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 제주투데이는 금속공예사의 전설 김승희 작가와 만났다. 현재 그의 작품전 '금속이 그리는 풍경'은 제주 저지리 예술인마을 '스페이스 예나르'에서 진행되고 있다.@제주투데이
"한국에서 금속쟁이가 아니라 금속공예를 하는 작가라는 이름을 알리고 싶었어요."
 
금속공예가 김승희 작가는 말한다. 금속공예라는 말은 우리나라 예술계에서는 매우 낯선 단어다.
 
우리 역사 속에서 금속 예술품들이 많지만, 실제로 금속공예의 맥은 끊긴지 오래다. 잊혀진 예술을 다시 부활시킨 이가 다름아닌 김승희 작가다.
 
금속을 그리는 여인
현재 제주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위치한 '스페이스 예나르(관장 양재심)'에서 금속공예가 김승희 작가의 작품전 '금속으로 그린 풍경'이 5월 31일까지 전시되고 있다.
 
한국 최초로 현대 금속공예를 시작한 김승희 작가는 '금속을 그림을 그린다'는 평을 받는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이번 작품전에서는 9점의 벽면 작품과 6점의 오브제, 장신구 26점, 제품장신구 78점 등 지난 40년간 작품활동에서 한 김 작가의 혼을 느낄 수 있다.
 
「춤추는 모란 2006」-철, 적동, 황동, 백동,폴리+안료 480*160cm
특히 '춤추는 모란 2006'은 가로 4.8미터, 높이 1.6미터에 달하는 대작으로 눈에 띈다. 철과 적동, 황동, 백동으로 풍경과 나무, 잎을 꾸미고 안료와 폴리로 색을 입힌 이 작품은 입체적인 미와 민화적 소박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김승희 작품의 특징은 커버가 없다는 것이다. 몇 년간 계획적으로 비바람을 맞혀 자연녹이 슬게 한 금속에 홍차 찌꺼기 같은 탄닌 등을 바르고 열처리를 하면 더이상 그 금속은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에 천연 염색인 '파티나 염료'로 원하는 색감을 내고, 조각과 커팅으로 원하는 모양을 만든다. 이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같은 작품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주변 제자들의 도움도 필요했다. 무거운 금속을 나르고 자리고 붙이는 작업은 여성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작품의 이미지와 느낌, 기획 등을 맡는 지휘관 역할을 하며 그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켜간다.
 
두드리다보니 열린 길
여성으로서 쉽지 않은 작품의 길을 어떻게 처음 걷게 됐을까. 그것은 아주 우연이었다고 김 작가는 말한다.
 
"60년대 대학 응용미술학과에서 디자인을 공부할 적이었어요. 명동성당 근처 헌책방을 가면 독일이나 미국에서 온 헌 잡지들이 많았는데 그것들을 보면서 공부한 적이 있었죠. 그 당시 '크라프트 호라이즌'이라는 공예전문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금속공예 작품이 실려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아, 금속만으로도 이렇게 예쁜 작품을 만들 수 있구나. 나중에 꼭 해봐야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크랜브룩 미술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게 되면서 기대를 품고 금속공예를 배우러 떠났죠."
 
하지만 금속공예는 그가 생각하는 예술이 아니라 막노동에 가까웠다.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금속을 녹이고 망치질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말 그대로 대장간에서 일해야 했던 것.
 
조각이나 회화만을 생각했던 그에게 서울에 있던 대장간에서나 보던 일을 해야 했으니 충격 그 자체였다. 5킬로짜리 망치로 열이 가해진 스테인레스를 때려야 했을 때의 고생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김 작가는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다른 남학생들은 힘이 좋아서 금새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저는 힘이 없어서 며칠을 울면서 망치질에 매달렸는지 몰라요. "
 
게다가 당시 미국은 반전운동과 히피문화로 인해 대학가가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문화나 정치적인 이해마저 달랐던 곳에서 그는 제대로 적응하기조차 어려웠다. 그것이 더욱더 금속공예에 매달리는 이유가 됐다. 힘들기만 하던 망치질도 때리다보면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아니면 금속공예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한국에 돌아온 뒤 그 재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75년 미도파백화점에서 귀국작품전을 시작으로 전시관을 잇달아 열었고, 그 결과 청와대에서부터 외빈과 식사할 때 필요한 금속 식기구를 만들어달라는 제안도 받게 된다.
 
김승희 작가@제주투데이
한국 금속공예의 위대함을 알리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한국적인 금속공예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대나무를 깎아서, 중국은 옻칠을 한 나무로 젓가락을 만들어요.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만 금속으로 만든 젓가락을 쓰죠."
 
이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한다고 김 작가는 한탄했다. 지금이야 싼 가격에 금속 젓가락을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예전에 금속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금속 젓가락을 만드려면 먼저 합금을 할 줄 알아야 해요. 철이나 구리, 주석 등을 어떻게 섞는지를 알아야 하죠. 둘째는 열이 필요해요. 철을 녹이려면 1,000℃, 구리를 녹이려면 1,200℃ 까지 올려야 해요. 그러려면 도가니도 있어야 하고 열을 관리할 수 있는 과학기술이 필요해요. 이 모든 게 갖춰진 다음에야 금속제품을 만들 수 있어요. 그야말로 첨단기술을 우리 선조는 가지고 있었던 거죠."
 
한국의 역사에서 어떻게 금속제품이나 금속공예가 발전했는지를 궁금해하는 외국인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 작가는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어 부끄러웠다고.
 
「사계가을-철, 적동, 황동, 폴리+안료180x160cm
그래서 그는 박물관이나 전통기능 보유자를 찾아다니면서 한국의 전통기법과 재료, 미학성 등을 연구했다. 하지만 한국 금속공예 연구도 부실하기 그지 없었다. 도자기 등의 연구는 진전이 많았지만 일제시대 때 금속공예 전통의 맥이 끊기면서 그에 대한 연구도 거의 이뤄져있지 않았다.
 
한국 금속공예의 위대함을 알리고, 그 맥을 계승하기 위해 김승희 작가는 실험적인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철의 여인이나 금속공예의 전설로서, 그의 예술은 한국 예술사에 큰 전환점이 되고 있다.
 

하염없는 생각
예술가로서의 창의성에 대한 고민은 깊어졌고, 1980년대부터 파격적인 시도들을 시작했다.
 
그저 기존 금속작품을 만드는 수준으로서는 '쟁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자신만의 작품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실용성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작품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고민이나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호기심과 창의성이 그런 '하염없는 생각'을 물리치고 예술에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
 
「풍경 95-13 1995」-철, 적동, 황동, 순금 90*63cm
1980년부터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산이나 노을, 바람, 계절을 표현한 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후 민화를 연구해 작품에 접목시키면서 현대 금속공예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 
 
2000년대에는 경계와 시간을 뛰어넘은 추상적인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 자연물과 기하학적 형태를 조합하거나 시적인 단상을 담아냈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이번 작품전 '금속으로 그린 풍경'도 그런 면모를 볼 수 있는 자리다.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성공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었죠. 생각하던 것들을 담아내다보니 어느새 주변에서 좋은 평을 보내주었어요."
 
지금도 김승희 작가는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철의 여인이나 금속공예의 전설로서, 그의 예술은 한국 예술사에 큰 전환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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