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2일부터 18일까지 일본 오키나와 평화행진 및 현민대회에 참가했던 고권일 강정마을회 부회장의 참가기를 나눠서 연재한다.  
 
 
■ 5월 12일(첫 날)
 
아침 6시 10분.
생명평화 삼거리 식당 총지배인 김종환 형님, 마을회 운영위원이자 평화상단 이사 겸 강정책마을 대표 김봉규, 강정마을회 부회장 최용범,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미리 약속되었던 공항버스 정류장에 모였다.
 
어라라...직함을 써놓고 보니 김봉규가 제일 쎄보인다.
 
김봉규는 오키나와 태풍소식에 기행이 틀렸구나 싶어, 짐을 안 싸고 있다가 새벽에 일기예보를 보니 태풍이 도쿄까지 올라간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부랴부랴 배낭 하나만 들고 나왔다고 했고, 종환형님은 전날 태풍영향으로 제주에 내린 폭우 때문에 미량이에게 주문해둔 생선선물을 못가지고 왔다고 다들 푸념이었다.
 
아무튼 공항버스를 타려고 모인 것은 아니었고 내차인 스타렉스로 공항으로 이동하고 돌아오는 차는 박영인씨가 운전해주기로 했다. 아침 비행기시간을 맞추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공항버스로는 첫차를 타봐야 시간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아침 8시10분 제주에서 김포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김포에서는 인천공항까지 공항철도로 이동, 2시 30분 제주항공을 이용, 인천-나하 노선을 탔다.
 
좁다란 의자 배치 때문에 잠도 청하기 어렵고 뒤척이기도 힘들었다. 최용범 부회장이 기내 유료 서비스로 맥주 3캔을 사서 돌렸고, 어느새 2시간 15분이 훌쩍 지나고 구글 지도 검색으로 살펴본 인천과 나하의 직선거리 1,268km가 0이 되는 순간이 왔다. 가벼운 진동과 함께 비행기가 나하공항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순간 국내선보다 국제선 조종사들의 실력이 좀 더 좋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행기와 대합실을 잇는 연결통로에서부터 훅~하는 뜨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여기가 오키나와구나!’
 
그간 오키나와에서 제주 강정마을에 연대활동을 세 차례 오고 제주와 강정마을에서도 연대하러 세 차례 오가는 동안 나는 법원에서 여권발급을 불허하여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섬이었기에 감회가 깊었다.
 
입국심사장에서 최용범 부회장과 김종환 형님이 나오지를 못해서 한참을 기다렸다. 뭔가 잘 못 되었나싶어 조바심이 나기 시작할 때 쯤 두 사람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나왔다.
 
“입국심사용지 뒷면 적는 걸 깜박해서...”
 
김종환 형님은 오키나와가 두 번째다. “내가 아니고 최용범이~ 난 그냥 옆에서 기다려 준거지~”
 
최용범 부회장이 뭐라뭐라고 변병을 늘어놓았지만 다를 그냥 웃고 수하물 찾는 곳을 빠져나왔다.
 
1층대합실에 나와보니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한국평화기행단 멤버들이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원래는 우리는 나중에 숙소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먼저 출발한 한국팀은 먼저 평화기념관 방문을 하기로 했었던 터이다. 그러나 비행기가 지연되어 두 비행기 시간차가 1시간여밖에 나지 않아서 이왕지사 함께 움직이려고 기다렸다고 한다. 앗싸~ 처음부터 뭐가 잘 풀린다. 우리는 그렇게 평화바람 구중서와 참여연대 황수영, 평택 흥사단 간사였던 김대건, 민생연대 이희정씨 등의 일행에 합류하여 우리 한국기행단은 8명이 되었다.
 
공항에서 기다렸던 분들 중에는 일본분들도 계셨는데 강정마을에도 오셨던 오오무라씨(전직 교사, 현재 오키나와 공식가이드)와 토미야마씨(민중연대 대표)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통역은 나중에 아라비아 왕자로 별명이 붙은 히로유키씨(맞나? 기억이 가물가물~)가 해주셨다.
 
공항청사 밖으로 나오는 순간 훅~하는 열기와 뙤약볕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순간 속으로 ‘이 곳에서 일주일을 지내야 하나...’는 걱정이 가득찼다.
 
오키나와가 제주도와 풍습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에서 상당히 유사하다는 말은 익히 듣고 있던 터였다. 돌담길에 똥돼지, 매운 것과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식문화, 홍길동전에 나오는 남쪽조선 이야기까지...
 
대절해둔 25인승 버스를 타고 오키나와 남동쪽에 있는 평화기념공원으로 갔다. 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은 일본 풍경과는 사뭇 달랐고 오히려 제주도에 가까웠다. 현대식 주택구조도 평슬라브를 선호하는 제주도와 닮았고 색채감각까지 유사했다. 군데군데 보이는 일본글자 간판만 아니라면 제주도라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평화기념공원에 도착했지만 우리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자료관 관람은 취소하고 외관만 둘러보기로 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위치>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전경>
 
우선, 한국인위령탑부터 둘러보았다. 2차대전말, 오키나와 결전을 위해 30만명의 일본군이 이 섬에 들어왔고 같이하여 1만명 가량의 조선징용군이 오키나와에 배치되었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한다.
 
후에 오키나와에서 평화기념관을 조성하려고 하자 박정희대통령 시절 남한정부가 북한보다 앞서 건립해야한다며 불과 3일(?)만에 이 탑을 제작하여 배에 싣고 오키나와로 왔다고 한다. 박정희대통령의 부정적인 평가야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지만 이런 일 하나만큼은 참으로 결단력이 뛰어난 것 같다. 그래서 칭송하는 사람도 많은가보다 싶었다.
 
 

<한국인 위령탑 비문>
 
 

<박정희 대총령이 지시하여 긴급히 수송하여 조성하였다는 위령탑>
 
평화기념공원 남동쪽으로 높이30~50m에 이르는 절벽이 이어진 해안이 있다. 이 절벽 아래로 당시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황군의 세뇌교육으로 인해 야수와 같은 미군에게 수치를 당하며 사느니 깨끗한 몸인 채 죽는 것이 낫다는 신념으로 수많은 오키나와 원주민들이 투신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바다는 7일간 피로 물들고 그 시체들을 뜯어먹은 물고기들은 통통 살이 올랐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전쟁의 야만이 느껴져야 할 장소 임에도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장소였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자료관의 전경>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투신자살했다는 비극의 절벽>
 
그 절벽을 마주하고 평화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대의 의미는 오키나와에서 평화의 물결이 전세계로 퍼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나타낸 디자인이라고 한다. 후에 히로시마 평화공원과 나가사키 평화공원에도 이와 똑같은 분수대가 세워졌다고 했다.
 

<평화분수대 - 평화의 물결이 오키나와를 기점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리고 쭈욱 이어지는 묘비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다. 제주 봉개동 4·3 평화공원이다.
오키나와와 제주도는 이런 면까지도 닮았다. 오키나와로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에게 이 평화기념공원은 필수코스라고 한다. 제주도도 이석문교육감 이후로 4·3 평화공원이 필수코스가 되어가고 있다. 제주도가 조금 뒤늦은 감이 있지만 두 나라의 청소년들이 평화공원 답사를 통해 평화감수성을 계속 키운다면 언젠가는 두 나라간의 앙금이 깨끗이 씻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기분도 든다.
 
이곳에 잠든 전쟁의 희생자들 중 일본군 사령관 이름도 있었다. 이 사람이 자결하며 ‘일본인이여 끝까지 항전하라!’고 유언을 남긴 바람에 군인과 민간인 피해가 더욱 커졌다고 한다.
 
‘그런 인간이라면 그냥 이름을 파냈어야지!’
 
 

<즐비한 묘비들>
 
순간 울컥했지만, 따지지 않기로 했다. 이 사람들도 그런 비분강개가 어찌 없었으랴. 다만, 피를 나눈 일가친척들의 피해의 상처를 고스란히 입고 있는 사람들이 내린 결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토를 달 기분이 사라졌다. 제일 끄트머리 쪽 묘비에 북조선 출신희생자 명단과 남한출신 희생자 명단이 있었다. 희생자가 발굴될 때마다 명단을 추가하고 있다지만 1만명은 커녕 삼백여명이 조금 넘어 보이는 수준이다. 이름 석 자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동포들이 이 남녘땅에 끌려와 목숨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서글퍼졌다.
 

 

 

 

<북한과 남한 출신 희생자 묘비 구역>
 
참배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오키나와 서북부 나고시 부근 민박이었다.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제한속도 시속 50km인 오키나와 고속도로와 제한속도 40km의 일반도로의 사정을 생각하면 1시간 30분 걸린 거리가 그리 길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민박집 주인 성함을 지금까지도 잘 기억못하지만 젊은 시절 일장기를 불살라 법정에 세워지고 극우들의 살해협박이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하지만 일본은 반환된 오키나와 주민들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일장기가 국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가. 일본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라는 의미로 과거의 유산인 일장기를 불사른 것이다’ 라는 주장을 펼쳐 무죄를 선고 받았고, 열열한 시민들의 지지로 시의원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후에 ‘시의원이 되려면 일장기를 태워라’ 라는 농담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은퇴하였지만 정치적 활동은 꾸준히 하고 계시고, 오키나와의 권리를 되찾는 투쟁을 위해 사람들에게 머물 장소를 제공하고 싶어 민박을 차렸다고 한다. 그의 뜻에 부합하는 손님이오면 주인아저씨는 자신이 담근 술과 고기를 대접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갔던 날은 주인아저씨가 도쿄에 가는 바람에 집을 비우고 없었다. 그리고 애초 일주일간 여기서 머물 예정으로 연락을 드렸지만 아쉽게도 미리 받은 선 예약들이 있어서 우리는 1,2일과 4일째만 이집에서 묵게 되었다. 4일째 밤에는 주인아저씨가 오셨고 직접 담은 술인 아와모리와 막걸리 비슷한 발효주와 바비큐 가든파티를 해주셨다. 배불러서 도저히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었던 기억이 난다.
 
첫날밤, 겨우 오후 4시 30분부터 짧은 시간 동안의 오키나와 탐방에도 온 몸은 땀범벅이 되고, 새벽부터 시작된 여정에 몸이 파김치가 되어 샤워하고 나니 피로가 급습한다. 동네 마켓에서 사온 여러 가지로 교류회 겸 술파티를 했지만 몇 잔 나누지도 못하고 다들 잠자리에 들었다.
 
 

<첫째, 들째날과 네쨋날에 묵은 민박집>
 

<민박집 간판>
 
오키나와는 지금 제주도가 거의 잃어버린 푸른 밤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열대야로 인해 에어컨 없이 잠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 5월 13일
 
새벽 5시30분경 눈을 뜨자 그나마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나마 그뿐. 태양이 솟아오르는 순간 기온도 솟구쳤다. 다행인 것은 오키나와가 한국과 경도가 같아서 (강원도 원주 정도의 경도임) 시간대가 같다는 것. 오키나와가 동경정도의 경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새벽 4시30분부터 지글지글 댈 것이 틀림없겠지... 그래도 밤이 빨리오니 그것도 그 나름대로 괜찮은걸까...? 아무튼 뒤죽박죽된 생각이 정리도 되지 않을 때 6시30분 숙소를 출발, 어제의 그 버스로 오늘의 목적지인 이에지마로 향했다. 아침은 버스안에서 간편 도시락.
 
버스 안에서 종환형님이 밤새 내 콧소리에 잠을 설친 바람에 죽겠다고 난리를 쳤다. 코골이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피곤할수록 콧소리는 세다. 그렇다면 그만큼 어젯밤 난 푹 잠들었다는 것... 흐흐흐. 사알짝 미안한 마음에 오늘 밤부터는 내가 방을 바꾼다고 했다. 그런데 형님이 딴 방에 가고 최용범 부회장을 내 방에 보내겠단다. 모쪼록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라~!
 
오늘은 통역으로 가토씨가 추가로 붙었다. 히로유키씨처럼 도쿄에서 오신 분인데 한국대통령 방일 시 일본수상과의 회동석상 동시통역을 전담할 만큼 일본 최고의 통역가라고 하신다. 중년의 여자분이신데 넉넉하신 인상과 웃음이 해맑은 분이었다. 우리와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고 무료 자원봉사로 참여해주셨다. 너무나 고마웠다.
 
이에지마는 오키나와 북서쪽에 위치한 부속도서로 면적은 우도의 2배 가까이 되는 섬이란다.
 

<이에지마섬 위치>
 

<이에지마 가는길: 모토부항에서 페리를 타고 들어간다, 편도 30분, 왕복표를 끊기때문에
돌아오는 표를 잘 챙겨두어야 한다>
 
머릿속에서 별 쓸데없는 생각들이 명멸한다. 오키나와 전체면적은 제주도의대략 1.5배, 그러나 오키나와 본섬의 면적보다는 제주도가 대략 1.5배 크다. 제주도의 인구는 현재 55만, 오키나와 전체 인구는 110만으로 제주도의 딱 두 배다. 제주도보다 작은 오키나와 본섬의 인구는 대략 80만이니 인구밀도가 엄청난 거다. 그러나 평야가 많아 땅이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 흠... 산이 별로 없는 오키나와의 특징인가보다.
 
이에지마보다 큰 추자도는 제주도 부속도서로 행정구역상 정해지기는 했지만 추자도 주민들은 자신들이 제주도민임을 거부한다. 전라남도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래도 제주 삼다수만큼은 무료로 받고 싶어하다니!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라구! 예전 김태환 도지사소환운동으로 강정주민 4명이 추자도에 서명을 받으러 갔었을 때 추자도민들은 찾아간 강정주민들을 거지취급하며 밥도 안 팔아주고, 여관방도 내주지 않아 노숙하며 쫄쫄 굶다가 다음날 되돌아 온 적이 있었다고 했다... 별별 잡다한 생각이 떠오를 때쯤 버스가 항구에 도착했다.
 
 에메랄드빛 바다에 배가 떠가는 순간 머릿속의 망상들은 이내 깨끗이 자리를 비웠다. 군데 군데 얕은 바다에서는 산호초들이 섬을 만들며 머리를 내밀고 있었고, 이미 만들어진 무인도들도 간간이 보였다.
 

<이에지마 가는페리에서 볼 수 있는 산호초: 위성사진으로 보니 더 멋있네요>

<이에지마항 양쪽으로 이렇게산호초가 자라고 있답니다. 페리에서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와우~! 산호는 지구상에서 지형을 바꾸어내는 가장 위대한 동물이다! 수천년이 지나면 여기저기 섬들이 더 많이 생겨나겠지.
 
인간이라는 종족이 최근 100여 년 전부터 기계문명을 일으켜 지형을 바꾸기 시작했다지만 업적으로 따지면 산호에 비할게 못된다.
 
산호초는 사실 산호 혼자만의 힘으로 완성된 것도 아니다. 산호가 만들어낸 단단한 석회질 골격위에 식물들이 자라나며 죽어 흙이 쌓이고, 환태평양 화산대의 활동으로 융기까지 더해져 지금의 섬들이 된 것일 테다. 지구와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동식물들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낸 것이 산호초다. 오키나와 본섬의 절반도 그렇게 산호초로 이루어진 섬이라고 했다. 지구상에 가장 풍족한 질소와 탄소와 산소를 동식물들이 유·무기물로 저장해내어 섬을 만들어 내다니, 이 얼마나 완벽한 자연의 산물이란 말인가!
 
아! 그저 저렇게 존재하게 놔둘 수만 있다면.
 
애초에 땅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다. 생명체는 살아 있는 동안 삶의 반경, 즉, 영역만 있을 뿐이었다.
 
지구상의 생명체 중 인간만 유일하게 땅의 임자를 정한다.
 
그럼 땅 속은 누구의 소유? 지표상의 땅의 면적 경계선에서 수직으로 선을 죽 아래로 이어나가면 결국 지구 중심 한 점에 모인다. 아무리 거대한 대륙이라 해도 지구 중심에선 한 점이 되고 만다. 허망한 것이다.
 
그럼 하늘은 누구의 소유? 자신의 소유인 땅에서 수직으로 선을 무한히 연장하면 지구를 중심으로 한 모든 우주가 지구의 소유가 되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면 이런 생각도 인정받겠지만 아쉽게도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변두리 중에서도 한참 변두리다.
 
어차피 이 우주가, 태양계가, 지구가 영원하지도 않다. 평균적이나 계산적으로 몇백만년에서 몇억년에 이르는 수명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들은 있다. 하지만 내일 아니 지금 당장에라도 소멸할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있다. 지금 우리 눈에 비치는 별들도 몇십년 몇백년 몇억년 걸려 우리 눈에 도달하여 비추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미 소멸되고 없는 존재일수도 있다. 이런 허망하기 그지없는 물질에 대한 소유, 특히 땅에 대한 소유에 집착하는 것이 전쟁의 시작이다.
 
‘자유’는 그냥 존재의 자유, 사유의 자유에서 그쳐야 했다.
 
소유의 자유를 인정하는 자본주의 방식이 전쟁의 화근이다. 이데올로기에서 말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결국은 국가의 소유를 인정하므로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다. 소유는 더 큰 소유를 지닌 존재에게 군림을 허용한다.
 
말로는 자유라고 쓰지만 결국 속박을 의미하는 단어. 자유민주주의.
평등이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족쇄로 돌아오는 단어. 사회민주주의.
 
언제가 되어야 무소유의 원칙이 실현되는 세상을 볼 수 있을까. 무소유를 설파한 석가모니는 가르침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후학들에게 실천의 길은 너무도 멀다.
 
인류의 또 다른 스승 예수(저는 개인적으로 모하메드도 동일 인물이라고 봅니다만)는 가난이 천국으로 가는 최고의 열쇠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역시 무소유다. 그러나 교단이 성립되는 순간 소유에 집착한다.
 
대스승들의 가르침을 실천하자니 거리가 너무도 멀다. 그래도 포기하자니 양심에 찔리고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냥 앞의 수식어 다 떼고 민주주의만 보고 살자. 그나마 내가 택할 수 있는 최고의 타협점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침나절보다 더욱 복잡한 잡생각들로 머리가 꽉 찰 때 쯤 어느새 이에지마에 배가 도착했다.
 
이에지마 역시 산호초 섬이라서 다른 산호섬처럼 마라도나 가파도같은 모습일 것이라 상상했는데 웬걸? 가운데쯤 뽀족한 봉우리가 하나 있다.
 
종환형님이 “제주도 축소판 닮다!” 라고 외쳤다.
어찌 보니 편편한 섬 가운데 솟아난 봉우리가 그리 보이기도 했다.
 

<미니어추어 제주도 같이 보이는 이에지마>
 

<페리 위에서 강정참가단 한 컷~! 왼쪽부터 김봉규, 최용범, 김종환,그리고 나.
사진하단에 찍힌 손꾸락은 누군지 모름...그렇게라도 강정팀에 끼고 싶었나...?>
 
우리의 여정에 이에지마가 선택되어진 이유는 오키나와에서도 미군기지에 대한 저항 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이 이에지마이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반전평화자료관’이었다.
 
이 자료관은 이에지마에서 반기지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하신 아하곤 쇼고 선생이 평생에 걸쳐 싸우며 모은 자료를 전시한 사설자료관이다.
 

<반전평화자료관 입구>

<반전평화자료관 사무실>
 

<반전평화자료관> 
 
선생이 전쟁이 끝난 후 섬에 돌아왔을 때 자신의 가옥과 땅이 미군기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섬에 돌아올 때 선생은 자신의 땅에 농민학교를 설립하는 꿈을 갖고 돌아왔지만 땅을 돌려받지 못하여 천막생활을 하며 농성생활을 시작하였고, 살 집을 잃은 섬 주민들이 천막 농성에 동참하며 투쟁의 불씨를 키워갔다.
 

<아하곤 선생이 설립하려고 했던 농민학교 위치를 가르키고 있다. 섬 가장자리 분홍색반점이 선생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후 오키나와 전체가 미군정 관리하에 있었기에 일본국의 법이 적용되지 않았으며, 미군은 강제로 빼앗은 땅을 돌려 줄 의향이 없었다. 이에지마는 미공군이 폭격훈련을 하기 위해 건설한 훈련용 비행장이 있었다. 귀를 찢는 듯한 제트소음과 폭격에 시달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선생은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일념으로 재산을 털어 카메라를 구입했다. 필름 구매와 현상은 오키나와 본섬으로 나가야만 가능했다. 걸어서 이동하고 쪽배를 타고 나갔다 오는데만 4~5일이 걸리는 불편을 무릅쓰고 평생에 걸쳐 쉬지 않고 투쟁하고 기록했던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섬주민들은 나중에는 훈련장에 떨어진 폭탄 파편을 줍거나 불발탄을 해체하여 고물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연명했다고 한다. 그러다 불발탄이 터져 2~3명씩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고 불구가 되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러던 어느날 훈련장 한가운데 3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폭탄이 처박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워보니 모의 핵폭탄이었다.
 

<자료관 내부 모습>

<당시 모았다는 엄청난 양의 각종 탄피: 당시 섬주민들은 이것을 모아 생계수단을 이었다고 하다>

<불발탄이 터져 다치거나 죽은 분들도 많았다고 한다. 사진을 세세하게 찍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밭 한가운데서 모의 핵폭탄을 발견해 촬영한 사진>

<당시 수거한 모의 핵폭탄>

<징용에 끌려가기 싫어 스스로 검지 손가락을 자른 이에지마 주민: 나중에 반기지투쟁에 적극적이셨다고 한다>
 
그 후로는 폭탄을 수거해서 파는 것을 포기하고 폭격중단 시위를 시작했다. 베트남전 기간내내 선생은 미군부대 앞에 가서 “당신들은 강하다. 그리고 이겼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는가. 당신들이 죽인 사람들 수를 부모님께 사실대로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그 것을 알게 되면 당신부모와 아이들이 행복해 질 수 있겠는가.” 끊임없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고 한다.
 
철저한 사유재산 제도하에 있던 미군은 섬주민들이 하나같이 유서 깊은 땅을 팔기를 거부하자 주민들의 토지를 수용하거나 소유권이전을 못한 채 임대형식으로 땅을 쓰고 있었는데, 몇천평 넓이의 토지에 대한 1년 임대료가 하루 밥값에도 미치지 않는 액수였다고 했다.
 
그러나 꾸준히 반환을 요구하여 조금씩 땅을 되찾기 시작했고 한 때 섬의 60% 이상이 미군기지 였는데 지금은 섬의 70% 정도를 민간이 돌려받은 상태라고 한다. 처음 미공군이 건설한 활주로는 세 개였지만 그 중 하나는 완전히 경작지로 바뀌었고, 하나는 민간공항으로 바뀌었으며, 섬 가장 서쪽에 위치한 활주로와 그 일대는 여전히 미군이 훈련장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이 부분 설명은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열성적으로 설명해주시는 2대 관장인 아하곤 선생의 따님 자하나 에스코 선생님과 열심히 통역중인 히로유키씨>

<열심히 공부하는 척 받아적기에 여념없는 한국참가자들~>
 

<사실은 이렇게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당시의 미군은 인의를 알았던 것 같다고 2대 관장이신 아하곤 쇼고 선생의 따님인 자하나 에스코 선생님이 말했다. 선생은 이미 세상을 하직한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의 미군은 말이 아예 안 통한다며 더욱 기지를 넓히려 하고 있고 훈련도 최근 수십배로 늘었다고 했다. 몇년전만 해도 1주일에 1~2시간 훈련이었던 것이 최근에는 하루에도 십수시간씩 훈련한다고 했다.
 
또한 이에지마 주민들도 예전처럼 투쟁하지 않으려 한다는 씁쓸한 말도 남겼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본토나 본섬에 가서 공부를 하고 귀향하는 비율이 30%를 넘게 되었다며 희망은 젊은이들이 계속 이 섬에 살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도 남겼다.
 
아하곤 쇼고 선생의 사진과 말씀이 한쪽 벽면을 거의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런 말이었다. “전쟁의 최대의 벗은 무관심이요, 평화의 최대의 적도 무관심이다”
 

<한쪽벽을 차지하고 있는 아하곤 선생의 사진과 남긴 명언>
 
관장님은 몸이 아파 병원에 갔었지만 우리가 당도했다는 전갈에 진료를 포기하고 되돌아와 정열적이고 성의 넘치는 설명을 해주신 터였다. 우리 일행은 관장님께 싸인을 받고, 책도 사고, 선물을 증정한 뒤 반전평화자료관과 헤어져 섬 가운데 있는 봉우리로 향했다. 강정마을에도 저런 자료관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는 참가한 강정주민 모두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종환형님이 티셔츠에 관장님 친필 싸인을 받고 있다>
 

<기념품 증정>
 

<단체사진 한장 찰칵~!>
 
봉우리에 오르기 전에 아하사라고 불리는 작은 석회동굴을 탐사했다. 전쟁당시 이 동굴에 촌민 150여명이 숨어있었는데 미군에게 포로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방위대가 폭뢰로 자폭하여 대부분 죽었다고 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20여명으로 1971년경 증언에 의해 다시 동굴이 발굴되었다 한다. 폭뢰로 형태가 많이 허물어진 탓인지 도무지 150여명이 숨기엔 협소한 동굴로 보였다. 하지만 동굴 안에는 당시 살았던 집기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동굴내부로 들어가보는일행>

<동굴안에 생활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이에지마의 유일한 산인 구슈쿠산 봉우리에 올라보니 작은 이에지마가 사방으로 다보였다. 정말 작은 제주도 백록담에 오른 기분이 들었다. 도중에 여기저기서 수학여행 온 중고등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하나같이 인사성이 밝았다. 말을 붙이면 명랑하게 대답도 잘 해줬다.
 

<해발 124m에 불과하지만 내려다보는 개방감이 뛰어난 구슈쿠산>

<모처럼 시원한 바람을 만끽할 수 있다. 내려가면 역시 열탕지옥이 기다린다>
 
그리고 해안으로 이동하여 전쟁 당시 1200여명이 숨어 지내던 해안동굴을 찾아갔다. 이 동굴에 숨었던 주민들은 모두 살 수 있었는데, 주민 중 한사람이 하와이에서 살다온 사람으로 ‘미군은 민간인에게는 결코 총을 쏘지 않는다’고 설득한 덕분이라고 한다. 동굴을 빠져 나오려는데 한 무더기의 고등학생들이 들어오며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을 한다. 어쩌면 일본학생들의 오키나와 수학여행은 철저히 평화기행이라는 목적이 있는 듯 했다.
 

<해안동굴 내부 전경, 꽤나 넓다>

<동굴안에 전시된 돌: 임산부가 이돌을 들었을때 무겁게 느껴지면 딸이고 가볍게느껴지면 아들이라고 한다
- 일반 관광객의 호기심을 끌만한 아이템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에지마의 북쪽에 있는 유일한 용출수가 나온다는 절벽으로 갔다. 용천전망대라고 한자로 씌어 있는 곳인데 일본식 발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색깔이 매우 푸르러 기분이 상쾌해졌다.
 

<섬의 크기에 비해 우람한 절벽. 아랫길 끝에 가면 용천수가 있다고 한다. 이에지마 유일의 용천수로
옛날엔 이 물로 섬주민 전체가 먹었다고 전해진다>

<파란 바닷물과 해조류>
 
돌아오기 위해 도착했던 이에지마항으로 가는 길에는 검은소들이 유독 많이 보였다. 그러자 김봉규가 “제주도도 흑우가 있는데 여기도 흑우가...! 혹시 농업기술원에서 멸종된 흑우를 유전자 배양을 통해 복원했다고 하더니 여기서 가져가서 한 거 아니꽈?” 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유전자배양 등등 따위보다 훨씬 손쉬운 길처럼 보이기도 했다. 생김새가 어김없는 제주도 흑우였기 때문이다.
 

<이에지마항에 전시되어 있는 흑우 모형. 기르는 소는 버스안에서 달리는 도중이라 찍지 못했다>
 
오키나와 본섬에 돌아와 민박 숙소로 향하기 전 코끼리코 모양의 절벽이 있다는 관광지를 찾았다. 절벽 위는 만명이 앉을 수 있다는 ‘만좌모’라는 이름의 평지가 펼쳐졌으나 그다지 넓다는 느낌은 없었다. 제주도도 기암절벽이 많은 곳이라서 이러한 침식해안절벽은 그저 그런 감흥이었다고나 할까. 다만 절벽위에 자생하는 식물들이 어디서도 보기 힘든 수종들이었고 독특한 모양으로 풍화된 바위의 마모된 형태,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 남은 두 바위에 새끼줄로 이어 신사같은 주술적 의미를 부여한 모습들이 인상이 깊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는 꽤나 유명한 관광지라고 한다. 주차장에서 만난 대부분의 렌트카는 한국인 관광객이었고 단체관광객은 어김없이 중국인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서는 수학여행 온 일본학생들을 만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연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코끼리코처럼 보인다는 절벽. 이름이 기억 안납니다~~::>

<독특한 나무들>

<녹아내린듯 보이는 풍화된 바위형상>

<신사처럼 꾸민 바위>
 
오늘은 제주도에서 고광성 제주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형님이 합류하기로 한 날인데, 이 분이 어딜 다니는 걸 싫어하시는 분이라 초행길이 무척 걱정되어 온종일 연락을 취하려 해도 전화기가 꺼져 있어 갑갑증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녹색연합 신수연씨 역시 오늘 오키나와에 합류키로 한 날이어서 신수연씨에게 광성형님 인상착의를 최용범 부회장이 잘 설명해 두었기에 어쨌든 무사히 민박집으로 왔겠지 싶었는데 저녁 7시가 넘도록 두 사람이 당도하지 않았다.
 
밤 8시 다 되서야 두 사람이 도착했다. 설마 서로 몰라서 못 찾아서 늦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만난순간 서로 알아보는 데는 문제없었지만, 광성형님이 입국심사 시 심사용지 뒷면 기재 내용 중 일본 또는 일본 이외의 국가에서 범죄사실이 있었는지 여부를 묻는 문항에 ‘예’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통과시켜주지 않아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1년 이상의 유죄가 아니면 기재할 필요가 없었는데 광성 형님은 사회운동 경력으로 인한 실형도 아닌 벌금형을 의식하여 정직하게 기재했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덕분에 말 안주거리가 풍부한 술자리가 늦게까지 펼쳐졌다. 히로유키씨는 아버지 고향이 오키나와지만 오키나와가 싫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더워서!’라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잘생긴 내 얼굴이 태양 빛에 타는 것은 더 싫다!’라는 이유까지 덧붙였다.
 
한바탕 왁자지껄한 밤이 무르익어갔다. 이제 한국 평화기행단은 10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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