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 흑백 화면 사이로 서서히 제주가 실체를 보인다. 그곳은 샛노란 유채꽃이 지천에 피어 있고, 바닷가 검은 현무암을 격정적으로 끌어안으면서 사랑의 흰 포말이 공중으로 흩어지며 무지개빛이 산란되는 유채색의 섬이 아니라 언어절(言語絶)의 죽음의 음산한 기운이 배회하면서 모든 생명을 압살하는 무채색의 섬이다. ｢지슬｣은 그렇게 1948년 11월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의 정치세력에 의해 제주를 대상으로 한 ‘초토화 작전’이 실행된 시기를 다룬다. 해안선부터 5km 바깥 중산간 지대를 초토화한 작전은 이 작전이 지닌 야만성을 그대로 증언한다.

｢지슬｣은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의 야만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동안 4․3을 다룬 문화예술 작품이 중시한 주제 중 하나가 무고한 양민이 겪은 엄청난 피해를 고스란히 증언하고 고발하듯 ｢지슬｣도 예외가 아니다. 토벌대에 의해 무참히 여성의 신체가 유린당하고 급기야 목숨을 잃은 꽃다운 나이의 순덕이, 아들과 함께 미처 피난을 하지 못하고 집에 남아 있다가 맹목적 반공주의에 사로잡힌 토벌대의 광기어린 칼부림에 의해 잔혹한 죽임을 당한 무동이 어머니, 집에서 기르는 돼지의 밥을 주기 위해 잠시 마을로 왔다가 토벌대에 의해 체포돼 역시 잔혹한 죽임을 당한 원식이 삼촌, 마을 사람들이 피신한 동굴 입구를 지키다가 토벌대의 집단 총격을 당하고 죽은 만철이, 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피신처를 옮겨 이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임신으로 몸이 무거워 이동하지 못한 채 그곳에서 홀로 남겨져 신생아를 낳고 목숨을 잃은 무동이 처 등은 이들 죽음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 억울한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를 살아 있는 우리에게 엄중히 묻는다. 그러면서 이들의 원혼을 역사 앞에서 해원해야 할 과제를 우리에게 주문한다.

이러한 질문과 과제는 아무리 반복하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4․3의 이 끔찍한 참상이 너무 충격적인 나머지 자칫 이러한 비극이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낮과 밤의 세상이 나뉘면서 낮은 군경 토벌대의 세상이되 밤은 4․3봉기를 일으킨 무장대의 세상으로, 제주의 시공간은 우주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정치적 이념의 대립과 갈등으로 그 흐름이 끊긴 혼돈의 아수라장으로 탈바꿈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적대시되는 팽팽한 긴장과 극심한 대립 속에서 현실의 감각은 마비된 지 오래다. 그 단적인 경계 표지가 해안선부터 5km 안팎으로 나뉘는 제주의 폭력적 경계다. 하지만 이럴수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러한 아수라 속에서도 삶의 현실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지슬｣이 4․3을 다룬 여타의 문화예술과 달리 감동이 쉽게 가시지 않은 데에는 바로 삶의 구체적 정동(情動)이 강한 울림을 생성해내기 때문이다. 가령, 마을 사람들이 동굴로 피신하여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장면들이 있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 그들의 얘기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정담으로 이어진다. 물론, 동굴 밖 토벌대의 무차별적 토벌에 의해 다른 마을 주민들의 피해에 대해 걱정스런 얘기를 나누고 함께 피신하지 못한 마을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하지만, 그들의 얘기는 동굴 밖 마을 어느 쉼터에서 한가히 주고받듯이 일상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로 동굴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지고 활기를 띤다. 원식이가 기르는 수퇘지와 접붙이기를 원하는 순덕이네의 이야기, 그 사이에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드는 이웃들의 농담, 그리고 마을의 총각들이 서로 장가를 가겠다면서 순덕이를 향한 노골적 애정 표시를 보이는가 하면, 마을의 어린애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건네는 어른들의 푸근한 다독거림, 그 와중에 서로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기 위해 나눠먹는 지슬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의 말들…….

사실, 동굴 안에서 주고받는 마을 사람들의 얘기와 농담은 죽음이 난무하는 동굴 밖과 비교했을 때 생의 기운이 흐른다. 비록 동굴 안은 어둡고 적막이 지배하는 공간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동굴 안은 죽음의 손이 미치지 않는 생의 활력이 보존된 공간으로 바뀐다. 동굴 밖처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불편함이 뒤따르지만 동굴 안에서는 그나마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숨쉬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지슬을 나눠먹을 수 있는 생의 공간을 만끽할 수 있다. 극도의 제한된 공간 안에서 그들은 행복 아닌 행복을 체감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 생의 공간은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면서 동굴 안은 동굴 밖과 다를 바 없는 공포의 지배를 받는다. 정신 연령이 낮은 상표에 의해 그들의 은신처 동굴은 발각되면서, 마침내 그들은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그 은신처를 가까스로 벗어나 한라산 깊숙한 곳에 있는 무장대로 향한다.

｢지슬｣을 보는 동안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이 고귀한 생을 지켜내는 처절한 몸부림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은 그 어떠한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존귀한 것인 한 그들은 동굴 안에서 목숨을 서로 지킨다. 그렇다. 그들은 ‘서로’ 지킨다. 자신의 목숨만 지키기 위한 게 아니라 동굴 안에서 부대끼는 모두의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서로의 힘을 보탠다. 그래서일까. ｢지슬｣의 앞부분에서 토벌대를 피해 마을 장정들 몇 몇이 한꺼번에 좁은 구렁에 모여드는데, 이후 일어날 동굴 피신을 암시하듯 그곳에는 친일협력을 한 사람과 그 사람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 일제 시대 징용을 갖다온 사람, 그 외에 무고한 양민들이 서로의 몸을 포갠 채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이후 동굴 피신 생활을 하면서 불편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며 서로의 목숨을 지킨다. 이와 관련하여, 명치 끝이 아려지는 대목이 있다. 무동은 홀로 남겨진 그의 노모가 걱정이 돼 어떻게 해서든지 노모를 억지로 피신시키기 위해 집에 갔는데, 그가 목격한 것은 불타버린 집과 그곳에서 죽은 노모와, 그리고 노모가 품에 안은 채 타다가 남은 지슬 몇 개가 전부다. 무동은 극한의 분노와 슬픔을 억누른 채 남은 지슬을 갖고 동굴로 돌아와 굶어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눠준다. 그 지슬에 연루된 비극적 사연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지슬이 달다 달아”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배고픔을 잠시나마 해결한다. 이렇게 동굴 안 사람들은 무동이 가져온 지슬로 또 다시 존귀한 생을 이어간다. 무동의 노모의 삶과 맞바꾼 지슬을 먹으면서 그들은 생의 기운을 또 다시 추스른다.

누군가 악무한의 지옥인 그때, 그곳에서 제주 사람들이 생존한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여기에 손쉽게 동의할 수 없다. 기적이 아니라 ‘서로’의 생을 지켜내기 위한 제주 사람들의 절박감과 ‘서로’ 살아야 하고, ‘서로’ 살 수 있다는 생의 강인한 욕망과 의지가 죽음의 대지 사이로 솟구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갈이 찢기고 훼손된 제주 공동체를 회복함으로써 일상의 행복을 다시 누려야 한다는 삶의 저 도저한 낙천성이 제주를 휘감는다. 때문에 ｢지슬｣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삶터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으나, 그들의 삶 자체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지슬｣에서 마을 사람들은 토벌대로 표상되는 국가권력의 폭력 아래 속수무책으로 희생당하고, 그 억울한 죽음이 제사의 의례인 소지(燒紙) 형식으로 위무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의 언어로 그려지고 있는 상징적 해원일 따름이다. 아니, 해원을 간절히 희구하는 영화적 전언을 표현하는 것이다. 올해는 69주년을 맞은 4․3으로, 아직도 4․3의 역사적 진실 추구를 방해하고, 4․3의 역사적 의의를 곡해하고 음해하는 시도가 잊혀질만 하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우리는 4․3에 대한 역사의 왜곡과 맞서야 하되, 동시에 4․3이 화석화되는 것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4․3의 미래적 가치를 옹골차게 담대히 추구해야 할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이것을 다시 상상해야 할까. ｢지슬｣에서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이 생을 위해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이명(耳鳴)에 녹아 있는 또 다른 역사적 진실을 외면해서 안 되리라.

□ 고명철은?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