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래간만입니다. 선배님도 모르시겠지 하고 연락 드리고 있습니다. M선배님이 지난 달에 돌아가셨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 5월 10일 밤, 오사카 오현고등학교 총동문회 한승철 총무로부터 온 휴대폰 이메일이었다. 정말 깜짝 놀라서 한승철 씨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5월에 오고 총동창회 총회가 있어서 엽서를 보냈는데 회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M선배님댁에 전화를 했더니 4월 10일 날 돌아가셨다는데 가족장으로 장례식을 치뤘다고 합니다."

한승철 씨와는 동문의 선후배 관계는 아니지만 필자보다 나이가 약간 밑이고 평소 잘 알고 있었다. 알려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마치고 바로 M선배댁에 전화를 했으나 부재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전화를 했더니 선배님 부인이 받았다.

"4월 10일 아침 혼자 주무시는 2층 방에서 안 내려 오시기에 방에 가보니 돌아가셨었습니다.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무데도 연락을 못하고 가족장으로 치뤘습니다."

이 날 필자는 쿠마모토 지진피해 현장에 2박 3일 예정으로 자원봉사 가는 날이었다. 간단히 조의를 표하고 갔다 와서 연락 드리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쿠마모토 가는 비행기 속에서 M선배를 생각하니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마지막 헤어짐에 대해 납득할 수없는 비애가 난기류에 흔들리는 비행기의 덜컥거림처럼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쿠마모토에서 돌아온 다음 날인 14일 저녁 제일중학교 총동창회장과 M선배댁에 모신 빈소를 찾아가서 조문을 했다. 그 자리에서 부인은 10년 전에 M선배가 수첩에 쓴 유언을 보여주었다.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하고 헌체를 하겠다고 써있었다. 헌체는 생전에 수속을 밟아야 하기 때문에 안되고 주인 유언도 있어서 가족장으로 치뤘다고 했다.   

M선배는 제주제일중학교 3회 졸업생으로서 14회인 필자보다 11년 선배이시다. 일본 오사카에서 <재일본 제주제일중학교 총동창회>가 창립돼서 금년 20회를 맞는다.

그 동안 만년 총무직을 맡으면서 알았지만 무척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평소에 그렇게 가깝게 지냈는데 왜 마지막 가는 자리에서는 내 탓은 아니지만, <나 몰라요.>라는 식으로 끝내야 하는지 이 모순에 대해 심한 혐오감에 빠졌다. 

이러한 예는 지난 1월에도 있었다. 1월 24일 원조 제주향토 요리점으로 잘 알려진 <기요시> 강신생 여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중 출신 K씨가 돌아가셔서 오늘 오쓰야(장례식 전날 밤 의례)가 있다는데 장소가 어디냐는 물음이었다.

K선배는 일중 4회였다. 필자는 그 선배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몰랐었다고 하자 일중 총동창회에서도 몰랐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라는 기색이었다.

M선배와 K선배는 중학교는 일중을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오고를 졸업했다. 오륙십년 전, 당시 제주에서는 명문 중고교라고 해서 이러한 예가 많았었다. 필자는 오고 총동창회 총무인 한승철 씨에게 전화를 하고 장소를 물었다.

이쿠노에 있는 장레식장었는데 <기요시>와는 엎드리면 코 닿을 곳이어서 <기요시> 강신생 씨한테 장소를 알려주면서 서로 쓴웃음을 짓곤했다.

이렇게 제대로 연락이 안되는 것은 유족들이 가족장으로 치른다면서 연락을 일절 안했지만, 그래도 주위가 알게 되고 아는 이상 아무리 가족장이라지만 모른 척하지 못하니까 참석하면서 빚어지는 일이다. 

하물며 동문들끼리 외국에서 조직한 총동창회는 교과서처럼 판에 박힌 회칙,  회원들간의 친목과 유대는 물론 관혼상제의 참석과 부조금까지 자세히 명기되는데 참석하지 않는 것은 회칙 위반이고 예의 상 어긋난다.    

필자도 안 이상 모른 척 할 수없었다. 일중 총동창회 임원 몇 사람에게 연락했지만 갑작스런 일이기 때문에 마침 일요일이고 모두 볼일이 있어서 결국 혼자 참석했다.

솔직히 혼자 참석해서 잘했다고 생각했다. 큰 장례식장 홀에는 가족 몇 분과 오고 총동문회회장과 총무 그리고 친구 몇 사람이 있었다. 이날은 보기드문 한파로 일본열도가 냉장고 같은 날씨였다.

그 추위보다도 더 추운 마음의 한파가 가슴을 파고들었으며 쓸쓸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였지만 필자는 분향을 마치고 유족들과 적당히 눈 인사만 나누고 바로 나왔다.

장례식에 있어서 한일 양국의 국장, 사회장, 회사장 등은 거의 비슷하나 가족장은 엄청난 차이기 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이 치르는 장례식은 가족장이라는 명칭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되었다.

부고를 정식으로 알리고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조화를 보내기도 하고 아니면 조의금을 준비해서 상가를 찾아가서 분향을 하고, 간단히 마련한 음식들을 들면서 고인 이야기나 오래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정을 나누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족장은 그렇지 않다. <가족장>이라는 장례식 종류의 명칭도 약 15년 전까지는 생소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시민권을 얻은 상태이다. 그 전까지는 그냥 장례식이었다. 이러한 예는 동포사회에도 급속도고 파급되고 있다.

가족장인 경우에는 친척도 아니고 알고 지내는 사람은 물론 친척도 직계 가족이 아니면 연락도 안하고 거의가 정말 당가족들만 치르는 장례식을 말한다. 이럴 때에는 아는 사이라도 참석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예의이다.

그런데 그후가 문제이다. 가족장이니까 참석은 안했지만 그러면 언제까지 모른 척 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미리 알았던 나중에 알았던 빈소에 조문 한번은 가야 한다.

사회에 공헌을 하고 잘 알려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러한 조문을 생략하고 후에 <추도회> 등을 개최할 때 참석하면 장례식과 다름없으니 납득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난감하다. 

사전에 유족들에게 언재 가고 싶다고 연락을 해서 가면은 유족도 찾아간 조문객을 맞이 해야 한다. 이러한 예도 한두번이면 괜찮은데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 심정이니 계속 되풀이 된다. 새로운 번거로움이 시작이다.

돌아가신 본인이나 유족들은 장례식 때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나 아니면 가족들끼리 마지막 가는 길은 정말 직계 가족만이 모여서 오손도손 추도하고 싶어서 가족장을 선택했을런지 모른다.

유족들을 떠난 객관적 입장에서 생각해보드라도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남들이 고인에 대한 추도와 그 의례를 공유할 수 있는 장소는 역시 장례식 날과 그 전야(前夜)이다.

이곳은 사자(死者)와 생자(生者)들의 마지막 만남의 장소이고, 사자가 생자들에게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남겨 준 마지막 유산의 공간이기도 하다.  

필자도 장례식은 직계 가족들만 모여서 치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모두가 죽은 나 때문에 번거로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기 두 선배의 계속된 가족장의 쓸쓸함과 부조리를 생각할 때 새로운 번거로움과 모순이 되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정의는 아직 솔직히 미완(未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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