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오(희곡작가)

푸른빛이 짙고 짙어 볼수록 눈이 시린 아름다운 바다 협재와 금릉해변, 생떽쥐베르의 어린왕자 속 코끼리를 집어삼킨 보아구렁이를 닮은 비양도의 항해를 상상한다. 바다를 항해하다 누군가에게 그 모습을 들키자 그 자리에 오도카니 멈춰 섰다는 섬, 설악산의 울산바위, 경기도의 광주바윗섬, 진안의 마이산, 경북 등과 더불어 섬이나 바위가 움직이는 것을 지체이동(地體移動)의 이야기라고 한다. 경북 경주에는 세상이 시작되던 당시에 빨래하는 여인에게 들키자 그 자리에 멈춰버린 산 이야기가 있는데, 이때 빨래하는 여인은 누구일까? 태초의 여인이라면 마고가 분명하다. 그런데 왜 마고는 빨래를 했을까? 제주의 설문대할망도 마고처럼 두럭산을 빨랫바구니 삼고 한라산에 걸터앉아 빨래를 했다고 한다. 여기서 빨래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조의 행위를 의미한다. 섬과 산을 움직여 정해진 자리에 들어앉혔던 마고와 설문대의 자연창조력이 바다를 항해하던 섬 비양도에 담겨 있는 것이다.

한림읍 협재리 앞바다에 멈춰 선 비양도

빛 고운 바다와 그 위에 내려앉은 섬이 펼치는 황홀경에서 잠시 빠져나와 한라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별천지가 펼쳐진다. 금릉석물원으로 알려진 곳인데 평생을 돌쳉이(석수장이)로 살아온 제주도 석공예의 최고 명장 장공익 선생이 사재를 끌어 모아 마련한 공원이다. 작달막한 키와 구리빛 얼굴, 밀패랭이를 쓰고 정과 망치를 움켜쥔 모습을 보면 돌하르방이 그를 닮았는지 그가 돌하르방을 닮았는지 헛갈리고 만다.

석물원은 장공익 선생께서 제주의 신화와 전설을 비롯해 사라진 옛 풍습까지 다양한 민속을 돌조각으로 재현해놓은 곳으로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 배치한 전시물들로 만물상이 이루어져 있다. 숭숭 뚫린 구멍으로 거친 현무암에 생명을 불어넣은 조각과 함께 그것의 의미를 새겨놓은 석판의 설명문, 드문드문 눈에 밟히는 맞춤법이 틀린 글자가 오히려 백미라고 감탄을 연발하다보면 어느새 돌과 내가 하나가 된 듯한 신기루에 빠진다.

한림읍 금릉리 금릉석물원의 설문대할망 신상

그렇게 돌로 빚어낸 별천지의 신기루를 쫓아 안으로 안으로 깊숙이 걷다보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거대한 어머니 여신의 현현(顯現)을 목격하게 된다. 10여 미터에 육박하는 설문대할망의 상반신상이다. 그 위용은 마치 항해하는 섬 비양도의 환상을 맨 처음 보았던 이가 가졌던 경외감과 비슷한 느낌일 게다. 여신의 제단 앞에는 널따랗게 자리 잡은 제주의 초가들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모여 있다. 누가 보아도 제주사람들을 보살피는 여신의 권능을 재현한 신전이다. 제단 가까이 다가가면 다시 한 번 입을 쩍 벌리게 된다. 할망의 젖을 부여잡은 아이들로 빼곡하다. 창조주의 자식들임이 분명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양젖 사이에 오이처럼 기다랗게 늘어진 젖 하나가 더 있다. 양젖 사이의 기다란 젖, 이 모습을 상상해보라. 무엇이 떠오르는가? 망측하게도 그것은 당연히 남성의 상징이다. 여신의 가슴에 그것이 달려 있다니. 장공익 선생은 도대체 왜 이런 해괴한 모습을 만들어 여신에게 불경을 저질렀을까?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외설시비에 휩싸일 법도 한 이 형상은 단언컨대 불경이 아니다. 오히려 여신의 창조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미 여러 회에 걸쳐 종종 이야기했던 창조신의 ‘양성구유(兩性具有)’가 바로 이것이다. 신이 사람과 닮았다하여 그들도 남녀로 반듯하게 나눠진다고 여기면 착각이다. 신의 권능과 역할에 따라 남성성과 여성성 중 어느 것이 두드러지는가에 따라 남신과 여신으로 형상화되는 것일 뿐이다. 특히 우주, 자연, 생명을 창조하는 태초의 신들은 대부분이 남녀 양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양성구유의 신성은 여러 신화에서 나타난다. 아테네를 자기 머리로 낳았다는 제우스의 이야기도 대표적인 예이다. “아비를 죽인 자는 아들 손에 죽는다.”는 신탁을 두려워한 크라노스가 자식들이 태어나는 대로 집어삼켰던 것처럼 제우스 또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임신한 아내 메티스에게 변신술 내기를 제안한다. 여러 가지 동물로 변신하는 아내에게 제우스는 파리로도 변신이 가능하냐고 묻자 메티스는 곧바로 변신한다. 때를 놓치지 않은 제우스가 메티스를 집어삼켜버린다. 그렇게 제우스의 뱃속에 갇힌 메티스는 산달을 맞이했고, 그 결과 제우스의 머리에서 아테네가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아프로디테와 헤르메스의 자식 헤르마프로디테스의 양성구유-출처 letscc.net

메티스를 삼킨 제우스, 이 이야기말로 양성을 갖춘 태초의 신들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올림프스의 신들에게는 또 다른 양성구유의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우리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애당초 신들이 창조한 인간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팔과 다리가 넷, 머리가 둘인 암수한몸의 모습이 최초의 인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들은 자신들의 권능에 맞먹는 능력을 지닌 인간들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결국 위협을 느낀 제우스가 번개를 내리쳐 인간의 몸을 둘로 나누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신화 속의 남매신 복희와 여와도 종종 상반신은 분리되고 하반신은 하나로 똬리를 튼 뱀의 모습으로 그려져 양성구유의 권능을 자랑한다. 힌두신화에서는 쉬바와 빠르와띠가 한 몸이 된 아르다나리슈와라가 등장한다.

장공익 선생의 설문대할망 신상은 창조신이 지닌 최대의 권능인 양성구유를 극적으로 살려낸 신성의 현현(顯現)이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제주신화를 테마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처럼 명쾌하게 신성을 드러낸 작품은 접하지 못했다. 팔십 평생을 돌과 살아온 선생께서는 신성을 온몸으로 느끼는 경지에 다다른 듯하다.

양성을 모두 갖춘 설문대할망에 대해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을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설문대할망의 짝인 설문대하르방 이야기가 있는데, 어찌해서 할망이 양성구유의 존재라고 하는가? 그 또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설문대하르방에 대해서는 또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이야기를 통칭하는 설화는 신화, 전설, 민담의 단계를 거치며 알록달록한 이야기보따리를 장만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신화가 전설로, 전설이 민담으로 발전하는 동안 고대의 신화 속 창조신들은 죽음이라는 변신을 통해 사라지거나 전설의 자리로 옮겨가며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반신과 영웅들이 그렇게 태어났고, 이들은 다시 민담으로 자리를 옮기며 황당무계하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변신했다. 설문대할망 또한 전설의 시대를 거쳐 민담의 무대에 등장하며 본연의 창조성을 잃고, 거인이라는 외형적 면모만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해학적인 거인으로 변신한 설문대할망의 짝인 설문대하르방도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설문대할망과 설문대하르방은 신화의 시대의 산물이 아닌 전설과 민담의 시대의 작품이다. 양성구유의 창조신은 이렇게 권능이 분리되며 외형만 부풀려진 거인으로 거듭났다.

민담 속 설문대할망의 모습처럼 본래의 창조성이 퇴색된 신성은 여럿이다. 제주의 신화 속에서 또 다른 사례를 찾는다면 세경할망으로 널리 알려진 자청비의 사연을 들 수 있다. 세경본풀이를 들여다보면 자청비가 남장을 하는 대목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먼저 글공부를 떠나는 문도령과 우연히 만나자 그에게 반해 자신의 남동생을 함께 데려가라고 부탁한 뒤 남자로 변장해 자신을 ‘자청도령’이라고 속여 3년 동안 함께 공부한다. 다른 여인과 혼약을 맺은 문도령과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여인이 몸이 되었던 자청비는 말썽꾸러기 하인 정수남이를 죽인 탓에 부모에게서 쫓겨나게 되자 다시 남자행세를 하며 서천꽃밭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부성감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준 보답으로 생불꽃을 얻어 하인 정수남이까지 살려낸다. 자청비를 남자인 줄로만 여긴 부성감은 딸을 내어주며 혼인시킨다. 졸지에 부성감의 사위가 된 자청비는 자신을 남자로만 여기는 처와 장인에게 적당한 핑계를 대고 빠져나온 뒤 다시 여인의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자청비의 부모는 하인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해괴한 짓을 한다며 한사코 받아주지 않는다. 이에 자청비는 주모땅 주모할망의 수양딸이 되어 베 짜는 일을 돕는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은 수양어머니가 문도령이 서수왕따님애기와 혼인할 때 입을 비단옷을 주문받은 것을 알고 주모할망 편에 자신이 있는 곳을 문도령에게 알린다. 그 뒤 많은 곡절을 겪은 끝에 자청비는 문도령의 부모에게 자신이야말로 문도령의 배필임을 인정받아 혼인을 하고, 하늘나라의 변란을 평정해 문도령, 정수남이와 함께 농사의 신인 세경신이 되어 지상에 내려온다.

이렇게 자청비는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 ‘남성→여성→남성→여성’의 삶을 반복한 끝에 농사의 신인 세경신의 지위에 오른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에서는 ‘변장’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헤아려보면 만물의 결실을 이루게 해주는 농경신이 지녀야할 필수적인 권능인 창조력을 발견할 수 있다. 당연히 창조력의 원천은 양성구유이다. 양성을 모두 갖췄기에 오곡의 열매를 맺게 하고 대지의 풍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고대의 신화에서는 여신과 남신으로의 변신을 자유롭게 했거나,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처럼 여러 차례의 죽음을 겪을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부활했던 불멸의 신성이었을 수도 있다.

자청비의 이야기가 지금과 같은 장대한 서사를 갖추게 된 것은 중국의 양축설화(梁祝說話)에서 기원한 고전소설 양산백전(梁山伯傳)의 영향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기존의 학술적 견해들은 중국의 ‘양산백과 축영대’가 ‘문도령과 자청비’로 바뀌며 변이가 일어났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견해들이다. 그러나 시각을 약간 달리한 양성구유의 측면에서 본다면 자청비는 변신을 자유자재로 이어가며 죽음과 부활을 거듭했던 고대의 원초적 농경신의 이야기에 양산백전(梁山伯傳)이 덧씌워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꺼낼 수도 있다.

설문대와 자청비만이 아닐 것이다. 태초의 신들은 한결같이 양성구유의 존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요에 따라 남성성과 여성성 중 하나가 부각되면서 자연스럽게 외형적인 성 구별이 일어났고, 최종적으로는 남신과 여신으로 분리되었으리라.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주는 여신의 고향이라는 최근의 통념과 그에 따른 문화적 행보들이 다소 걱정스러워진다. 이를테면 제주여성의 진취성과 강인함을 이야기할 때 으레 제주의 여신과 ᄌᆞᆷ수들을 근거나 사례로 제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칫 제주여성이라면 당연히 강인하고 진취적이어야 하는 강요의 문화를 야기할 수 있다. 제주여성이라면 무조건 슈퍼우먼이어야 되는가? 우리에게는 누구나 어린이라면 이승복 어린이처럼, 남자라면 이순신 장군, 여자라면 신사임당처럼 살아야한다고 철석같이 다짐했던 캄캄한 시절이 있었다.

여신 이야기에서 너무 나간 거 아니냐며 어깃장을 놓을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제주의 여신을 운운하며 신성의 드러나는 일면만을 꺼내들고 콘텐츠로 개발하거나 인문학의 이슈로 삼는 태도들이 적이 걱정스러워서 이러는 것이다. 여신에 주목하는 이들의 순수한 의도와는 사뭇 다른 해석의 유통으로 인해 벌어지는 ‘제주여성의 슈퍼우먼화’ 현상이 못마땅해 주절주절 넋두리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다.

제주의 여신은 여성과 남성을 아우르는 양성의 공존을 우리에게 거듭 말하고 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여신보다 모든 것을 끌어안는 공존의 신성에 주목하길 바랄뿐이다.

*참고자료

이거룡, 인도신화의 양성구유(兩性具有) 이상의 관점에서 본 남성의 여성화 또는 여성의 남성화 문제, 남아시아연구19,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이지영, 女·男 山神과 호랑이 신격의 상관성 연구 : 호랑이의 兩性的 側面에 주목하여,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19, 한국고전여성문학회

토머스 불핀치(박경미 譯), 그리스 로마 신화, 혜원출판사

현승환, 飛揚島 說話의 樣相과 國土浮動觀, 탐라문화11,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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