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주년 5·18 기념식은 제주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5·18둥이 김소형 씨를 안아 주는 순간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지녀야할 공감의 품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9년 동안 부를 수 없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됐을 때의 감격은 지금 생각해도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다. 부러움과 기대가 교차했다. 내년 제주 4·3 70주년에 ‘잠들지 않는 남도’를 목청껏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에서는 제주 4·3 정명(正名)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다. 제주 4·3특별법을 개정해서 추가 진상조사를 하고 조사 결과를 토대로 4·3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제주 4·3이 오랫동안 ‘희생자’라는 논의 속에 갇히게 된 데에는 정치권은 물론이고 4·3 운동 진영의 책임도 있다. 제주출신이면서 일본 리츠메이칸 대학교에서 동아시아를 연구하고 있는 고성만 박사는 최근 펴낸 <희생자의 정치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주 4·3 평화공원이 해를 거듭할수록 거대한 기념물로 건설되는 동안 한반도의 통일정부를 갈망했고, 자치공동체의 실현을 지향했던 항쟁 주역들의 모습은 기념공간에서 삭제되어 갔다. 과거청산의 법제화가 오히려 제주 4·3의 저항, 자치, 통일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상실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5.18주간 금남로에 내걸린 현수막들. 5.18 민중항쟁이라는 용어가 보인다.

제주 4·3진상규명을 위해 과거청산의 법제화를 받아들이면서 제주 4·3의 본래의 의미를 우리 스스로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주 4·3특별법을 제정할 수 없었다는 반론도 있을지 모른다. 이는 상황논리를 앞세운 자기변명일 뿐이다. 5·18기념식을 보면서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여기에서 또 다른 싸움을 시작하지 않는다.

5·18 주간이었던 광주에는 아직도 5·18을 기념하는 세 가지의 언어가 충돌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부르지만 기념식을 준비하는 시민들은 5·18민중항쟁기념사업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옛 전남도청을 리모델링한 5·18 기념관은 5·18 민주평화기념관으로 불리고 있다. 광주에서도 여전히 민주화운동, 민주평화, 항쟁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충돌하고 있었다.

광주 국립 5.18민주묘역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은 1997년 김대중 정부 때였다. 5.18민주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된 때가 2002년 7월.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서였다. 2006년 1월에는 국립 5·18 민주묘지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광주 지역에서는 묘지 조성의 주체를 두고 국가단위의 추모의 필요성과 희생의 본래 의미를 찾으려는 움직임으로 분열하고 대립하였다. 광주에서 불리고 있는 항쟁, 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대립과 분열의 결과인 셈이다.

옛 전남도청에 자리잡은 5.18민주평화기념관

흔히 제주 4·3 정명(正名)은 국가가 4·3의 성격을 온전히 규정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해보자. 대한민국 정부가 제주 4·3을 항쟁의 역사로 공식 인정할 수있을까. 제주 4·3은 단선단정반대를 외치며 일어났던 저항적 움직임이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으로 고착화될 수밖에 없다는 백범 김구 등 당시 조선의 통일을 염원했던 시대정신이 제주 4·3에 담겨져 있다.

제주 4·3 평화공원이 개장했을 때 화가 박불똥의 ‘행방불명’과 만화가 김대중의 ‘오라리 사건의 진실’은 일반에게 전시되지 못한 채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얼굴이 게재된 당시 타임지를 콜라주했다고, 오라리 방화사건을 백악관과 연관 지은 표현이 외교적 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제주 4·3은 5·18과 성격이 다르다.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자체를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지만 이념대결이 될 수 있는 항쟁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70년이나 지났는데 제주 4·3은 정명조차 할 수 없는 것일까. ‘아직도’, 혹은 ‘여전히’라는 부사어 속에서 절망하면서 지내야만 하는가. 방법은 있다. 내년 4.3 70주년 기념사업회 명칭부터 제주 4.3민중항쟁 기념사업회로 이름을 바꾸면 된다.

국립 5.18민주묘역 조형물

정명은 누가 우리에게 내려주는 시혜의 산물이 아니다. 제주 4·3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 아니다. 제주 사람들이 제주사람들의 목소리로 항쟁을, 잊혀진 이름을 부르면 되는 것이다. 5·18 주간 동안 광주거리가 ‘민주화운동’과 ‘항쟁’이라는 용어가 서로 동거하듯이 우리도 제주 4·3사건과 제주 4·3항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된다. 어차피 한번은 치러야할 홍역이다. 4·3 정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대립과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대립과 갈등을 피하지 말자. 대립과 갈등은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역사는 대립과 갈등의 정반합을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 제주 4·3 진상규명운동의 1세대들조차도 여전히 사건이라는 호칭으로 제주 4·3의 정명을 유보하고 있는 태도는 옳지 않다. 우리가 제주 4·3을 항쟁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제주 4·3은 언제나 항쟁이었다.

2000년 제주 4·3특별법 제정 이후 우리는 스스로 항쟁이라는 언어를 버려 버렸다. 국가가 진상규명에 나서고, 대통령이 공식 사과하는 동안 제주 4·3의 진실 규명이 마치 다 된 듯 한 착각에 빠져버렸다. 야성(野性)을 잃어버리고 권력이 원하는 대로 국가가 원하는 대로 머리 조아리며 감읍했다. 제주 4·3의 정신은 버려둔 채 국가가 희생자로 인정해 줬다고 눈물 흘리고 고마워했다. 그렇게 국가가 던져주는 몇 푼의 떡밥을 두고 싸우고, 권력이 되어가지는 않았는가.

분열과 대립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오자. 프란츠 파농은 언어는 하나의 문화를, 하나의 문명, 그 무게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국가 추념일이라는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인정욕망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언어 ‘항쟁’을 되찾아 와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언어가 아닌 지역의 언어로 제주 4·3을 이야기하는 일이고 제주 4·3의 정신을 기리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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