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널리 알려진 파블로 네루다(1904~1973)는 칠레의 시인이자 정치가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노벨문학상에 대한 기이한 열망과 콤플렉스에 짓눌려서인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서 네루다를 높이 평가한 나머지 정치가로서 그의 면모는 무시하기 십상이다. 이것은 네루다에 대한 자칫 편향되고 왜곡된 인식을 낳을 수 있다. 네루다를 라틴아메리카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시인으로서만 강조한 채 정작 그의 시세계 안팎을 이루는 정치적 면모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한국사회에서 널리 사랑받은 이탈리아 영화 『일포스티노』(1994,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도 그 한 몫을 거들었다. 『일포스티노』는 어떻게 보면, 영화의 형식을 빈 시론(詩論)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네루다는 시와 전혀 무관한 어촌의 한 민중을 시의 매혹에 빠져들게 하고, 민중으로 하여금 시를 직접 쓰도록 한다. 말하자면, 『일포스티노』에서 네루다는 민중을 시의 길로 인도하는 모범적 시인으로서 면모를 보인다.

<사진=네이버 영화 네루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후 한국사회에 네루다는 그 이름을 직접 내건 영화 『네루다』로 다시 다가왔다. 『네루다』에서도 네루다는 시인으로서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네루다의 전 생애를 이루는 두 측면, 즉 시인(문학)과 정치가(정치)의 관계가 매우 밀도 있게 그려져 있다. 표면상 이 영화는 형사 스릴러물처럼 보이지만,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네루다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극중 인물 오스카 형사의 시선과 그 추적을 피해 망명길에 오른 네루다의 내면이 서로 포개짐으로써 일반 스릴러물과 성격이 다르다. 약간의 비약적 해석을 전제로 할 때, 당시 칠레의 곤살로 비델라 정권의 비밀경찰 역할을 수행하는 오스카가 파시즘 국가권력을 표상한다면, 칠레 공산당원으로서 네루다는 폭압적 국가권력에 쉽게 굴복하지 않고 민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면서 비델라 정권의 반(反)민중적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칠레 민중의 해방을 이룩하려는 시의 정치적 실천을 표상한다.

<사진=네이버 영화 네루다>

영화 초반부에서도 보여주듯, 네루다는 집권 세력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하는 정치인이다. 그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상원에서 연설하여 의원직을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반체제 정치 인사로서 체포령이 떨어져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비델라 정권의 반(反)민주와 반(反)민중에 대한 고발과 비판의 수위를 낮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도피 생활을 하면서 시집 『모두의 노래』를 왕성히 집필하기 시작한다. 비밀경찰의 추적을 당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네루다는 오히려 그가 도피 생활에서 마주한 칠레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의 언어로 노래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네루다에게 정치적 도피는 제도권 정치 안쪽에서 세련되게 다듬어진 시의 언어가 제도권 정치 바깥의 생생한 거리의 현실 정치와 직접 맞대면하는 경험 속에서 한층 민중의 삶과 현실을 육화시킨 시의 언어로 갱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에서도 네루다는 비밀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어 있다가도 도저히 참지 못해 동료들 몰래 민중의 거리를 거닐고 그것도 모자라 민중의 여흥 속으로 끼어든다.

<사진=네이버 영화 네루다>

그렇다면, 네루다는 도피 생활을 하면서 어떤 시를 썼을까.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음미해보자.

 

마포초 강은 검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독재자로 더럽혀진 도시의

말없는 거리 여기저기를 헤맸다.

아! 나 자신이 침묵이 되어,

내 가슴에 난 눈으로

사랑 위에 사랑이 얼마나 많이

떨어지는지 보았다.

이 거리, 저 거리, 눈 내린 밤의

문지방, 존재의 밤 고독,

가라앉은 내 민족, 어두운 민족,

죽은 이들을 교외에 묻은 민족,

이 모두, 창백한 조그만 빛줄기를

보내는 마지막 창,

이 방, 저 방 꽉 조인 검은 산호,

내 땅에서 결코 닳지 않는 바람,

이 모든 것이 나의 것,

이 모든 것이 나를 향해 침묵 속에서

입맞춤으로 가득 찬 사랑의 입을 열었다.

― 네루다의 「도망자」(『모두의 노래』, 고혜선 역, 문학과지성사, 2016) 중에서

 

비록 네루다는 폭압적 정권의 검거령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하고 있지만, 칠레와 칠레의 민중을 향한 그의 사랑은 “눈 내린 밤”의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껴안고 그 모든 것에 입맞춤할 수 있는 시의 언어로 충만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재밌는 장면이 있다. 네루다가 민중과 여흥을 즐기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수색을 나왔을 때 여장한 남창을 형사가 조사하던 중 그 남창은 자신이 방금 네루다를 직접 만났고, 네루다가 자신의 귓전에 대고 네루다의 시를 직접 속삭여준 순간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한다. 칠레의 유흥가에서도 소외될 처지에 놓여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진 남창은 영화 속에서 네루다의 유명한 시구절 중 하나인 “오늘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다.”를 나지막이 읊조리더니, 그 남창의 읊조림에 자연스레 화답하면서 네루다는 남창의 귀에 대고 시를 속삭인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입맞춤을 한다. 이 얘기를 듣고 있는 비밀경찰 오스카는 그들 사이에 일어난 이 충격적 사실을 휩싸고 도는 진실, 즉 칠레 민중과 네루다의 사랑을 침묵으로 헤아릴 뿐이다.

<사진=네이버 영화 네루다>

그런데, 오스카는 흔들리고 있다. 국가권력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는 오스카는 네루다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네루다의 시편과 글을 접하면서 흔들린다.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냉철한 이지적 태도를 보이는 오스카는 좀처럼 그의 내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거의 체포 직전 네루다를 놓쳤을 때 순간 그를 엄습해들어온 허탈감이 아주 빨리 스쳐갈 따름이다. 그럴수록 네루다를 검거하려는 오스카의 욕망은 커진다. 하지만, 그 욕망에 비례하여 서서히 네루다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애증 역시 커진다. 네루다가 떠나고 남은 도피처에서 오스카는 네루다의 연인 델리아를 만나는데, 오스카는 그녀로부터 “결국 당신도 네루다의 글을 사랑하게 될 거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들어서일까. 영화의 종반부에 이르러, 네루다는 칠레 민중의 도움으로 안데스산맥을 넘어가는데, 오스카는 홀로 네루다를 쫓아 안데스산맥 눈 덮인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다. 칠레 민중의 적극적 도움으로 안데스산맥을 넘는 네루다와 민중의 갑작스런 공격으로 더 이상 네루다를 추적할 수 없는 오스카, 이 둘의 정치적 지향점은 서로 다르다.

<사진=네이버 영화 네루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본다. 오스카는 혼자 네루다를 검거할 자신이 있어 끝까지 추적한 것일까. 오스카는 그동안 추적 과정에서 잘 알고 있다. 칠레 민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네루다를 체포하는 일은 쉽지 않다. 네루다를 검거하는 일이 자칫 칠레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켜 집권 세력이 원하지 않는 현실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을 영민한 오스카는 잘 안다. 그렇다면, 네루다를 어물쩍 놓아줄 수 있다. 힘들게 안데스산맥 깊숙한 곳까지 추적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카는 네루다를 쫓아간다. 영화 속에서 오스카는 혼자 남아 네루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 그리고 네루다는 그 소리를 듣고 오스카를 만나기 위해 눈벌판을 헤집는다. 네루다가 오스카를 찾았을 때 이미 오스카는 눈을 감은 상태였다. 오스카는 죽어가면서, 그동안 외면했던 칠레와 안데스의 자연을 호명한다. 비록 오스카는 살아 있을 때 네루다를 만나 오스카가 품었던 네루다와 관련한 숱한 질문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네루다의 추적을 마무리한 안데스의 대자연 속에서 그를 구속했던 정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스카는 죽음을 대하면서 민중과 해방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면, 네루다는 삶을 향한 강렬한 욕망 속에서 한층 자신의 정치적 실천을 향한 시의 언어를 갈무리하는 것이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난 지금 떠난다.

일촉즉발의 공포 가득한 오늘

난 민중을 향해, 삶을 향해 떠난다.

총잡이들이 옆구리에서 ‘서구 문화’를

끼고 어슬렁거리는 오늘,

나 여기서 굳은 결의 되새긴다.

스페인에서 살육을 자행하는 손들

아테네에서 흔들리는 교수대

칠레를 지배하는 치욕

나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리라.

나 여기에 머물리라.

또다시 나를 기다릴, 별처럼 빛나는

손으로 나의 문을 두드릴

말과 민중, 그리고 길과 더불어.

― 네루다의 「나는 살리라(1949)」(『네루다 시선』, 김현균 역, 지만지, 2010) 전문

<고명철은>7.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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