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오(희곡작가)

제주는 바람의 섬이다. 예로부터 풍재(風災), 수재(水災), 한재(旱災)의 삼다를 말할 때에도 바람을 으뜸으로 쳤다. 제주의 바람은 산과 바다의 합작품이다. 거센 물이랑을 만들며 바다와 함께 달려온 바람이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에 부딪쳐 사방으로 진로를 바꾸는 것이 제주의 바람이다. 천연두의 신 ‘호구대별상서신국마누라’가 침입해 섬뜩한 병마를 퍼뜨릴 때에도 바람을 타고 섬 곳곳을 파고들었다.

이처럼 제주의 바람은 따사로운 훈풍이나 보드라운 순풍보다는 서슬 퍼런 칼날을 뽐내며 길길이 망나니 춤을 추어대는 희광이의 칼바람이 많았다. 강요배 화백의 ‘팽나무와 까마귀’를 보면 제주의 바람이 어떤 것인지 곧바로 느끼게 된다. 북풍에 시달려 남으로 휘어진 늙은 팽나무가 제주가 거쳐 온 지난한 역사라면, 그 발밑에 내려앉아 비바람을 피하는 날개 젖은 까마귀가 제주토박이들인 셈이다.

바람 타는 섬이기에 제주의 옛사람들은 그것의 주재자를 섬겼다. 영등신, 굿판의 사제인 심방은 ‘영등대왕’이라고 하고, 심방을 통해 발원하는 단골(신앙민)들은 ‘영등할망’이라고 부르는 바람신의 정체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는 돌풍처럼 걷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품고 있다. 너무나 많은 영등신의 본초(本初)가 전해지고 있어 쉬이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영등신의 내력에 대해 기록한 문헌자료는 심재 김석익의 해상일사(海上逸史)와 열두 명의 지식인들이 1953년에 조직한 담수계(淡水契)의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가 있다. 두 자료에 소개된 영등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일치한다.

“당나라 대상(大商)의 배가 제주바다에서 난파되었는데 죽은 시신이 네 토막으로 흩어져 두개골은 어등개(구좌읍 행원리)로 떠오르고, 손과 발은 각각 고내, 애월, 명월 포구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해마다 정월 그믐에 온갖 바람이 서해로부터 불어오면, 이는 영등신이 오시는 것이라 하여 어촌 사람들이 무당을 불러 들에서 굿을 하였다.”

한편 구비전승으로 이어지는 굿판의 영등신은 이와 다른 사연을 지닌다. 영등굿판의 사제인 심방들은 영등신을 부를 때 ‘영등대왕’이라고 하고, 그들을 통해 발원하는 단골들은 주로 ‘영등할망’이라고 한다. 이처럼 영등신의 내력은 엇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영등신의 본향으로 불리는 한림읍 한수리 영등당본풀이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워낙 본풀이라는 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속성 탓에 심방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영등당본풀이의 영등신은 ‘황영등’이라고 불리는 사례와 ‘전영등’이라고 불리는 사례로 나뉜다. 황영등을 주인공으로 하는 본풀이에서는 그가 귀신도 사람도 아니며 홀연히 나타나 용왕국에 터전을 잡은 신이라고 한다. 전영등이 주인공인 이야기에서는 유대감 집안의 글방선생으로 살다 죽은 뒤 혼령의 몸으로 유대감에게 보은한 사람이라고 전해온다. 두 가지 이야기 중에 황영등의 사연을 들어보자.

“옛날 한수리 어부들이 뱃일을 하다 풍랑을 만나 웨눈베기땅에 좌초되었다. 한 발 앞서 나타난 황영등이 웨눈베기들을 따돌린 뒤 어부들이 살아 돌아갈 방도를 알려준다. 어부들은 황영등의 가르쳐 준대로 ‘개남보살’이라는 주문을 외며 배를 띄웠다. 순풍을 타고 고향 바닷가에 다다른 어부들은 배가 포구에 닿기도 전에 안도한 나머지 주문을 그쳤다. 그러자 난데없이 폭풍이 불어왔고 어부들은 다시 웨눈베기땅으로 순식간에 휩쓸려갔다. 이번에도 황영등이 나타나 다시 도움을 주니 어부들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황영등의 소행을 알게 된 웨눈베기들은 황영등을 잡아 죽여 바다에 던져버렸다. 세 토막으로 잘린 황영등의 시신은 파도에 떠밀려 제주바다까지 다다랐는데 머리는 우도, 팔다리는 한수리, 몸통은 성산포바닷가로 흩어졌다고 한다. 천만다행이도 목숨을 구한 어부들은 재차 자신들을 살려줄 때 황영등이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황영등의 유언은 해마다 2월초하루가 되면 자신을 잊지 말고 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뒤로 제주에서는 영등굿을 치르게 되었는데, 정월그믐날에는 우도, 2월초하루에는 한수리 비꿀물, 성산포에서는 2월초닷새에 굿이 펼쳐진다. 황영등은 한수리, 우도, 성산포에 각각 처가 있어 삼첩을 둔 신이다.”

황영등의 사연 말고도 여러 본풀이에 등장하는 영등신은 다소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공통적인 점은 남성성이 강한 ‘영등대왕’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굿판을 벗어난 민간의 속신에서 ‘영등할망’이라고 불리는 여성신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답을 먼저 말한다면 어느 것도 틀린 것이 없다. 신화의 영역에서는 남성성이 강하고, 전설의 영역에서는 여성성이 강한 차이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과연 신성한 존재에게 성구별이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수수께끼와 만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신은 기본적으로 창조의 권능을 지니고 있다. 우주창조, 자연창조, 생명창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창조하는 신성은 사람으로 치면 여성도 남성도 아닌 존재다. 그렇다고 중성이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 성을 다 갖춘 양성구유(兩性具有)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종종 제주를 일러 여신의 섬이라고 말하는 자칭 전문가들이 많은데, 이야기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만으로 남신과 여신을 가르는 시각은 자칫 신화해석에 큰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 신이 지니는 양성구유의 권능은 워낙 중요한 수수께끼이니 다음 기회를 빌려 이야기하기로 하고 다시 영등신 이야기로 돌아가자.

서로 엇갈리는 영등신의 이야기는 영등신이 단수인가 복수인가 하는 수수께끼를 우리 앞에 던지기도 한다. 제주의 영등신 이야기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아마도 며느리와 딸의 사연일 것이다. 영등할망이 제주섬에 들어오는 날 날씨가 맑고 화창하면 딸을 데려온 것이고, 비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리면 며느리와 동행한 것으로 여기는 민간의 이야기가 있다.

한편 영등굿판에서 심방들이 서창하게 부르는 노랫말 속에는 ‘영등대왕, 영등부인, 영등아미, 영등별캄, 영등좌수, 영등이방, 영등형방, 영등호장, 영등나졸’ 등 그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기 벅찰 정도로 많은 존재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영등할망의 며느리와 딸, 영등대왕이 거느리는 수많은 존재들은 신일까 아닐까? 그리고 본풀이 속에 등장해 영등을 죽였다는 괴수 웨눈베기는 어떤 존재일까?

나는 이 문제의 해답을 바람에서 찾으려고 한다. 계절풍과 지역풍, 수많은 바람이 잦은 제주를 보시라. 제주토박이들은 이렇게 많은 바람을 하나하나 구분해 아름다운 이름들을 붙여주었다. 보잘 것 없이 작은 섬처럼 보이지만 제주 안에서도 ‘동촌(동부)과 서촌(서부)’, ‘산앞(산남)과 산뒤(산북)’가 있어 말이 다르고, 풍습이 다른 것처럼 바람 또한 지역과 계절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먼저 북극성을 좌표로 삼는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른 바람을 보면 동풍은 샛ᄇᆞ름, 서풍은 갈ᄇᆞ름, 남풍은 마ᄑᆞ름, 북풍은 하늬ᄇᆞ름이라 부른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다시 간방(間方)에 따라 북서풍을 섯하늬ᄇᆞ름 혹은 섯갈하늬ᄇᆞ름, 북동풍을 동하늬ᄇᆞ름, 동북풍을 놉름 또는 놉하니름, 동남풍을 동마름이나 든샛름이라고 부르고, 서남풍을 늦름, 든마름, 섯마름 등으로 불렀다.

바람의 세기에 따른 구분이 있는가 하면 특정지역에서만 부는 지역풍을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오랫동안 세게 부는 바람은 궁근새, 이와 반대로 오랫동안 약하게 부는 바람은 지름새, 파도를 일으키는 동풍을 겁선새, 시원하게 불어오는 남풍을 건들마, 산바람을 산두새, 회오리바람을 도깽이주제, 태풍을 놀ᄇᆞ름 또는 노대ᄇᆞ름, 돌풍을 강쳉이, 실바람을 멩지바람, 국지풍을 ᄂᆞᄅᆞᆺ이라고 부른다. 이밖에도 수많은 바람이 남아있지만 이 정도로 그치기로 한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제주바람의 종류, 영등달이면 영등신과 함께 제주를 찾아오는 날아든다는 수많은 존재들. 눈치가 빠른 이들은 벌써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다. 영등신을 다룬 신화와 전설 속의 존재들은 바로 바람을 의인화한 것이다.

어부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준 영등대왕이 순풍의 신이라면 풍랑과 돌풍을 일으키는 웨눈베기는 폭풍의 신이다. 마찬가지로 영등할망의 딸이 따사로운 봄바람의 신이라면 며느리는 매서운 겨울바람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제주의 바람신은 영등대왕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룬 복수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제주의 바람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리스신화 속의 바람신도 제우스 하나가 아니다. 폭풍을 일으키는 티폰, 바닷바람의 신 포세이돈, 계절풍의 신 아네모이도 있다. 특히 아네모이는 하나가 아니다. 동풍의 신 에우로스, 서풍의 신 제피로스, 남풍의 신 노토스, 북풍의 신 보레아스로 나뉜다. 이들의 이름에는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을 일으킨다는 뜻이 담겨 있다.

수많은 바람을 다스려야하는 복수의 영등신, 그들에게 평온을 기원하는 제주의 영등굿은 주로 해안마을에서 펼쳐지고, 드물게는 구좌읍 송당리나 남원읍 한남리 등의 중산간 마을에서도 치러진다. 제주의 영등굿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칠머리당영등굿이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지도 오래 되었고, 최근에는 해녀문화와 더불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올라 내외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굿이란 것이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정도로 복잡한 절차로 이루어지는 탓에 굿판에 몇 차례 기웃거린다고 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천만의 말씀이다. 칠머리당영등굿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바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큰 제차를 중심으로 간추리면 초감제, 본향듦, 요왕맞이, 씨드림, 마을도액막이, 영감놀이, 배방선, 지드림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초감제는 제주의 모든 굿에서 가장 먼저 치르는 과정으로 하늘에 굿하는 장소와 시간, 연유를 알리고 모셔야할 신들을 열거하는 과정이다. 본향듦은 칠머리당의 본향당신인 ‘도원수지방감찰관’을 비롯한 여섯 신을 청해 모시는 과정이다. 요왕맞이는 용왕을 청해 모신 뒤 대접하는 대목이다. 씨점은 바다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초석 위에 좁쌀을 뿌려 풍흉을 점치는 과정이고, 마을도액막이는 마을 전체의 액운을 소멸시키는 과정이다. 영감놀이와 배방선은 배를 지키는 선왕신인 영감을 청해 대접한 뒤 바다로 돌려보내는 과정이다. 마지막의 지드림은 어부와 ᄌᆞᆷ수들이 개인적으로 용왕을 향해 백지에 싼 주먹만 한 제물을 바다에 던지는 과정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영감놀이다. 배를 지켜준다는 도깨비신인 영감을 청해 놀리는 영감놀이는 본래 영등굿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치르던 굿이다. 그런데 칠머리당영등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다른 영등굿과 변별력을 가지려고 추가한 것일 뿐이다. 실제 영등굿에는 배방선을 하기 전에 선왕풀이라는 과정을 통해 간단하게 영감신을 대접하는 것으로 그친다. 다른 마을의 영등굿이나 ᄌᆞᆷ수굿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

바람 타는 섬 제주에 영등신이 있고 영등굿이 있다. 바람 잘 날 없는 제주의 최근 모습을 보면 영등달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생현안들이 평화롭게 해결될 때까지 영등굿을 치러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다.

*참고자료

김오진, 조선시대 제주도의 기상재해와 관민(官民)의 대응 양상, 대한지리학회지 43권6호, 대한지리학회

진성기, 제주도 무가 본풀이 사전, 민속원

현용준, 제주도 무속연구, 집문당

제주도 무속자료사전(개정판),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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