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양재 (李亮載) / 20세 때부터 고서화를 수집한 민족주의 경향의 ‘애서운동가’로서, 서지학과 회화사 분야에서 100여 편의 논문과 저서 2책, 공저 1책, 편저 1책 있음. 현재 ‘포럼 그림과 책’ 공동대표, ‘고려미술연구소’ 대표.

제주에서 가장 좋은 위치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서귀포 정방폭포 서편에 아주 이상한 기념관 하나가 서 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으로 보냈다는 서복(徐福 ; 徐市, BC255~?)을 기념하기 위한 ‘서복기념관’이라는 곳이다.

필자는 제주로 이주해 온 이후 그 절경을 찾아 가 보고는 기막히고 막막함을 느꼈다.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 나왔고, 내 영혼의 한 가운데서는 비명 소리마저 터져 나올 듯”하였다. 더 기막힌 것은 정방폭포 아래의 큰 바위에 판독 불명의 고대 문자라는 것을 ‘서복과지(徐福過之)’라는 뜻이라 주장하여 새겨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대문자는 한자가 아니며 도저히 ‘서복과지’로 읽힐 수 없으므로, 20세기 전반기의 육당 최남선 같은 이들은 이를 신지문자(神誌文字)로 보았다. 이미 마멸되어 없어진 정체불명의 문자를 ‘서복과지’라고 주장하는 민간에서의 비학문적인 막연한 주장을 큰 바위에 다시 새겨 놓은 행위는 문화적 문맹 행위로 느껴졌다.

서복이 진시황을 속이고 막대한 재물을 사기(詐欺)친 후에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와 권118 ‘회남형산열전(淮南衝山列伝)’에 나온다. 즉, 서복 기사는 사마천의 [사기]가 그 원형인데, 사마천의 [사기]의 그 내용은 다소 불명확한 점을 추정하여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서복이 실존 인물이라고 하고, 진시황의 불로에 대한 욕구가 사실이라고 해도, 사마천은 서복이 나라를 세웠다는 당시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단정적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사실 기록이기 보다는 진시황을 사기 친 희대의 사기꾼과 어리석은 진시황을 비판한 전설적인 기사라는 것을 독자들은 판단하여야 한다.

고려말 조선초의 모화사상에 찌든 사대주의자들이 사마천의 사기에 편승하여 국내의 명승지 몇 곳을 서복과 관련된 유적지로 각색한 것이 이른바 요즘 회자되는 국내의 서복 유적지이다.

민족주의적 민족사관적 입장에서 보면, 서복의 한반도 방문은 모화사상의 사대주의자들이 중국 [사기]를 확대 해석하여 만들어 낸 허구인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서복기념관’을 서귀포의 가장 경치 좋은 곳에 건립한 것은 조선시대의 모화사상에 가득 찬 사대주의자들의 무비판적 정체불명의 춤판에 현대인들이 꼭두각시 되어 춤을 춘 꼴로 비판하고자 한다.

중국인들에게 서귀포의 ‘서복기념관’은 마치 서복 일행이 제주에 탐라국을 세웠고, 고대의 제주인들이 서복 일행의 후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갖게 하고 있다.

그런데, 기원전 90년경에 완성된 사마천의 [사기]가 국내로는 언제 유입되어 들어 왔을까? 필자는 사마천의 [사기]는 8세기 말에 당으로부터 신라로 유입되었고, 12세기에 이르러서야 널리 읽혀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조선이 유교의 실천을 국가의 정치이념으로 정하고 모화사상이 등장하면서 이 책의 수요가 확장하였고, 국내에서도 출판하게 되었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사기]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세종초기에 경자자로 찍은 금속활자본이다. 경자자가 1420년부터 1434년 사이에 사용된 활자이고, 인쇄 상태를 보았을 때,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세종7년(1425년) 1월 24일조에 “사마천의 [사기]를 인쇄하여 반포하고자 하니, 그 책을 인쇄할 종이를 공물로 닥나무를 사서 제조하여 올려 보내도록 하라”고 세종이 충청 전라 경상도 감사에게 지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이 경자자본 [사기]는 1425년경을 전후로 한 시기에 찍혀진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이 책을 관판본(官版本)으로 간행한 이유는 정본(定本)을 요구하는 그만큼의 수요가 이미 조선초에 있었다는 말이다.

원래 문화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상호간의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고대의 우리나라 문화가 고대 중화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면 고대의 우리 문화도 고대의 중화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고대의 우리나라 문화가 일본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면, 고대 일본의 문화도 고대 우리나라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외래의 문화를 맹목적으로 과신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제는 중국인 관광객으로부터도 외면 받는 서귀포의 ‘서복기념관’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바탕으로 하여 한중 상호간의 고대문화교류기념관으로 발전적으로 개편하여야 한다고 본다. 물론 서복의 기념사업에 간여하는 분들은 필자의 주장에 대노(大怒) 할 일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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