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새벽, 서울구치소로 이동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

그날 밤 제주에는 비가 내렸다. 하염없이 주룩주룩 봄비가 추적 거렸다.

하늘도 어느 권력의 몰락을 측은히 여겼던 것일까.

2017년 3월 31일 오전 3시3분에서 오전 5시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구속 수감되던 때였다.

촛불을 태우며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을 주장하던 사람들에게도,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구속 반대를 외치던 사람들에게도 마음은 안타깝고 착잡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미우나 고우나 전직 대통령의 불행이 찬·반에 관계없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물론 국가의 위상이나 국민의 자존심에도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법치와 정의‘가 강조되는 시대 상황이라 해도 그렇다.

불과 20여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가수반의 자리에 있던 대통령을 법의 이름으로 파면시켜 자리에서 내치고 그것도 모자라 감방으로 보냈다.

박 전대통령은 구치소에서 직위도 이름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503’호라는 수인번호가 그의 명찰이다.

권위는 물론이고 지켜야할 명예까지 모두 잃어버린 상태다.

자괴감과 모멸감, 상실감이 그의 영육을 피폐하게 할 것이다.

‘동양적 인간학’으로 평가받는 고대 중국의 채근담(菜根譚)에서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처벌 위주의 법치(法治)가 인간미를 증발시키고 인간성을 말살 할 수도 있다는 경구나 다름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법운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하다.

그러기에 “법에도 눈물이 있다”고 한다. 냉엄하지만 냉혹하지 않게, 무쇠를 자르듯 예리하고 엄정하기는 하지만 무자비 하지는 않게, 냉철한 법리가 지배하는 법원에서도 감동을 주는 따뜻한 판결은 아름다운 것이다.

법은 인간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소통이며 연결고리다. 법을 통해 인간관계의 예양(禮讓)을 배우고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하며 자유를 지키는 것이다.

박 전대통령의 대통령직 파면 처분과 독수공방 감옥행을 듣고 보면서 인간성을 아우르는 예치(禮治)보다는 인간성 상실의 섬뜩하고 냉혹한 법치(法治)만을 느꼈다면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일 것인가.

박 전대통령 구속영장 전담판사는 영장을 발부하면서 “주요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 인멸의 염려가 있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된다”고 이유를 밝혔다.

여기서 법과 원칙, 양심에 따라 영장을 발부한 판사의 결정에 시비를 걸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전문가적 식견과 고매한 인격을 건드릴 재간도 없다.

다만 법리 문외한이라고 해도 입과 마음이 있기에 상식선의 마음을 내비치고 말할 수는 있는 것이다.

‘불구속 수사’는 법이 지향하는 대원칙이다. 국민의 인권과 신체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다.

’피고인이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주거가 일정하거나 증거를 인멸 할 염려가 없을 때, 그리고 피고인이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없을 때는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다.

법에 규정되어 있는 형사소송법(제70조) 정신이다.

박 전대통령의 경우도 그러하다.

첫째 거주지가 일정하다. 두 번째 아무데도 도망 갈 수 없는 처지다.

세 번째 증거인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검찰은 박전대통령에 대한 증거가 쌓이고 쌓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검찰이 갖고 있는 쌓이고 쌓인 증거를 박 전대통령이 어떻게 빼내서 인멸할 수 있겠는가.

공범 관계로 지목된 피의자들은 모두 구속 상태다. 이들과 입을 맞추고 증거를 인멸하는 것도 불가능 한 일이다.

따라서 형사소송법 상 구속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 불구속 수사가 가능한 일인 것이다.

형평성 시비 문제도 그렇다. ‘뇌물을 준 사람은 구속하고 되물을 받지 않았다는 사람은 불구속 한다면 형평성에 어긋 난다’는 이상한 논리다.

논리는 해괴하고 인용은 황당하다.

확정된 사실관계에 반하여 어느 일방의 주장으로 다른 일방을 옥죄는 것이 형평성 논리로서 합당한 일인가.

형평성 문제라면 다른 비유도 가능하다.

2010년 4월 당시 검찰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 대해 불법정치자금 9억원 수수혐의로 수사에 착수해 불구속 기소했었다.

이때부터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날 때까지 5년 1개월 동안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불구속 기소 후에는 국회의원(민주당 비례대표)에 당선돼 3년4개월간 꼬박꼬박 세비를 받으며 정치활동을 해왔다.

결국2015년 8월 대법원에서 징역2년에 추징금 8억8천3천만원이 확정되고서야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이때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표는 “대법원의 유죄 판결은 사법적 판결이 아니라 정치적 판결”이고 “진실과 정의의 보루인 사법부가 권력에 굴복한 참담한 결과”라고 했었다.

이와는 달리 지난 31일 박 대통령 구속과 관련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했다.

‘권력에 굴복했던 사법부’가 ‘법과 원칙의 사법부’로 말을 바꿨다.

국무총리였던 사람은 불구속 상태에서 5년 넘게 재판을 받고 대통령이었던 사람은 속전속결 식으로 구속 수감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 일인지 여간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박 전대통령의 잘못을 덮자는 것이 아니다. 형평성 적용의 불합리와 편향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느 정치인의 말처럼 박전대통령은 ‘어느 허접한 여인’의 농간에 놀아나 국정을 어지럽힌 잘못이 크다.

그에 상응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감옥에 가든 징역을 살든 그것은 한명숙 전 총리의 경우처럼 법원 최종심인 대법원 확정 판결에 따라야 한다. 무죄추정의 원칙 상 그렇다. 그것이 ‘법치의 정의’다.

불구속 수사를 통해서도 법치 실현과 정의 사회 구현은 가능한 것이다. 강력한 법 집행만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법의 집행은 법 제정보다 힘들고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키케로에 의하면 ‘가장 엄격한 법률은 가장 나쁜 해악’이라고 했다. 새겨들어 좋은 경구다.

박 전대통령의 ‘파면’ 주문을 낭독했던 이정미 전 헌법 재판관은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法之爲道 前苦而長利)’는 한비자(韓非子)를 인용했다.

공교롭게도 박 전대통령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던 김수남 검찰총장도 ‘법은 권력자에 아부해서는 안 된다(法不阿貴)’는 한비자를 인용한 바 있다. 그럴듯한 인용구다.

그러나 그것으로 탄핵과 구속영장 청구를 변명하려 들었다면 옹졸하고 비겁하다.

예수는 죄지은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는 군중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말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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