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변영진/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박사학위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주제로 했는데, 최근에는 아담 스미스의 윤리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시간강사이자 평화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제주의 40대 중반 남성이다. 특이점이 있다면 (사실 별다른 것도 아니지만) 근 20년 간 나름대로 철학이라는 학문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현재는 제주의 한 대학에서 철학과 관련된 몇몇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서양윤리 연구를 하고 있다.

나는 오늘 여기서 철학이라는 학문과 연관한 꽤 진지한 나의 고민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려 한다. 내가 말할 주제는 현재 어떤 누군가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어느 누군가는 아직 외면하고 있을 수도, 또 다른 누군가는 이미 극복한 문제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어 보이겠지만, 그동안 공부에 뒤따르는 나의 깨달음이 여러분들께 어떤 긍정적인 자극이 되길 바란다.

누구나가 그렇듯이 나 또한 특별한 경험을 갖고 있는데, 그를 통해 내 얘기를 시작할까 한다. 특별한 경험이라 할 수 있는 그것은 십 수 년 전 독일의 한 대학 강의실에서 있었다. 당시 나는 굉장히 순수했었다. 지금과 비교했을 때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열정은 존경할만한 정도였다. 철학에는 여러 하위 분과들이 있는데, 그 중 나는 논리철학(또는 논리학)을 전공으로 학업을 진행하려 했다.

유학 초기 어떤 노교수의 논리학 개론 첫 수업에서 일이 벌어졌다. 대학에서 여느 수업이 그렇듯이 그분은 한 학기 동안 다룰 내용을 주절주절 읊으셨다. 수업에 같이 있었던 학생들은 나에 비해 어린 20대 초중반, 교수님 말씀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구부정한 자세에 느리고 희미한 목소리 그 내용은 굉장히 지루했다. 하지만 내게 그분 말씀은 굉장히 중요했다. 이전 한국에서 원서로만 접해온 실제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감격이었다. 그리고 학위과정에서 지도교수로 삼고 싶었기 때문에 더욱 긴장하려고 애썼다.

문제는 오리엔테이션에 해당하는 내용을 마치신 교수님께서, 눈에 힘을 잔뜩 주고 하신 말씀에 있었다. 그분은 “학생 여러분은 한 학기동안 이 수업에서 논리와 관련된 기초적인 지식들을 배우게 될 텐데, 아무리 성실히 학습하더라도 그를 통해 실제로는 논리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말라”고 하셨다. 덧붙여 “그것은 마치 윤리학 수업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는 비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책에서 말할 수 없었던 그분의 오랜 공부에서 나오는 깨달음이었다. 마지막 그 말씀을 듣고 강의실을 나오며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리지어 나가는 학생들 뒤를 따르며 홀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던 복도의 휑한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물론 지금도 그것은 다르지 않다. 내게 괜찮은 사람이란 현명한 사람을 의미했다. 돈은 좀 없어도, 또 어떤 사회적인 지위가 없더라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사는 삶은 피하고 싶었다. 그를 위해 나는 철학 공부를 선택했다. 철학이라는 학문에서는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현명한 삶을 이끄는데 아주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존경해마지 않는 노교수는 내 그런 희망이 헛된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사실 나는 독일로 건너가기 전, 꽤 오랜 고민 끝에 한동안 가졌던 윤리학(도덕철학)에 대한 관심을 접고 논리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된 이유는, 바로 독일 노교수께서 지적하셨듯이 윤리학이란 학문의 실천적 한계였다. 어떤 저명한 도덕학자의 이론을 아무리 공부하더라도 나는 그가 주장하는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이 진리라고 인정하고 내 삶에 투영해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하기만 했다.

나는 가령 간혹 누군가에게 거짓말도 하고 시기심도 품곤 하는데 이론 학습을 통해서 평소의 그런 것들이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조금도!!! 수업시간에는 굉장히 고상한 듯 윤리에 대해 나불거리다가, 사석에서는 안면을 확 바꾸는 어떤 선배가 얄미웠었다. 윤리학은 내게 너무 버거웠다. 그러한 고민에서 논리학은 매력적으로 보였는데, 그것은 삶에 직결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논리학자가 되면 논리적으로(이성적으로) 현명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오판이었음을 그 노교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현명하게 사는 것은 도덕적으로, 논리적으로, 또 미적으로 등등, 즉 철학적으로 사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 노교수께서는, 윤리학은 선한 삶과, 논리학은 이성적인 삶과 그리고 예술철학은 아름다운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음을 일깨운 것이다. 윤리학이든 논리학이든 그리고 예술철학이든 그 어떤 철학을 공부하더라도 그와 관련된 삶 자체를 현명하게 만들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삶의 특정 부분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학문은 철학과 다르다.

가령 기계공학을 공부한 누군가는 그 이론을 통해 실제로 근사한 어떤 기계를 만들 수 있다. 그 공부(이론)의 수준 높음은 그 실천의 수준 높음으로 직접 귀결된다. 물론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철학이 다루는 내용은 삶을 이론적으로 깨우칠 수 있는 매개가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철학을 배우는 것, 아는 것 자체로는 나의 것이 되지 못한다. 자신이 이해하는(배운 그리고 깨우친) 철학이 삶에서 실천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통상 말하는 지식적인 것이 아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지금의 나는 지난날 노교수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믿고 있다-반론이 많겠지만 여기서 다룰 바는 아니라고 본다. 여러분들 중 누군가는 철학적 지식을 갈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욕구가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다. 일반인에 비해 조금 더 이론적인 지식을 갖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아직 너무 미미하고, 보다 읽고 또 생각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다.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철학적 지식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예외는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관심은 좋은 삶을 위해 요구되는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든 성취하려고 한다. 꼭 책이 아니어도,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또 지난 경험의 반성을 통해 그것을 얻으려 한다. 철학책 한 줄 읽지 않고도 어느 누군가는 지극히 현명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러한 그는 철학책에 나온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철학적인 어떤 생각(이론)만으로는 실천으로 나가기가 어려운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것은 노교수님께 빚진 현재의 내 결론이다. 우선은 굉장히 슬퍼 보이긴 하겠지만!!! 철학, 즉 삶의 이론은 큰 설득력을 갖지만 이론에 그친다.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실천력이 있어야만 한다. 선하게, 이성적으로 또 아름답게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만 현명한 삶으로 갈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삶을 사는 우리 모두의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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