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오(희곡작가)

어쩌다 TV를 켜고 채널 탐색을 하며 드라마채널들을 살피다 보면 온통 불륜 커플과 사생아 천지다. 어느 드라마를 봐도 똑같은 내용의 연속이라 도대체 어떻게 구별해야할지 당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아예 TV를 꺼버리곤 한다. 엇갈린 사랑의 파국을 낳는 불륜과 질투가 낳은 복수, 고난을 이기고 출세한 사생아의 친부모 상봉, 너무나 식상한 막장드라마가 반복되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신화시대의 이야기 속에서도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던 해묵은 테마다.

사랑과 질투의 화신으로 유명한 커플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은 당연히 제우스와 헤라일 것이다. 가정의 여신인 헤라는 이미 메티스, 테미스, 에우리노메, 데메테르, 므네모시네, 레토까지 여섯 아내를 두고도 주야장천 바람을 피운 제우스의 일곱 번째 부인이었다. 이렇게 많은 여신을 두고 제우스는 황소로 변신해 에우로페를 유혹했고, 레다에게는 백조로 변신해 접근한 뒤 알을 낳게 했으며, 다나에에게는 황금의 빗물로 다가갔다. 제우스가 염문을 일으킬 때마다 질투로 분기탱천한 헤라의 복수 또한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로 인해 그리스의 신화는 더욱 풍부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발전했으니, 사랑과 질투야말로 인류 최고의 이야깃거리가 아닌가싶다.

그리스에만 사랑과 질투의 치정극이 펼쳐졌던 것이 아니다. 1만8천에 달하는 신들의 섬인데 없을 수가 있겠는가. 제주의 신들도 제우스와 헤라만큼 밀회를 즐겼고, 파국의 결말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해와 달, 바람과 구름을 조정하는 남신과 번개와 안개를 일으키는 두 여신 간의 삼각관계로 빚어진 서귀포본향당의 사연일 것이다.

서귀포시 동홍동 본향 지산국당

서귀포본향당의 주신(主神)인 ‘일문관 ᄇᆞ름웃또’는 홍토나라 홍토철리 비오나라 비오철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제주 한라산 설매국에서 솟아났다고도 하는 해를 부리고 기후를 조절하는 권능을 지닌 신이다. 이미 그의 이름 ‘일문관’에 권능이 담겨 있다.

제우스의 이름이 ‘찬란한 천공’, 다른 지방의 신화 속 무당의 조상신에게 버려진 아이라는 뜻의 ‘바리데기’, 던져진 아이라는 뜻의 ‘던지데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처럼 신의 이름에는 권능이나 출신, 특징 등이 반영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언뜻 들으면 너무나 이국적인 어감을 풍기는 제주의 신들도 이름 속에 권능을 품고 있다. 한라산에서 솟아난 신들은 ‘동벡자하로산또’, ‘남판돌판고나무상테자하로산또’, ‘한거리하로산또’, ‘하로하로산또’ 등 한라산신이라는 자신의 성격을 이름으로 드러낸다. 농업의 신인 자청비의 이름에는 스스로 자청해서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업(業)의 신인 ‘가문장아기’의 이름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탓에 다 떨어진 뒤웅박처럼 시커먼 나무그릇에 밥을 먹여 기른 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심지어는 ‘앞 이망에 햇님이 뒷 이망엔 ᄃᆞᆯ님이 이 산 압은 줄이 벋고 저 산 압은 발이 벋어 황금산 노가단풍 테역단풍 모에단풍 왕대월석 금하늘 ᄌᆞ지멩왕아기씨’라는 너무도 긴 이름의 여신도 있다. 이름이 너무 길어 줄여 부를 때는 ‘노가단풍아기씨’ 또는 ‘ᄌᆞ지멩왕아기씨’라고 부른다. 이런 경우에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서사를 갖춘 신화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 일문관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해를 제 맘대로 부리며 바람 위를 날아다닌다는 일문관 ᄇᆞ름웃또가 어느 날은 천기를 짚어보다가 천 리 만 리 떨어진 곳에 엄청난 미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ᄇᆞ름웃또는 그 여인을 베필로 삼을 작정을 하고 홍토나라 홍토철리 비오나라 비오철리라는 곳을 찾아간다.

홍토나라와 비오나라는 과연 어디일까? 물론 신화 속에 존재하는 상상의 공간이다. 이름으로 유추하면 홍토나라는 ‘서유기’ 속 화염산처럼 열사의 사막 가운데 붉게 솟은 산을 지닌 황무지로 보이고, 비오나라는 ‘백 년 동안의 고독’ 속 언제나 비가 내리는 고장 마꼰도가 떠오른다. 어차피 상상의 공간이니까 다양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런데 신화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 중에는 상상을 실상과 연결 짓는 이들이 더러 있다. 상상의 공간을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곳으로 여겨 유히메로스처럼 자꾸 억지 대입을 하려고 한다. 기원전 3~4세기의 인물인 유히메로스는 ‘성스러운 역사’라는 책에서 인도양에 있는 세 개의 섬에 제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의 신들이 실제로 살고 있었다는 궤변을 주장한 바 있다. 결국 그가 얻은 것은 신화의 사건과 공간을 실제라고 믿는 생각을 일컬어 ‘유히메리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오명뿐이다. 물론 슐리만처럼 트로이를 발굴해 실제임을 밝혀낸 사람도 있기는 하다. 따라서 신화 속의 시공간이나 주인공들을 송두리째 역사적 사실로 믿는 관점도 그릇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거짓과 환상이라고 치부하는 관점도 마찬가지의 오류를 낳고 만다. 신화는 역사적 사실과 환상적 가공이 결합된 이야기이므로 경우에 따라 두 가지 관점을 적절하게 저울질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어쨌거나 제주 신화 속의 상상의 공간인 홍토나라와 비오나라를 찾아간 ᄇᆞ름웃또는 마음에 품었던 여인을 찾아 청혼해 성공한다. 캄캄한 방에서 초야를 치르고 난 뒤에야 신부의 얼굴을 확인한 ᄇᆞ름웃또는 심장이 멎는 것처럼 아연실색한다. 자신과 평생을 약속한 미모의 여인은 간데없고 못생긴 여자가 부인의 자리에 있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미모의 여인은 지산국이었고, 언니인 못생긴 고산국이 동생의 자리를 가로챈 것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할 수 없었던 ᄇᆞ름웃또는 지산국과 함께 청구름을 타고 제주로 도망친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고산국도 바람을 타고 두 사람을 쫓기 시작했다. 고산국이 제주에 다다르자 지산국이 안개를 일으켜 고산국의 시야를 가린다. 안개 덕분에 고산국을 피할 순 있었지만 해마저 사라져버렸다. 이에 ᄇᆞ름웃또가 해를 다시 부르는 바람에 고산국에게 발각되고 만다. 고산국은 하나는 동생이고 하나는 남편이니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서로 떨어져 살기로 약속한다. 돌팔매질과 활쏘기로 서로의 좌정처를 선택한 셋은 서귀동, 동홍동, 서홍동에 제각각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서홍동본향당에는 고산국, 동홍동본향당에는 지산국, 서귀동본향당에는 ᄇᆞ름웃또가 자리 잡는다. 여기서 흥미를 더하는 사실은 서귀동 사람들은 ᄇᆞ름웃또만 모셔진 것이 아니라 그의 연인 지산국을 부인으로 여겨 함께 모신다는 점이다. 지산국이 동홍동과 서귀동 두 마을의 신이 된 셈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서홍동과 동홍동의 관계다. 본래 두 마을은 ‘홍로’ 또는 ‘홍리’로 불리던 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자매지간이지만 남자 하나 때문에 원수가 된 고산국, 지산국의 사연 때문에 마을이 동서로 쪼개졌고, 그로 인해 두 마을사람은 오랫동안 서로 혼인을 금하는 것도 모자라 물자의 교환은 물론 왕래조차 하지 않는 분단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고 전한다.

서귀포시 서귀동 본향 보름웃도 지산국당

모름지기 신화는 오랜 세월 동안 전해내려 오면서 신들의 이야기를 벗어나 인간의 역사까지 반영하기도 한다. 서귀포본향당본풀이에는 동홍, 서홍, 서귀포 세 마을이 생겨날 당시의 역사적 사건이 반영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워낙 환상적인 문법으로 가공되어 어떤 인물과 얽힌 사건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지만 세 마을, 특히 원수가 되어버린 자매가 ‘산 가르고 물 가른’ 동홍과 서홍 두 마을은 오랫동안 신화의 금기를 지켜왔다고 한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동홍마을에서 과일나무를 구해다 서홍마을에 옮겨 심으면 나무가 죽어버리거나 동티가 발동한다는 속신도 있고, 마소를 서로 거래한 경우에 비슷한 일이 생긴다고 믿어 빌리거나 사는 일이 일절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근래에 이르러서는 모두 옛 이야기로 여겨 자유로이 왕래하고 있어 과거의 분단은 사라지고 없다.

신화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공동체의 율법이고 근간이던 시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마을의 수호신을 마치 혈연조상처럼 여겨 신이 겪은 일과 그로 인해 생겨난 원칙과 금기를 자신의 일로 여겼다. 특히 제주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이나 생로병사를 관장하는 신을 실제 혈연조상처럼 여겨 아예 ‘○○조상’이나, ‘○○하르바님’, ‘○○할마님’이라는 호칭을 줄곧 사용해왔다. 신이 나의 조상이고, 나는 신과 이어져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신화로 다듬어진 공동체의 율법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당연한 것이다.

태양의 일문관 ᄇᆞ름웃또, 구름과 안개의 지산국, 바람의 고산국, 이들은 엇갈린 사랑으로 인해 제주섬의 세 마을에 터전을 잡게 된 경우다. 제주도 마을의 지킴이 당신(堂神)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채 서로 조우하다가 갈산길산 좌정처(坐定處)를 찾아간다. 때로는 부부의 인연으로 만났다 헤어진 뒤 두 마을의 신으로 엇갈리기도 하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만났다가 분가해 여러 마을의 신이 된다. 어떤 경우에는 우연히 만난 신들끼리 서로 내기를 해서 좌정처를 고르기도 한다.

좌정처를 결정하는 사연도 여러 가지인데, 부부신의 경우에는 서로 식성이 달라 미식(米食)을 하는 신이 육식(肉食)을 하는 배우자를 부정하다고 여겨 쫓아내는 사례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주로 여신이 쫓겨난다. 부모와 자식인 경우에는 자식이 불효를 저질러 쫓겨난 뒤 새로운 터전을 잡는 사례가 일반적이다. 어쩌다 만난 신들끼리 바둑이나 활쏘기 따위의 내기를 통해 터전을 찾아가기도 한다.

서귀포시 서홍동 안카름본향 고산국 숭물당

가지각색인 사연을 품고 제주의 온 마을을 끌어안은 만신전, 그것은 제주도 마을의 형성과 변화 발전 양상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오늘날에야 일제강점기에 구획된 행정권을 중심으로 마을의 경계가 나뉘게 되었지만, 적어도 제주의 자연마을은 신앙권을 중심으로 구분되었다. 설촌(設村)의 수호신, 생업의 수호신, 육아와 치병의 수호신이 한 마을에 자리해 ‘삼본향(三本鄕)’을 이루는 완결된 신앙권은 근대식 행정권에 의해 이제는 폐당(廢堂) 위기의 애처로운 흔적만 남기고 있다. 이중섭 거리의 번화한 풍경 속에 앉아있는 을씨년스러운 서귀포본향당을 보시라. 도시의 발전은 신전의 앞마당까지 자동차 엔진소리가 진동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오롯한 신심을 가지고 이 당을 찾는 단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서귀포시에서 이 당의 부지를 매입해 과거의 모습대로 복원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관이 나서서 벌이는 일은 전시행정인 경우가 허다해서 적이 걱정도 생긴다. 정치와 토건주의의 결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당의 외형만 번지르르하게 복원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당이 그릇이라면 굿은 음식이다. 빈 그릇이 아무리 예쁘다한들 먹거리가 없으면 쓸모가 없다. 굿을 살려야한다. 건축물의 복원과 건립에 쓰는 돈의 일할만이라도 굿을 살리는 일에 쓰면 어떨까? 자칫 모뉴멘트의 정치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몇 달 전 고산국이 좌정한 서홍동 동카름본향당을 찾은 적이 있다. 산비탈의 계곡에 자리 잡은 당까지 가는 길도 힘들었지만 당올레에 잡목과 가시덤불이 울창해서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고 있었다. 당이 자리한 계곡 바로 위의 농원 주인이 무슨 일이냐며 물어왔다. 도저히 당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며 근래에는 단골들이 찾지 않는 거 같다는 짐작을 덧붙였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 들어갑니다. 요새도 이른 새벽에 찾아오는 분들 이수다. 신심이 이시민 어딘들 못 들어갑니까. 그렇다. 너무나 추레해 보잘 것 없는 곳이라도 믿음이 머물면 그곳은 성소다. 서귀포시 중심가의 황홀한 야경 속에 본향당이 있더라도 믿음이 깃들어 있다면 그곳은 성소다. 당의 복원에 앞서 믿음의 복원이 더욱 절실한 세상이다.

*참고자료

고광민, 제주무속의 전통과 변화 ; 행정권과 신앙권, 제주도연구 6, 제주학회

진성기, 제주도무가본풀이사전, 민속원

케네스 데이비스(이충호 譯), 세계의 모든 신화,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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