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광복절의 오전. 남원읍 의귀리 속냉이골(송령이골)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였다. 1.5톤 트럭과 소형 SUV와 승용차 등을 나누어 탄 그들의 손에는 예초기와 낫, 그리고 간단한 제물이 들려있었다. 이들이 찾은 속냉이골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두 팔을 한껏 벌리며 자라고 있었고 그 밑으로는 잡초가 무성했다. 속냉이골에는 표지판이 세 개가 세워져있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나무표지판의 글씨는 세월에 반쯤 지워져 읽기 어려웠다. 중앙에는 녹색으로 된 표지판이 있었다. 남원 4·3 순례길 표지판이었다.

남원읍 의귀리 속냉이골

속냉이골은 1949년 1월 의귀국민학교 전투 과정에서 사망한 무장대원들이 묻혀 있다. 이곳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1949년 1월 12일 새벽 6시 30분. 2백여 명의 무장대가 의귀리에 주둔하고 있었던 2연대 2중대를 습격했다. 2시간 전투 끝에 무장대 51명이 사망하고 퇴각했다. 당시 토벌대 사망자는 2명. 진압부대가 무장대로부터 노획한 무기는 M-1 소총 4정과 99식총 10정, 카빈정 3정이었다. 이 전투로 무장대 주력부대는 큰 타격을 받았다.

토벌대는 이 사건 이후에 의귀국민학교에 수감되어 있었던 주민 80여 명을 총살했다. 서슬퍼런 토벌대의 감시 때문에 80여 구의 시신은 커다란 구덩이에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몇 달 후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누구의 시신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의 시신을 세 개의 구덩이에 나눠 이장했다. 남원은 현의합장묘의 내력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속냉이골에는 1월 의귀국민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 시신을 매장한 곳이다. 주민들의 시신과 마찬가지로 무장대의 시신도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유족이 있었다고 해도 나설수조차 없었다. 토벌대의 눈을 피해 몇 명이 시신을 수습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한동안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있던 이 곳의 사연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4년. 제주도의회 4·3특위 강덕환 전문위원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제주도의회에서 4·3 특위 위원들이 4·3 피해신고 조사를 다니던 중에 무장대의 시신이 속냉이골에 묻혀있다는 증언을 들었다. 속냉이골은 작은 봉분 세 구와 비교적 큰 봉분 하나, 그리고 산담으로 둘러싸인 2기의 묘가 있다. 처음 증언에 따르면 오른쪽에 자리잡은 봉분이 무장대의 시신을 함께 수습한 곳으로 알려졌다. 직접 무장대 시신을 이장했던 이가 사망한 터라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이후 인근에 살던 주민 송모 씨가 봉분 형태도 갖추지 못한 세 구의 봉분이 무장대의 시신이 묻힌 곳이라고 증언했다.

증언 이후에도 이 곳은 무성한 자왈 투성이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2004년 도법 스님의 제주생명평화탁발 순례과정에서 천도재를 지내기 위해서 벌초를 하기 시작했다. 이후 제주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매년 8월 15일이면 이 곳 속냉이골 벌초가 이어졌다.

속냉이골 표지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세운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모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옛말에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먼저 큰 절부터 올리고 가라’ 했다.

바로 이곳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사건’의 와중에

국방경비대에 의해 희생당한 영령들의 유골이 방치된 곳이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2연대 제1대대 2중대는

남원읍 중산간 마을 일대의 수많은 주민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의귀초등학교에 수용하고 있었다.

1949년 1월 10일(음력 48.1.2.12) 새벽

무장대들이 피습, 주민 피해를 막아보려 했지만

주둔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희생되고 말았다.

이 때 희생된 십수 명의 무장대들은 근처 밭에 버려져 썩어가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곳에 묻혔지만

내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덤불 속에 방치돼 왔다.

우리 생명평화 탁발 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 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재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2004년 5월 13일

생명평화 탁발순례단 일동

‘빨갱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죽음은 기억조차 되지 못했다. ‘빨갱이’라는 낙인 앞에 ‘모든 죽음은 존엄하다’는 상식은 내팽겨진지 오래였다. 기껏해야 스물 언저리의 청춘들. 김달삼, 이덕구 등 당시 무장대 지도부의 나이라야 채 서른도 되지 않았다. 무장대 규모는 많아야 500명 안팎. 1949년 1월이면 그 전해 초토화 작전으로 무장대들이 활동 영역이 좁아지고 있었던 때였다. 토벌의 공포는 날마다 그들의 목을 조였다. 그보다 무서운 것은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산 생활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단선반대, 통일독립정부를 외치며 봉기했던 그 함성의 의미는 과연 지금 우리에게 잊혀진 과거의 유물인 것인가.

8월 15일 남원읍 주민들과 시민사회 단체 관계자들이 속내이골에서 벌초를 하고 있다.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겠다고 공언했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음도 분명히 했다. 해방 이후 분단만은 막아야 된다고 했던 수많은 정치 세력들은 남북 모두로부터 배척당했다.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외치며 그 추운 한라산을 헤매다 죽어간 이들. 그들에게 광복은 무엇이고 해방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죽어가면서 외친 통일독립의 외침은 이제 소멸된 것인가. 분명한 것은 그들은 ‘반쪽만의 광복’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을 넘어서는 것이 있다. 그들의 죽음은 죽음이기에 존엄하다. 그 불가역성의 비극 앞에서 ‘빨갱이’라는 낙인은 무용(無用)이다. 틈만 나면 ‘불량위패’ 운운하면서 남로당 무장대는 희생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이야말로 ‘쓸모없음’의 쓸모를 주장하는 자들이다. 

속냉이골 벌초를 마치고 가수 최상돈씨가 애기동백꽃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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