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의 수상 소감은 최근 한국사회의 탄핵 인용과 함께 한층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는 그의 수상 소감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면서 칠흑 같은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 진실을 밝히고, 환멸과 절망의 수렁에서 벗어나 상식과 정의가 살아 있는 그래서 희망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촛불의 언어’와 절묘히 포개진다.

<출처=나, 다니엘 블레이크 공식 홈페이지>

그래서일까.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엄중함과 자연스레 번지는 감동은 한국사회의 부패한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향한 준열한 분노와 비판을 보인 ‘촛불의 언어’가 부정한 세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서로 다독이면서 희망의 빛을 나눠가지는 감동과 다를 바 없다. 고백하건대,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서 기존 한국사회의 낯익은 풍경이 고스란히 겹쳐졌을 뿐만 아니라 탄핵 인용 이후 새롭고 성숙한 한국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고민해야 할 과제에 사로잡힌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구체적 배경은 영국이다. 주인공 다니엘은 숙련된 목수였으나 심장질환으로 실업자가 되었고 담당의사의 권유로 목수 일을 잠시 접고 실업급여를 타서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다니엘에게는 결코 쉽지 않다. 영국은 사회복지 시스템이 잘 갖춰져있는데, 바로 이 잘 갖춰진 시스템 때문에 실업급여를 타기 위해 다니엘은 지금까지 살면서 불편함이 없던 새로운 불편함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다니엘은 컴퓨터를 매개하지 않고서도 그동안 목수 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출처=나, 다니엘 블레이크 공식 홈페이지>

그런데 막상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절차가 컴퓨터 시스템을 거쳐야만 한다. 컴퓨터를 통해 설문에 답하고, 이러저러한 신상 정보를 기입해야 하고, 심사관과 면담을 해야 하는 예약 일정을 정해야 하는 등 말 그대로 잘 갖춰진 영국식 복지 시스템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 컴퓨터 문맹인 다니엘에게 이 시스템 자체는 자신의 혼자 힘으로 통과할 수 없는 정보사회의 문턱이자 경계다. 이러한 다니엘을 측은히 여겨 도움을 주는 말단 직원에게 상사 관료는 그러한 도움은 시스템을 만든 원칙에 어긋난다며 핀잔을 준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컴퓨터 문맹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예외 없이 컴퓨터를 매개로 한 시스템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시스템주의이며, 이것을 확립하기 위한 관료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출처=나, 다니엘 블레이크 공식 홈페이지>

다니엘은 실업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관공서에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다가 공무원과 심하게 말다툼을 벌이는 여성을 본다. 그녀는 어린애 둘을 데리고 낯선 곳으로 이사오다보니 교통 사정 때문에 공무원과 면담 약속 시간을 못 지켰다. 이러한 사정을 애타게 공무원에게 사정을 해보지만 담당 공무원은 면담 시간이 아니라고 원칙을 고집한다. 이것을 보다못한 다니엘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의 사정을 배려해달라고 하면서 그녀에게 면담 기회를 제공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대해 공무원들은 매몰차게 다른 사람 일에 간섭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다니엘을 관공서 밖으로 쫓아낸다. 공무원들에게 그녀와 다니엘의 행동은 영국의 사회복지 시스템을 혼란스럽게 조장하는 교양이 없는 시민의 일탈 행위 정도로만 간주될 뿐, 시스템에 잘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배려하고 도와야 할 사회적 약자로 인식하지 않는다. 공무원에게 그들은 시스템 바깥으로 추방시켜야 할 천덕꾸러기와 같은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출처=나, 다니엘 블레이크 공식 홈페이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를 운영하는 데 온갖 제도와 절차가 잘 정비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국가의 시스템은 공명정대하게 운영되도록 잘 갖춰져야 한다. 그럴 때 다시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국정농단이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국정운영의 투명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이번 탄핵 국면 속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교훈이다.

그런데 투명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과, 시스템주의와 관료주의를 고착화시키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다니엘을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듯, 비록 시스템을 구축시켰으나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시스템 바깥으로 추방하고 결국 시스템의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시스템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일은 시스템 안쪽에 있는 사람들만 잘 관리하면 만족해하는 관료주의의 폐단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기존 한국사회는 이러한 문제점들과 무관할까. 시스템도 투명하지 못하고, 그나마 투명한 시스템을 갖춘 후 거기에 안주하고 이를 안정적 시스템 구축이라고 하여 잘 관리하는 데만 신경을 쓴 관료주의가 팽배해 있는 자화상을 마주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준열한 비판은 매섭고 아프다. 그것도 사회복지 시스템이 내장한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분노하고 허탈해하며 실망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도와야 하며 재활의 기회를 부여하도록 하는 게 사회복지 시스템이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냉엄하다. 중요한 것은 이 시스템에 접속하여 안쪽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가까스로 공무원과 면담 기회를 갖게 된 다니엘은 심장질환이 있어 병을 치유하기 전까지 일을 하면 안된다는 담당의사의 권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은 이를 무시하고 구직 활동을 하는 노력을 보여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다니엘의 실질적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시스템 매뉴얼을 적용시킨 셈이다. 이 과정에서 다니엘은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심하게 훼손당하는 고통을 참지 못해 실업급여 신청을 포기한다. 그리고는 관공서의 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원한다. 상담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는 낙서를 한다. 이 낙서는 영국식 사회복지가 지닌 시스템주의와 관료주의에 대한 사회적 약자의 유쾌한 비판적 저항이다.

<출처=나, 다니엘 블레이크 공식 홈페이지>

이렇게 국가의 모든 복지 시스템 바깥으로 내팽개진 다니엘은 힘든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다니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는 관공서에서 그가 도움을 준 여성의 가족이다. 절망에 빠진 다니엘에게 어린 여자애는 그가 곤경에 빠진 그들을 도왔듯이, 이제는 그들이 다니엘을 돕고 싶다고 한다. 다니엘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다니엘은 심장질환자로서 어떠한 복지혜택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고집불통이 늙은이일지 모르지만, 그의 곁에는 그의 존재 자체를 따뜻이 받아들이고 삶의 고통을 함께 나눠가지며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웃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다시 희망찬 삶을 위해 용기를 낸다. 포기했던 실업급여 신청을 하고, 정당한 심의를 받기 위해 다시 관공서로 간다. 하지만 너무 커다랗고 가슴 벅찬 희망을 가졌을까. 심의를 받기 전 화장실에서 얼굴을 닦던 다니엘은 급작스런 심장 이상으로 생을 마감한다.

<출처=나, 다니엘 블레이크 공식 홈페이지>

그의 장례식에서 그가 심의관 앞에서 말하고 싶어한 메시지가 소개되는데, 그것이야말로 탄핵 인용 후 새로운 한국사회를 만들어야 할 지금, 이곳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가장 기본이 되고, 상식이 되는, 그래서 우리가 앙가슴에 깊이 새겨둬야 할 주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 약력

고명철.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