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영철/ 한솔제지 퇴직. 트레킹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완주/ 저서 4권/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 동해안 해파랑길/ 영국을 걷다/ 투르 드 몽블랑

1.

인터넷 지도를 펼쳐놓고, 한림읍 금능리 끝동네에서 한림중학교까지 거리를 재봤다. 왕복 9km가 나온다. 지금은 올레 14코스의 일부가 된 해안도로 구간이다. 제주시로 전학 오기 전까지 비록 1년간이지만, 저 거리를 매일 걸어서 통학했다니, 생각해보면 스스로 대견해진다. 책가방 둘러매고 집에 오다가 가끔은, 옹포와 협제에 사셨던 두 분 고모님 댁에 들르곤 했다. 앙꼬빵(?)과 계란 후라이, 어쩔 땐 삼양라면까지 끓여주셨다. 반세기가 지나도 잊을 수 없는 맛이다. 

소매에 코딱지 묻힌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개구리 잡아먹고, 광 속에서 쥐 잡아 구워먹던 시절이었다. 꼬닥꼬닥 걸어가다 아무데나 퍼더앉아 비양도를 바라보노라면 금세 피곤이 풀리곤 하였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총총 걸었던 추억만 있지, 어린 몸에 등하굣길이 힘들었던 기억은 전연 없다. 고등학교 들어가니 원보훈련이라는 게 있었다. 교련복 입은 학생들이 기다란 줄을 지어 제주시에서 한라산으로, 서귀포로, 1박2일 동안 온 세상(?)을 누볐다. 중학교 통학하며 ‘걷기’에 단련돼 있던 나에겐 식은죽 먹기였다. 답답한 교실 안과 비교하면 수다쟁이 친구들과의 꿈같은 ‘여행’이었다.

2.

고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객지살이를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고향 친구들에게 ‘육짓것 다 되었다’는 ‘쿠사리’를 먹기에 이르렀다. 내가 자신 있어 했던 ‘걷기’와도 멀어진 삶이 되어 버렸다. 주중엔 회사, 주말엔 ‘방콕’이 반복되는 회사적 인간의 전형으로 변해 있었다. 배낭 하나 짊어지고 먼 길을 걷는 내 모습을 늘 갈망은 하면서도 단지 상상뿐이었다. 게으름 때문이건 여건 때문이건,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더 간절해지는 법이다. 언제부턴가 인터넷에서 ‘세계 10대 트레일’을 검색하는 일이 습관처럼 되었다. 세상의 좋은 길을 찾아 영화 속 주인공처럼 폼나게 걷는 나의 모습이 점차 인생 후반의 꿈으로 자리잡아갔다.

3.

“29년 회사생활 마감하고 내일부터 저 백수입니다. 이젠 가진 게 시간밖에 없으니 자주 좀 불러주시고 많이 놀아주세요.” 퇴직을 통보 받던 날, 핸드폰에 입력된 지인들에게 단체문자를 보내는 것으로 퇴직신고를 한 번에 마쳤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쏟아지는 주변의 위로에 ‘나 괜찮다’ 애써 여유 보이며 태연한 척 호기를 부렸지만 돌이켜보면 허세였다. 

아침 출근할 곳이 없어진 백수 첫 해가 밝았고 남해의 바래길로 떠났다. 난생 처음 시도해본 나홀로 배낭여행이었다. 3박4일간 남해 70km를 혼자 걸으며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중고등학교 때의 내 모습을 비로소 찾은 듯했고,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도 섰다. 묘한 첫 경험이었다. 그 후 5년의 세월이 흘렀고 지금은 ‘걷기’와 ‘여행’이 내 인생 후반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 있다. 오랜 세월 고향 떠나 방황하다 이제야 내 둥지로 회귀한 기분이다.

4.

우리 사는 동안 누구에게나 스트레스란, 피해갈 수 없는 삶의 일부이다. 과외에 쫓기는 아이들부터 외로움에 내몰리는 어르신들까지, 우리 주변 스트레스엔 남녀가 없고 노소가 없다. 학생, 직장인, 사업가, 전업주부…, 어느 누구건 나름의 스트레스를 거듭 쌓으며 살아간다. 쌓인 만큼 허물고 해소해야 할 텐데, 그 방법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여건이 안 되어 시간만 흘려보낸다. 취미, 사교, 여행 등 남들 하는 거 따라 해보지만 ‘남들만큼 나도 즐긴다’ 정도의 자기 위안뿐이지 스스로 행복해지기란 쉽지가 않다. 행복이란, 스트레스를 줄여나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5.

주5일 쉼 없이 일하고 주말에 ‘방콕’만 한다고 해서 휴식이 되는 건 아니다. 몸이건 머리건 우리의 근육세포와 뇌세포들을 열심히 움직여줘야, 몸과 마음 속 덕지덕지 붙어있던 온갖 노폐물들이 쓸려나간다. 진정한 휴식과 자기 정화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휴식과 자기 정화에 ‘걷기’만한 저비용 고효율 수단이 많지 않음을, 지난 5년간 경험을 통해 실감했다. 마음에 평온을 가져오고, 가끔은 난제에 답을 찾아주기도 하면서 언제나 온몸의 세포를 분발시켜주는 에너자이저이다. 먼 길을 걸을 때 한 사람의 뇌리에 쌓여가는 상념들은 때로는 우주를 품을 만큼 깊고 원대할 수도 있다. 마음에 평온을 가져오고, 일상의 난제에 해결책을 찾아주고, 온몸 근육세포를 분발시켜주는 것이 ‘걷기’이다.

6.

낯선 곳을 걷다가 갈림길 앞에서 종종 주저하곤 하였다. 지도 표기도 애매하여 판단이 안 선다. 내 앞과 뒤로, 물어볼 누구도 보이질 않는다. 전에 나는 이럴 때 어떠했나 머리를 짜보아도 뾰족한 수라곤 없다. 잠시 망설이다 직관이 가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맞는 방향이었던 경우는 절반 정도였다. 간 길 되돌아 다시 그 자리로 와야 했거나, 먼 길 돌아 헤매고 헤매다 어찌어찌 옳은 길로 들어선 경우도 많았다. 회사적 인간이었던 동안 나에게 그런 헛길들은, 에너지 손실에 무의미한 시행착오였고 스트레스였다. 

여행과 친숙해지던 언제부턴가 그 길들도 내 여행의 일부가 되었다. 예정치 않았던 또 다른 낯선 곳을 알게 해준 소중한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여행이 내 마음에 가져다 준 ‘소소한 변화’들 중의 하나이다. 멀리 돌이켜보면 지난 인생에 헛길들도 많았다. 그때 그 길을 헤맬 때의 나의 마음이 지금과 같았더라면 참으로 좋았겠다. ‘소소한 변화’들이 그때부터 쌓였더라면, 이후의 내 마음 세계가 보다 더 폭넓고 풍요로워졌겠다. 아쉽긴 하지만 늦지도 않았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오늘은 내 남은 인생이 시작되는 바로 그 첫 날’인 것이다.

7.

‘걷기’에 관한 한, 우리 제주만큼 천혜의 환경을 선사 받은 곳이 어데 있을까? 대문 나서면 올레요, 눈 앞엔 오름들이다. 샤려니, 절물, 비자림, 한라산 둘레길까지 안 가도 된다. 구제주 시내면 어떻고 신제주면 어떤가. 제주의 바닷바람이 365일 24시간 수고를 마다 않고 고향 땅 곳곳을 청소해주고 있다. 혼자 짐 없이 공항에 내릴 땐 택시나 버스는 잘 안 탄다. 연동 동사무소 앞까지 혼자 꼬닥꼬닥 걸어가는 그 시간이 나는 너무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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