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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증언]정명(正名)에 가닿지 못하는 이름 '수형인'4.3발발 69년 넘어도 수형희생자 진상 규명 '먼길'
4.3당시 인천형무소 수형인 '408명' 중 생존자 단 10명
불법재판 희생자들, 국가 배보상 이전 '진상 밝혀달라'
변상희 기자 | 승인 2017.03.28 20:02
"4.3 당시 우리는 군사재파조차 받지 못했다." 28일 하티호텔에서 열린 [제주4.3 인천형무소 수형희생자 역사증언]에서 생존자 현창용, 박동수, 양근방, 양일화 씨가 4.3당시 인천형무소에 끌려가던 상황을 증언했다. @변상희 기자

제주4.3사건이 발발한지 69주년이 됐지만 당시 인천형무소에 '불법 감금(4.3진상조사보고서)'됐던 408명의 희생자들은 여전히 국가 공문서인 '수형인 명부'에 올라있다.

영문 없이 무작위로 잡힌 열 너댓살 아이들이 인천으로 가는 낡은 배와 석탄을 실어나르는 화물 기차에 올라 형무소에 갇히고, 고문과 핍박에 시달리며 그야말로 '인간 대우'를 받지 못했던 그 세월이 여전히 '낙인'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남들 말하는 좌우도 모르고, 그저 산으로 가라니 산으로 갔고 살려면 예 아니오 말만 하라던 세월에 '뒷 목에 울리던 총성'과 '눈 앞에 죽어가던 형제'가 떠올라 오들오들 떨며 그저 살아남았던 그 시절 '아이들'이 아흔 백발을 내보이며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증언을 내놓았다.

4.3 당시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던 408명의 희생자 중 현재 살아있는 생존자 단 10명. 28일 4명의 그 억울한 '수형인'들이 4가지 증언을 내놨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단 6개의 증언 뿐이다. 남은 생존자가 4.3이 정명에 가닿는 그 세월까지, 여전히 생존한다면 말이다. 

다음은 28일 제주시 하니호텔 별관 2층 회의실에서 마련된 '완전한 해결을 위한 [4.3역사증언] 및 [제주4.3인천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 중 4.3당시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던 현창용(85), 박동수(86), 양근방(85), 양일화(87)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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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창용(인천형무소 수형 당시 16세)

현창용(인천형무소 수형 당시 16세)

현 씨는 4.3 발발 당시 홀어머니와 농사일로 하루하루 살아가던 열 여섯살 아이였다.

어느날엔가 피곤한 몸으로 어머니와 한 방에서 자고 있는데 해도 뜨지 않은 새벽 2시경, 모르는 사람들이 구둣발로 그의 등짝을 '팍'하고 찼다.

깜짝 놀라 깼더니 경찰 2,3명이 '이노무 자식 나와!'하고 마당으로 현 씨를 끌고 갔다. 나가보니 동네 젊은이가 3,4명 나와 있었다. 총을 든 경찰도 6,7명... 영문도 모른채 끌려간 노형동 한 초등학교에서 죽을 만큼 '취조'를 당했다.

웃통을 벗겨 양쪽에 서있던 순경들이 가죽벨트 두 개를 갖고 번갈아가며 어디든 두들겨 팼다. 패다 지쳤는지 돌아갔다 다시 오후 되면 불러내 또 두들겨 패고... "너가 폭도하고 연계했느냐, 삐라를 뿌렸느냐"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어 사실대로 "아니오" "아닙니다."했다.

그랬더니 소나 말이 먹는 물을 큼지막한 주전자에 담아 현 씨의 코에 들이부었다. 숨을 못 쉬니 그 물을 죄다 마셨는데 더이상 배에 들어갈 상태가 되지 않을때까지 물고문은 계속됐다. 어느날은 뒷통수에 총을 대고 허공을 향해 '탕탕탕' 총소리를 냈다. "죽여버리겠다." 

연일 계속되는 구타에 취조에,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하루는 숙소에 갔더니 청소하고 밥하는 아줌마가 그리 말했다. "너 그리 하지 말고, 경찰에 '예' 해라... 여기 들어온 사람들 다 그리 말하고 나갔다." 

살려면 '예'라고 해야 했다. 맞다 죽느니 그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예"했더니 알 수 없는 백지에 도장을 찍고 관덕정 앞으로 끌려갔다. 변호사도 없는 재판에서 검사는 그랬다. 

"제주도 사람들은 사돈에 팔촌이라도 폭도에 연관된 사람은 다 죽여야 한다." 언도도, 구형도 없이 재판은 끝났고 그 길로 인천으로 가는 낡은 배에 현 씨는 오르게 됐다. 

몇 날을 거쳐 인천형무소 마당에 모였더니 누군가 이름인가 번호를 부르며 몇 년, 몇 년 말했다. 알고보니 그게 언도였다. 죄명도 없는 '언도'. 같이 끌려오게 된 동네 친구 문종속은 15년을 언도받았다. 그가 그랬다. "집으로 돌아가거든 나 여기서 죽었다고 말을 해다오." 현 씨가 기억하는 그 친구는 결국 인천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현 씨는 5년을 선고 받고 그만한 기간을 인천형무소에서 지냈지만 6.25전쟁이 발발한 뒤 다시 재판을 받게 됐다. 열 여섯 아이가 형무소에 갇혀 20대 청년이 되던 때 판사는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후 무기로 확정됐고, 세월은 무심히 흘러 그가 42살 되던 해에서야 석방됐다.

"인천형무소에서 수감생활 할 때 말입니다. 영하 7,8도 날씨에 세수를 하러 마당에 나갔지요. 세수하러 가는 건 벌 받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1초라도 늦게 세수를 마치면 구둣발 폭행이 이어졌지요. 그뿐인가요. 죽어도 배만 부르게 먹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게 당시 형무소에 갇혔던 수형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소금물도 없어 못 먹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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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수(인천형무소 수형 당시 17세)

박동수(인천형무소 수형 당시 17세)

박 씨는 4.3이 발발했던 1948년 당시 달리기를 유난히 잘했던 열 일곱살 아이였다.

토벌대에 가족을 모두 잃고 어느날 고아가 됐던 박 씨는 그 '달리기'를 잘해서 총에 맞아 죽지 않고 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그 즈음 재판에 넘겨온 열 너댓살, 많아야 열아홉 넘을까 싶은 또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영문도 모른채 끌려와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 마지못해 '예'했더니 인천형무소로 끌려갔다. 살려면 그래야 했다. 

그렇게 끌려온 인천형무소 마당에 있으니 제주서 같이 넘어온 일행이 100여명이 넘었다. 인천형무소는 박 씨와 같은 어린 청소년들이 수감되던 곳이었다. 형무관이 그랬다. 

"누구 이하 몇 명은 7년!" "누구 이하 몇 명은 5년!"

그게 형량이었고, 언도였다. 왜냐고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내 죄명이 뭐냐고 제대로 묻지도 못했다. 박 씨도 일행들도 숨죽여 들어야 했고, 갖은 고생을 견디며 형무소 생활에 버텨야 했다. 살려면 그래야 했다.

"6.25 사변이 터진 줄도 몰랐습니다. 어느날 형무관들이 죄다 사라졌더라고요. 우리들은 모두 형무소에 갇혀서 밥도 못 먹고 이틀을 넘게 굶어 지냈어요. 그러다 인천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이 형무소 문을 열어줬습니다."

그러고 나가자마자 다시 군인들, 형무관들에게 잡혀 다시 형무소로 재입소 됐다. 이후엔 전쟁 포로로도 잡혔고, 이후엔 다시 재판을 받아 1년 징역에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죄명은 내란죄. 당시 북한군은 포로로 잡혔다가도 남한에 살고 싶다고 의사를 밝히면 풀어주던 때였다.

박 씨는 "내 신원을 조회해보면 '국가보안법 위반'이 문서상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걸 보고 내 가슴이 막 아팠다."며 "지금까지도... 문서로 남아있구나 했다." "아무죄도 없이 잡혀가 고생한 건 둘째치고, 낙인 찍힌 게 너무 억울하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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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방(인천형무소 수형 당시 16세)

양근방(인천형무소 수형 당시 16세)

양 씨의 큰 형은 4.3 발발 당시 26세였다. 어느날 집앞 길에서 군인이 쏜 총에 맞아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죽었다. 작은 형도, 시집 온 지 1년 된 작은 형수도 21살 나이에 그 자리에서 죽었다. 

사촌까지해서 양 씨의 집 앞 골목에서 5명이 넘게 죽었다. 양 씨도 그날 발에 총을 맞았는데 살아남았다. 다리를 묶고 산으로 피신하니 동네 사람들이 모두 산으로 숨어 있었다. 와산이고 대흘이고 선흘이고, 돌아보니 그게 '초토화 작전' 이었다.

집은 다 불태워졌고 사람이 보이면 총으로 다 죽이던 때였다. 북촌에선가 주민 300명이 운동장에 모인 채 사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살아야 했다. 살려고 동굴에 숨었다. 어느 동굴에 숨은 주민들은 동굴 앞에 피운 불에 숨막혀 죽었다 했다.

"얼마나 잔인하게들 했는지...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알지. 와산을 집중해서 토벌했더라고. 불타고 죽었다는 사람들 소식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마당에 시체가 나뒹굴고 중산간 부락은 전체가 초토화 됐다. 양 씨는 산에서도, 동굴에서도 살아남지 못 할거라 생각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헌병대에 잡혀 함덕으로 잡혀갔다. 함덕 모살밭에 끌려가면 바로 총 맞아 죽는 때였다.  

"그 중에 헌병대 한 군인이 내가 너무 작으니까 넌 거기서 나와라. 하더라고. '넌 총살 안 시킨다.'"

그 길로 취조를 당하고 주정공장으로 끌려갔다. 중산간에 살던 사람들이 공장에 가득했다. 아이를 안은 엄마와 임신부... 아이들 우는 소리에 동지를 막 지난 한 겨울 추위에 주정공장 안에 갇힌 사람들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그대로 '내란죄'의 죄명이 달렸다. 

"어려서 기억도 안 나는데. 제주도민들이 이승만 단독정부를 반대했다고 4.3 폭동이다 뭐다 했어. 난 폭동에 가담한 것도, 5.10 선거 반대도 알지 못 했는데"

양 씨를 포함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낡은 배에 올라 인천 앞바다로 실려갔다. 그 길로 인천형무소에 끌려간 아이들에게 형무관은 사람 이름도 안 부르고 "여기 부터 저기까지 7년!" 그렇게 형을 선고했다고 양 씨는 말했다.

6.25가 발발했고, 피난 길에서도 갖은 고초에 시달리다 다시 광주에 잡혀 4.3 당시 인천형무소에 끌려갔단 이유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석방 대상에 올랐어도 4.3 관련 사람들은 석방도 잘 안해주던 때였다. 석방장이 3월 3일 나왔지만 제주로 바로 향하지 못했다. 여섯 날이 지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석방장이 나오던 날 제주로 갈 수 만 있었어도. 아버지 얼굴을 볼 수가 있었을 것을" 양 씨는 뒤늦게 제주로 돌아왔지만 집은 다 불타고 가족도 다 죽어버렸다. 전과자로 낙인 찍힌 그는 요시찰로 감시 대상으로 자유롭지 못 했다. 숨 죽여 살아야 했다. 

"죄 지은 것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불법 재판을 받고 형살이 한 것이 한(恨)이 맺힌다."

"내가 마음에 지금껏 아프고 잊혀지지 않는 건 자나 깨나 형제들이 내 눈앞에서 총살 맞아 죽은 광경... 그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지"

양 씨는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하고자 한다. 이제 곧 아흔을 앞둔 그는 "이길지 질지는 나중 문제, 성의껏 진실을 함께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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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일화(인천형무소 수형 당시 18세)

양일화(인천형무소 수형 당시 18세)

금악리 출신인 양 씨는 중산간 마을 사람이란 이유로 '산에서 온 놈'으로 불리며 인천형무소로 끌려갔다. 계엄사령관이 중산간을 불태우겠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살아남으려고 흩어지던 때였다. 

양 씨는 "집에 살 수가 없어 동네 친구들하고 제주시로 가자 하고 애월로 갔지, 금악리에서 왔다고 하면 절대 안 되던 때였어."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애월 백부네로 내려가 지내다 대한청년단에 붙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단 말에 그 대열에 함께 했다. 그러다 아는 형님네 가서 있던 어느날 무리가 나타나 그의 목을 잡고 한참 두드려 팼다. 알고보니 그들은 서북청년단들이었다. 아는 형님네서 3명이 있었다고 '무허가 집회'를 이유로 그랬다. 

"금악리에서 왔다 하니 진짜 산에서 온 놈이다 하면서 경찰로 보냈다." 

양 씨는 그 길로 북관덕정 옆 취조하는 큰 집에 끌려갔다. 형사들은 밤을 새서 양씨를 때리고 정신을 잃으면 물을 부어 깨웠다. 다시 밤을 새서 때리고 물을 붓고 반복했다. 한 20여일을 그렇게 고문 당했다.

결국 남들처럼 형사들이 불러준 죄목에, 모르는 사실에 "그렇다." "예"하고 답해야 했다.

그 길로 두 손에 포승이 채워졌고 쇠똥이 그득한 낡은 배를 타고 목포로 끌려갔다. 그러고 석탄을 실어나르는 화물기차에 올라 밤을 새워 인천형무소에 도착했다. 

"형무소인지 뭔지도 몰랐지. 내리니까 영하 28도라는 거라. 형무관들이"

형무관들은 양 씨와 일행들이 내리자 누구 몇 년, 누구 몇 년 했다. 너무 춥기만 했던 그날, 그 '몇 년'이 그에게 선고된 형량인줄은 그날은 몰랐다. 이후 그는 6.25 전쟁이 터진 뒤 살아남으려 이 무리에 저 무리에 끌려다녔다. 인민군교육을 받아야 했고, 어느날은 한국군교육도 받아야 했다. 

"매도 맞고 모진 훈련도 겪고... 그래도 그때는 인민군 세상이든 한국군 세상이든 어디든 들어가야 살 수 있었던 때였어. 돌아보니 까마득한 세상을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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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희 기자  yellow0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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