득한 자기 정체성의 확립에는 더없는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같은 직장에서나 주위에서 그러한 자신을 이해 못하는 일본인이 노골적인 괴롭힘과 차거운 시선으로 언제나 자기를 대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다음은 정반대인 경우이다. 어릴 때부터 계속 통명만을 사용해서 사회에 진출했을 때 자신이 재일동포라고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일본인보다 일본인처럼 보인다.

그러한 동포를 일본인이라고 믿고 동료나 아는 사람들이 한국이나 동포를 저질 언어를 내뱉으면서 마구 비난한다면 그 자리에 동석한 동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렇게 동포사회는 본명과 통명 사이에 이율배반적인 정신적 갈등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지만 통명이 주는 아픔이 더욱 크다고 이니할 수 없다. 카멜레온적 일상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체적으로 유전병적 요소가 있을 때 그 유전병을 고칠 수 있다면 유명한 병원만이 아니고 민간요법 등 백방으로 알아볼 것이다. 자신이 겪었던 아니, 겪고 있는 쓰라린 고통을 사랑하는 자손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통명을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재일동포로서 공개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이유야 어떻든간에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이 이중성이 동포사회의 새로운 정신적 유전병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카멜레온은 위기에 처했을 때 몸 자체의 색을 변화 시킨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고 몸부림이다
동포가 통명을 사용할 때도 이처럼 치열한 자기 투쟁이 있어야 한다.

투쟁의 본질은 자기 정체성 확립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때로는 굴욕과 부당한 순종이 강요되는 자기 감추기 투쟁인데 이것은 자신만이 감수해야 할 커다란 아픔이기도 하다.

통명을 사용하는 한 이것은 자신의 세대에서만 끝나는 아픔이 아니고 자식에서 손자 다시 증손자로 대대로 대물림하는 정신적 유전병과 다름없는 것이다.

신체적 유전병인 경우에는 치료하기 위해 가족 모두가 갖은 노력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열성을 다한다. 통명도 정신적 유전병인 이상 가족 모두가 치료하기 위한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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