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영수/ 제주대학교 교수를 퇴임한 후 전업소설가로 활동 중

전쟁영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사람 죽이는 장면이 많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인명살상의 잔혹한 장면이 없으면서 비범한 용기를 보여주는 영웅담은 상식적인 고정관념을 깨어주는 통쾌함이 있다 하겠는데, 나는 요즘에 읽은 <이방익 표류기>가 바로 그런 예라고 생각한다. 역사소설가 권무일 평설의 『이방익 표류기』는 버림받았던 낙도 제주섬 안에서도 작은 시골마을 조천면 북촌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놀람이 더 컸다.

18세기 말 한양에서 휴가차 내려왔던 정3품 무관 이방익의 일행 8인은 우도 앞바다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오다가 풍랑에 휩쓸려서 이리저리 떠다니는 16일 간의 표류 끝에 대만해협의 팽호도에 표착한 후 중국 천지의 명소들을 여러 달 유람하고 귀국하여 정조 임금을 경탄케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 사이에 그가 보여준 비범한 담력과 인내력과 지혜가 가히 영웅적이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16일 동안이나 거친 바다를 떠다니면서 기진맥진해진 사람이라면, 생면부지 낯선 사람을 대면할 때 살려만 줍쇼 소리가 저절로 나오고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 돌아갈 궁리로 바쁜 것이 보통사람들의 상식이 아닐까.

그가 불려나간 중국 관가의 모습이나 군병 집단은 조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람하고 위압적이었을 것이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 걱정도 컸을 것이다. 이같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겁에 질리지 않고 이를 오히려 희귀한 체험, 호쾌한 유람과 풍류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천만다행으로 현지 관리들에게서 호의적인 접대를 받으며 바다 건너 푸젠성(福建省) 샤먼(廈門)에 들어갔을 때 이방익 무사가 우선 행한 것은, 그 지방 출신 대석학 주희의 학통을 계승하는 자양서원에 예복 차려입고 참배하는 일이었다. 그 지방이 유명한 학자의 고향이라는 생각이나 동방예의지국 관리의 체통을 지키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부터가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헤매던 사람으로서는 대단한 일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나라 조선의 이름 없는 무사에게 청나라 황실을 방문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면 감지덕지 황공무지로소이다, 무조건 받아들일 일이로되, 풍류무인 이방익의 두둑한 배짱이 예사롭지 않다. 이왕 이 나라에 들어왔으니, 고래로 명사들의 무수한 상찬과 사연이 서려있는 동정호(洞庭湖)와 악양루(岳陽樓)와 적벽강(赤壁江)까지 본 다음에 북경행을 하고 싶다는 청원을 들였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방익이라는 인물의 첫인상과 풍모가 어떠했길래 이같이 파격적으로 과분한 환대를 받았을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조선시대에 바다를 표류하다가 중국대륙에 표착한 다른 인물들은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사례가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는 초면의 중국관리들에게 남다른 기품과 위엄과 후덕함이 배어있는 비범한 인물로 보였기에 그런 환대를 받았을 것 같다. 오죽하면 제주도 시골마을에서 28세까지 살았던 청년이 중앙의 무관시험에 합격하고 국왕을 지키는 호위무사 자리까지 올라갔을까, 그의 비범한 인물됨을 짐작케 한다.

그의 자전적인 표류기에는 이에 관한 자찬의 언사가 보이지 않는데, 이 점이 또한 그에 대한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당시까지 조선에서는 청나라 사절단에서조차 중국 강남지방에 대해서는 볼 것 많고 풍족하고 개명된 별천지라고만 알려졌고 직접 가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견문이 좁았다고 한다. 그같은 시대상황에서 경이로운 신세계를 자기 눈으로 직접 견학하고 와서 체험기를 써낸 이방익의 족적은 개혁군주 정조 임금과 완고불통의 조선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시야확대의 시범사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의 강남과 강북지방을 비교하는 부분은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역사를 보는 안목을 길러주는 데 시사점이 많을 것 같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 이방익 무사에게 제1의 고향이었던 제주섬을 제2의 고향으로 살고 있는 한 도래인(渡來人) 소설가, 권무일의 자상한 평설이 붙은 『이방익 표류기』는 흥미진진한 여행기이면서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역사문화탐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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