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했다.

고대 로마의 군사 전략가 베게 티우스의 말이다.

군사학의 고전(古典)으로 평가받는 그의 저서 ‘군사학 논고’에서다.

베게 티우스는 여기서 “군대의 생명은 부단한 훈련과 엄격한 군기에 달려 있다”고 했다.

“전쟁에서 승리는 숫자나 단순한 용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군기만이 승리를 보장할 것”이라는 논지였다.

‘전쟁’과 ‘평화’는 양극단의 반대 개념이다.

따라서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라’는 베게 티우스의 논리는 상호 모순이며 역설적으로 읽혀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역설의 논리 속에 폐부를 찌르는 교훈이 꿈틀거린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빛나는 잠언으로 살아 있다.

‘힘이 있어야 평화를 담보할 수 있고 힘의 균형이 평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평시에도 군대를 양병하여 훈련시키고 전쟁에 대비해서 아낌없이 투자해야 평화가 유지된다는 내용이다.

지금 한반도는 위기 상황이다. ‘4월 위기설’이 계속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 등 끊임없는 도발이 위기의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모한 도발에 대한 미국의 북한 선제 타격론이 위기설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가정을 전제로 한다면, 만에 하나 미국의 선제타격이 현실이 될 경우 한반도는 사실상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밖에 없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섬뜩한 재앙적 드라마다.

그런데도 국가 공동체는 오불관언(吾不關焉) 상태다.

정부든, 군대든, 대통령이 되겠다는 대선후보자나 각 정당 정치인, 사회지도층, 일반 시민까지 다 그렇다.

위기상황을 알면서도 모른 채 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고 그러는지는 알 수 없다.

무쇠 탈 같은 불감증이거나, 인지능력 부족이거나, 위기 상황에 익숙하여 면역이 되었거나 그 자체가 위기이며 위험한 상황인 것이다.

정부는 아예 손을 놓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쪽저쪽 눈치 보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군대 조직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군은 국가 안위의 최 일선 조직이자 최후의 보루다.

베게 티우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군의 생명은 강인함이다. 일당백의 강인한 전투력에 있다.

평소 철저하고 반복되는 고된 훈련과 실전 연습을 통해 대응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라도 전투에 임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군 작전에 부모 동의 받고 병사를  투입했던 사실이 밝혀져 충격이었다.

지난 3월29일 모 육군부대가 지뢰제거작전을 전개하면서 부모가 동의하지 않는 병사를 작전에서 제외했다.

민병대도 아니고 어린이 병정놀이도 아닌데 어떻게 엄정하고 신성한 국토방위 최 일선조직에서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는가. 군기가 빠져도 한참이나 빠졌다.

이 뿐만이 아니다. 군대에서 병사가 훈련이 고되다고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면 부모가 부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는 믿기 힘든 소리도 들린다.

어이없고 부끄럽고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의 안보의식이나 대응력도 ‘오십 보 백보’다.

그들은 미래를 관통하는 송곳같은 비전과 확고하고 철저한 안보관으로 국민 불안을 해소하고 위기를 극복하여 국가 안위를 책임질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안보관은 일관성이 없었다. 위기 대응 비전도 보여주지 못했다.

왼쪽 깜박이 등을 켜면서 우회전 하거나 애매모호한 눙치기로 소신과 책임과 철학을 얼버무리려고만 했다.

지난 13일 각 정당 대선후보 확정 후 가진 첫 TV토론에서 보여준 행태가 그랬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선제 타격론에 대해서다.

선제타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5명의 대통령 후보는 “선제 타격을 막아야 한다”는 일반적 총론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선제타격이 이뤄졌을 경우의 대응책에 대해서는 화끈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현실성도 실효성도 담보되지 않은 원론적 수준이거나 모호한 국면호도용 발언이 고작이었다.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일방적 공격은 안 된다며 선제공격을 보류 시키겠다”거나 “전쟁은 절대 안 된다고 하겠다”는 수준이었다.

“선제 타격 시 전국 비상경계 태세를 내리고 전투준비를 해야 한다”고 적극 대응을 이야기 했던 후보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선제타격을 하면 전화를 하거나 특사를 파견하겠다는 ‘사후 약방문’이 고작이었다.

이미 타격이 진행된 상태에서 전화 한 통으로 미 대통령이 “그런다”고 할리는 없다.

‘버스 지난 후 손 흔들기‘ 수준이 아니라 당장 미대통령과 담판하겠다는 배짱과 강단과 결기를 보였어야 하는 것이다. 선제 타격이 아니라 '선제 행동'을 보여줘야 했다.

대통령 후보들이 미국의 선제 타격을  반대한다면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억지할 방안은 무엇인지, 그리고 북한 핵 실험과 미사일위협을 효과적으로 해소할 대외적, 내재적 해법은 무엇인지 등 실효적이고 구체적 복안을 밝혔어야 했다.

대통령 후보들의 엉거주춤한 안보관을 접하면서 이들에게 어떻게 국민의 생명줄인 국가안보를 맡겨야 할지 여간 착잡하고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경제는 잘 먹고 덜 먹고의 문제다. 참고 견딜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안보는 다르다. ‘죽느냐, 사느냐’ 생사의 문제다.

허리를 졸라매더라도 절박한 생사의 문제를 해결 할 방안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그것은 힘을 키우는 일이다. 전쟁은 힘이 있어야 막을 수 있고 평화는 힘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평화는 구걸하여 가질 수 있는 ‘각설이 타령 수준’이 아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율곡(李栗谷)도 군사력을 길러 전쟁에 대비하자는 10만 양병설을 주창했었다.

그러나 조정의 반대와 신료들의 무관심으로 무산됐다.

이로 인해 결국 난(亂)이 터져 나라와 국권이 만신창이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고 한다. 비극은 여기서 싹트게 마련이다.

500여 년 전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되새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전술핵 재배치든, 독자적 핵 개발이든, 힘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동원 가능한 모든 국가 안보 옵션을 테이블에 올려놔야 할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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