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서명숙(60) 이사장이 회고록 『영초언니』를 펴냈다. 책에서 서씨는 40년이나 이어진 한 인연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그 인연의 주인공이 영초 언니, 천영초(64)씨다. 고려대 76학번 서명숙에게 이른바 의식화 교육을 한 같은 학교 72학번 선배이자 자취방 동숙인이다.

'영초언니'는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저자뿐만 아니라 당시 긴급조치 세대 대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실존인물 '천영초'에 대한 기록을 담은 책이다.

영초언니는 서명숙에게 담배를 처음 소개해준 '나쁜 언니'였고, 이 사회의 모순에 눈뜨게 해준 '사회적 스승'이었고, 행동하는 양심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준 '지식인의 모델'이었다.

천영초·서명숙, 두 여성의 젊은 날에는 박정희 유신정권 수립과 긴급조치 발동, 동일방직 노조 똥물 사건, 박정희 암살,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촘촘하게 맞물려 있다.

“4·3 사건 때문인지 제주도 사람은 우파가 대부분이었어요. 저도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손수 지었다는 국민교육헌장을 반에서 1등으로 외웠고, 71년 대통령 당선 소식을 듣고 ‘각하, 축하 드립니다!’라고 일기를 쓴 다음에야 잠에 들었어요. 물정 모르던 제주도 ‘촌것’이 대학 학보사 기자가 됐고 영초 언니를 만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됐어요.”

서씨는 79년 ‘산천초목’ 사건이라 불리는 공안당국의 기획수사로 구속돼 약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그 사건의 주동자(로 몰린 인물)가 천씨였다. 책은 서씨와 천씨, 그리고 ‘가라열’이라는 모임을 중심으로 한 운동권 여학생들의 이야기다. 서씨는 학생들을 고문한 일부 인물을 가명으로 쓴 것 빼고는 모두 실명을 사용했고, 자신이 겪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그러나 서씨가 길어 올린 20대의 기억은 너무 파란만장해서 극적이다. 몇몇 대목은 개연성 떨어지는 소설처럼 읽힐 정도다.

“한 달 동안 불법 감금을 당했어요. 감금됐을 때 자살을 시도했었지요. 80년 5월 광주에서 큰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았을 땐 언니랑 같이 광주에 내려갔어요. 제가 수감됐던 성동구치소에 만삭의 YH무역 노조지부장이 들어와 함께 지내기도 했고요. 일부러 안 한 얘기는 있지만 억지로 만든 얘기는 없어요.”

부끄러운 일화도 서씨는 거침없이 털어놨다. 이를테면 불법 감금한 경찰이 전기 고문을 하겠다고 끌고나갔을 때 바지에 오줌을 지린 일, 감방 변소에서 재래식 변기에 얼굴을 박고 몰래 담배를 피웠던 일, 운동권 동지로 만난 남학생에게 먼저 감정을 드러낸 일 등등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일화도 숨기지 않았다. 서씨는 “내가 올해 환갑”이라며 “뭐가 아쉬워 숨기겠느냐”고 되물었다. 덕분에 유시민·이해찬·심재철 등 카메오처럼 등장하는 유명인사와의 짤막한 인연도 엿볼 수 있다. 알고 보니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서씨의 결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07년 제주도로 내려오기 전에 원고의 절반 이상을 마친 상태였어요. 언젠가는 언니 얘기를 글로 남기고 싶었는데, 수의를 입은 최순실씨가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보고 40년쯤 전 언니가 호송차에서 내리면서 ‘민주주의 쟁취, 독재 타도’를 외치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때 원고 정리를 시작했어요. 우리가 지키려고 했던 민주주의를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서명숙 이사장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고려대 교육학과 재학 시절,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연행돼 236일간 구금생활과 감옥살이를 했다. 수감 이력으로 인해 한동안 정규직으로 고용되지 못하고 프리랜서 기고가로 일하다가 1983년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시사저널>과 <오마이뉴스> 편집장 등을 역임하며 23년간 언론계에 있다가, 2007년 제주로 돌아와 올레길을 만들었다. 현재 제주올레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제주올레의 성공신화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한국 최초로 사회적 기업가의 최고 영예인 아쇼카 펠로에 선정됐다.

문학동네, 288쪽, 1만3500원.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