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 배리(Wm. Theodore de Bary)의 『중국의 ‘자유’ 전통』(이산, 1998)을 읽을 때 눈여겨보았던 내용은 ‘자기[己]’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서양 근대사상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ㆍ욕망 따위를 승인하면서 터를 닦아나갔는데, 성리학이라든가 양명학에 나타나는 ‘자기’ 개념은 서구의 개인에 대응하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신유학에서는 ‘자기’를 두 가지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다. “하나는 내면에 있는 본래의 참된 자기이다. 다른 하나는 이기심으로 특징지어지며,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의해 지배당하는 자기이다.”(『중국의 ‘자유’ 전통』, 66) 후자의 양상이야 그리 새로울 바 없다. 이는 공(公)과 맞서는 사(私)의 영역에 닿아있을 터, 유학의 핵심개념인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의 자기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 흥미를 끌었던 것은 본래의 참된 자기라는 측면이었다. 성리학의 바탕을 다진 “정이(程頤)는 ‘배움의 길을 걸었던 옛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움의 길을 걸었다’는 공자의 말을 ‘배움의 길을 바깥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찾으라[自得]’는 뜻으로 풀이했다.”(『중국의 ‘자유’ 전통』, 58) 그리고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사상은 철두철미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배움’[爲己之學]이라는 목표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난다.”(『중국의 ‘자유’ 전통』, 56) 여기 등장하는 위기지학은 위인지학(爲人之學), 즉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과 맞서는 개념이다.

성리학이 사상 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도가(道家), 불가(佛家)의 사유를 폭넓게 수용하였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내가 보건대, 정이ㆍ주희가 위기지학을 강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장자』의 영향이 있지 않았던가 싶다. 공자가 주나라의 예[周禮]로 복귀하고자 노력했던 만큼 본래 유학에서는 이기심의 맥락에서 자기[己]를 파악하는 경향이 농후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도가와 관련되는 인물들이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했던 까닭도 예의 절대성 부정과 무관치 않다. 반면 『장자』는 줄곧 위기지학을 강조하고 있다. 신유학에서 고평하는 백이ㆍ숙제까지도 위인지학에 머물렀다고 폄하할 정도이다. “참된 자기를 잃고 참됨이 없는 사람은 딴 사람을 부리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호불해(狐不偕), 무광(務光), 백이(伯夷), 숙제(叔齊), 기자(箕子), 서여(胥餘), 기타(紀他), 신도적(申徒狄)처럼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을 뿐, 스스로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267)

이러한 『장자』의 견해에 입각하면 진정한 배움은 학(學)에 있을 뿐이며, 교(敎)는 배척의 대상이 된다. ‘학’은 사람들이 스스로 행하는 일인 반면, ‘교’는 정부가 백성들에게 행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정이는 이러한 관점 위에서 통치(governance)와 학(學, learning)의 대립을 정식화해 낸 것이 아닐까. 정치[政治=政統, political legitimacy]와 도덕[道德=道統, moral authority]은 구분될 수 있으며, 학을 수행하여 도덕적 앎에 이른 자가 정치의 권위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 정이가 펼치고 있는 견해의 요체이다(이와 관련한 신유학에서의 논의는 피터k. 볼의『역사 속의 성리학』 참조). 물론 학(學)을 도덕과 결부시킨다거나, ‘학(學)=도덕’과 ‘교(敎)=정치’의 일치 가능성 제시는 정이가 『장자』를 『장자』 바깥에서 재해석해 낸 결과이겠지만 말이다.

대학생 때 그저 문면만 읽고 넘어갔던 적이 있었으나, 성리학에 대한 지식이 조금 생기면서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된 예화가 『장자』에 등장하는 「포정의 소 각 뜨기(庖丁解牛)」이다. 백정 포정이 소를 잡는데 그 동작이 마치 무곡(舞曲)에 맞춰 춤을 추듯 경쾌하다. 임금이 그 경지를 감탄하여 비결을 묻자 백정이 답한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소를 잡았으나, 삼 년이 지난 뒤부터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고, 지금은 신(神)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감각기관은 쉬고, 신(神)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정말 본래의 모습에 따를 뿐, 아직 인대(靭帶)나 건(腱)을 베어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146~7) 그러니 칼날이 상했을 리 만무할 터, 포정은 19년째 같은 칼을 사용하고 있으나 칼날은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듯하다. 이에 왕이 말한다. “훌륭하도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생명의 북돋음(養生)’이 무엇인가 터득했노라.”(148)

포정이 소의 각을 뜨는 이 이야기에서 백정과 임금의 위치가 역전되어 있음은 오강남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백정이라면 옛날 동양 사회에서 가장 천시한 직업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 사회에서 가장 천한 백정이 그 사회에서 지존한 임금 앞에서 소 잡는 법을 보여주어 ‘양생(養生)’의 도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다. 도(道)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도 앞에서는 지금껏 당연하게 여기던 기존의 질서가 뒤집힌다는 것을 암시했다.”(148) 여기에 내 생각을 조금 덧붙인다면, 기존 질서의 전도는 다시 교(敎)에 대한 학(學)의 우위로 파악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기실 포정이 이야기하는 바는 학(學)의 과정과 그에 따른 현재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소를 소로만 보았던 포정은 삼 년 뒤 소를 뼈ㆍ살ㆍ근육 따위의 해부학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분석과 계산 바깥에서 그저 신(神)에 이끌려 작업해 나갈 뿐이니 자신과 소가 하나 되는 불이(不二) 상태로까지 나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때 작업은 ‘하늘이 낸 결’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만큼 인위(人爲)가 개입하지 않은 경지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오강남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이 노자가 말하는 ‘함이 없는 함(無爲之爲)’, 그래서 안 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경지에서 하는 ‘함’이다.(『도덕경』 제37장) 이것은 또 제2편에서 남곽자기가 ‘자기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들은 상태와 같은 것이다.”(150~1) 『장자』에 등장하는 학(學)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이러한 경지일 것이다.

『장자』에 등장하는 ‘하늘이 낸 결’과 같은 개념은 신유학에 수용되면서 ‘천리(天理)’와 같은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 과정에서 하늘[天]이 낸 결[理]의 내용과 그에 도달하는 방법 차이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학문의 본령을 위기지학으로 파악하는 견해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주희가 위인지학을 비판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요즘 세상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북돋우고, 형이 아우를 격려하며,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 모두 과거시험 준비를 목표로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 천리가 무엇인지, 하늘이 낸 결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위기지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공부가 얼마나 위태로운가에 대해서만큼은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최근 박근혜ㆍ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에서 드러난 소위 학자 출신들의 파렴치는 기가 찰 지경이다.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왔다는 김기춘 前대통령비서실장, 우병우 前청와대민정수석, 조윤선 前문화부장관은 또 어떤가. 지식인이라는 그들의 행태가 시민들의 평균 의식보다 한참 밑도는 까닭은, 위기지학이 아닌, 위인지학에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정농단에 연루된 저들에게 응당 돌을 던져야 하겠지만, 차제에 위인지학으로만 치닫는 우리의 교육 현실에 대한 반성도 진행해 보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듯하다. 그래야만 국정농단 사태의 청산이 부박한 한국 사회의 문화 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성에 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접했을 때 그나마 반가움을 느꼈던 까닭은, 그러한 기대가 가슴 한 편에 있기 때문이었다.

“(입학식에서) 성낙인 총장은 ‘서울대라는 이름에 도취하면 오만과 특권의식이 생기기 쉽다’며 ‘내게 많은 것이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생기면 출세를 위해 편법을 동원하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대인에 대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이유’라고 말했다. (중략) ‘여러분들이 다른 학생보다 고교 시절 성적이 좋아 서울대인이 되었다는 그것만으로 사회의 리더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서울대인, 부끄러운 모습 회자…특권의식 지워라”」, 『경향신문』, 20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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