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 재경 제주사회문제협의회 대표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동북지방에서 몽골, 신강까지 걸쳐 있다.

지루한 기차. 사막 모래바람이 기차도 전복시키기 때문에 천천히 운행한다

몇년전 나의 오랜 멘토이자 술벗인 소설가 어른이 실크로드 몇이서 가자고 했으나 5,6일짜리 여행이라면 따라 가겠는데 날짜가 길어서 못갔고 그 이후에도 친구들이 가자는 것 못가다 이번에 큰 마음 먹고 간 셈이다. 물론 전에 따라 갔으면 재미있는 토론과 귀동양도 꽤 있었을텐데.. 

이것을  먹고 낙타가 사막을 건넌다. 마른 이 풀은  먹으면 목에 피가 나는데, 낙타는 물이 없으면 그 피를 먹으며 간다

명사산, 막고굴,

천산에서 계속 내려오는 물이 있고, 솟아나는 물이 있어서 생활과 농업이 가능하다.

모래소리가 윙윙 운다고 명사산. 사람들이 밟은 모래자국도 하루 지나면 깨끗이 새로워 진다고. 거의 2천년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돈황의 사주 야시장. 돈황은 과거 沙州라고 불렸었다.

중국은 67년 후한때 불교를 전래 받았고 우리는 위진 남북조시대때 전진으로 부터 고구려가 소수림왕때인 372년에 불교를 전래받았는데, 이 막고굴은 전진의 승려 악준이라는 사람이 처음 개굴하기 시작해서 이후 원대까지 1천년 동안 각 왕조에서 계속 뚫고 만든 것이다.

북위와 북주, 특히 수 당때 전성기였고, 토번과 서하때만 이 굴이 잊혀졌었다.

그러고 보면 북위와  북주, 수나라도 한족이 말하는 북쪽의 오랑캐인데 오늘 한족은 이들 덕분에 먹고 사는 것이다 

한족이 업신여기는 이들 오랑캐라는 민족들은 실제로 한족에 비해 문화 감각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북위가 만든 운강석굴, 대동석굴의 경우 르네상스시대의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하기 1천년 전에 웅대한 천장 조각을 완성할 정도이다.

그리고 이 석굴들의 작품들은 여러 왕조시대의 뛰어난 화가들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민초 화공들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북쪽 끝에 뚫린 석굴들이 화공들의 거주지임이 밝혀 졌는데 장경동에서 발견된 문서 중에 비좁은 굴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생활한 내용들과 신세 한탄의 내용들이 적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근본적인 질문.

왜 중원이 아니라 이 척박한 기후의 땅에 이런 장시간의 노력의 산물인 막고굴을 만들었을까?

1900년  똘중 주지 왕원록  도사가 토사를 치우다가  곁굴을 발견했고. 숱한 경전과 회화유품 , 그리고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등이 발견되어 장경동이라 하는데, 그 이후 동전 몇닢에 거기서 발견된 유물들을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 펠리오, 일본의 오따니에게 팔았고, 러시아와 미국의 고고학자들까지 달려들어 벽화까지 뜯어갔다.

내게는 중국인들이 문화재보호 자연보호를 이야기하면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그들의 자연보호 의식은 개판.

중국 산을  10개이상 올라봤는데 이번의 천산을 빼고 나머지 산은 거의 정상까지 모두 케이블카가 있고  나무를 베고 케이블카 기둥을 세우는 것외에 산에는 길에 괜히 평지나 약간의 경사에도 돌로 포장 또는 계단이 깔려지고, 산의 암벽에 아주 굵은 쇠 기둥을 박고 굵은 쇠줄을 잇는 것 뿐만 아니라 거대한 암벽에 빨간 글씨로 글자들이 숱하고, 산위에도 호텔, 음식점이 숱하다.

문화재 역시 어떤 경우, 저렇게 방치해도 되나 싶은..

이 돈황석굴도 주은래의 은밀한 지시로 문혁기에 홍위병들의 파괴로부터 그나마 살아남은.

이런 중국인들이 문화재보호 자연보호를 말하면 황당할 뿐이다.

돈황 박물관,

돈황박물관 입구의 구호. 화융이라니.. 중화와 오랑캐. 이 단어는 몇몇 동서문화교류사 서적들에서도 봤는데 보통명사화된? 

정말 이해 안되는 중국인들의 선민의식과 토착민들과의 진정한 통합의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왜 괴수를 종종 만드는 지는 이유를 모르겠고, 쌍봉낙타는 고비사막에만 있는 특유의 낙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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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 비슷한 ?

일반열차와 고속열차 한번씩을 탔다.

원래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일반열차는 2박 3일 걸리고, 고속 열차 또한 사막지대의 강한 모래바람 때문에 천천히 달리지만 그래도 전면부의 전광판은 200키로의 속도를 보여주니 훨씬 빠를 듯 하다.

중국 고속철의 속도는 최고 400키로대로 지금 전 세계 고속철 중 가장 빠르다.

대단한 발전이다. 땅이 넓으니 이곳저곳에 계속 고속철을 늘리면서 이런 놀라운 발전이 이뤄지나 보다.

최근 5년간도 평균 성장률이 7%대, 90년대 초부터 중국 여행을 해서 그들의 눈 부신 변화가 비교되는데 놀라울 뿐이다.

태양열 발전, 드론, 전기 자동차분야는 세계 1위이고, 핸드폰이나 밧데리, 자동차도 따라오는 속도가 아주 빠르고, 요즘은 반도체 따라잡을 생각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고.

우리는 대표적인 철강, 조선, 자동차, 화학, 반도체 중에서 조선과 철강은 스웨덴 말뫼의 시민들이 눈물 흘렸던 것처럼 많이 기울어지고 있어 앞으로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보장을 못하는 단계이고 자동차도 급격하게 하강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중국은 거대한 규모의 내수시장이라는 요소가  이런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하고 있다. 물론 국가부채가 급격히 늘고 버블 가능성을 IMF 등과 같은 기관등은 계속 지적하지만 걱정 말라는 투다.

그리고 이런 성장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점점 패권주의 형태를 띠며 주변국과 충돌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라고 이름 붙일수도 없는 이데올로기적 타락과 공산당 당원(공무원)들의 타락, 부의 독식. 국가는 패권주의 행태까지.

제2의 바람직한 사회주의 문혁이 일어나든지.. 오늘날 썩어빠진 중국의 모습은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화하면서 대책이 없게 굴러간다.

지향점을 잃은 중국 공산당과 그들의 엉터리 사회주의.

또한 중국은 앞으로 세계 경제를 점점 좌지우지 하겠지만, 인류의 정신사 발전 측면에서 중국 철학은 현대에 들어서도 신유가등과 같이 과거만 우려 먹으며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지 못하는, 즉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사상을 맨 처음 분류한 사마담(사마천의 아버지)의 틀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침 금년 가을에는 19차 중국 공산당 대회가 열린다.

원로들이 사전에 모이는 베이다이허 회의에서는 전통적으로 다음 후계자를 정하는데, 만일 정하지도 못하고 시진핑의 독주에도 반대할 수 없을 정도의 분위기 였다면 차후 언젠가 상해방과 공청단 세력들의 큰 반발로 속으로는 부글부글 하다가 다시 크고 작은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 놈이 그놈이라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무관심이 팽배하다니 근본적 문제 해결은 난감.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든 정치적 자유와 인권의 문제든 자기들의 문제는 지배세력과 그에 빌 붙은 세력들이 해결해주지 않으니 민중이든 인민이든 그들 자신이 가열차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떨쳐 일어나야만 해결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길, 서안에서 감숙성까지는 과거에 하서회랑이라고 불린 길이기도 하다.

서안의 서쪽에는 스찬성과의 경계이며 태백산을 품고 있는 진령(친링)산맥이 있는데, 이 산맥의 옆에는 황하에서 갈라져 나온 위수와 길(지금은 철로길)이 더불어 서쪽으로 달린다

작가 김명인은  실크로드를 여행하고나서 쓴 기행문에서 서안에서 우루무치까지의 2박3일 기차속에서 한 무제 이래 당나라등 이 길을 따라 멀리 변방으로 떠났을 수많은 병사들이 발길이 안떨어져 계속 뒤돌아보며 걸었을 수많은 날들과 그들의 애 닯은 심정, 변방 경비를 마치고 고향으로 귀환하는 병사들이 달리며 돌아왔을 심정을 상상한다. 하서회랑은 수많은 민초들이 능히 그러했을 애환의 길이었을 것이다.

하미 박물관, 彩陶의 길

돈황 박물관은 막고굴 그 자체가 박물관이어서 그런지 전시품이 적었는데 하미 박물관은 전시품의 수량이나 다양성이 풍부했다. 시간이 좀 더 주어졌으면 자세히 보고 싶은 곳이었다. 박물관의 외형부터 아랍풍이 가미된.

좋은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곤륜옥'이라는 단어처럼 곤륜산 옥은 최고 품질의 옥으로 유명하지만, 곤륜산에서 비와 함께 내려오는 것은 옥외에도 다양한 모양이나 색깔의 돌들이 있다고. 그 돌들을 모아서 음식 모양을 만든 것이라는.

중생대 시조새 화석 같은데? 시간에 쫓겨 자세히 보지 못하고 찍은..

중생대 암모나이트. 이런 다양한 화석들이 무척 많이 전시된.

이 지역은 여름에 보통 섭씨 45도 이상. 사막과 아스팔트 시가지 지역등은 상상도 못하는 더위이다보니 미이라가 이집트의 경우처럼 약품 처리하지 않고 자연 건사한 것이라는데, 이 박물관 유리바닥 밑에 진열된 화석들이 너무도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같은 이유 아닐까. 해설사가 없어서 내 혼자 하는 상상.

하미 박물관의 중요한 진열품은 돈황박물관에서 못 본 것같은 이 채색이 입혀진 도자기들인 듯.

彩陶의 전래 즉 채도의 길을 시사하는 중요한 증거품이라고 하미 박물관의 채도에 대해서 동서 문화교류사의 권위자 정수일교수(깐수)는 지적했었다.

채도 논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채도 전파의 의미를 넘어 어디서 전래되었느냐, 자생되었느냐는 서구 학자들과 중국인들의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자존심 논쟁까지 관련되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신석기시대 주요 문화권의 하나인 '채도 문화권'은 가장 빠른 것이 기원전 7000년전의 이라크 자모르 채도이며, 다음이 투르크메니스탄 아나우 채도가 기원전 5000년전, 중국 뤄양 부근 앙소 채도가 기원전 3500년경이다(인도 모헨조다로 유적지가 BC3000년경, 중국 은허가 BC1500년경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하다)

중국 채도의 자생설을 주장하던 중국 학자들은 서아시아와 중국 사이의 전래를 증명할 중간지역의 채도 유물이 없지 않냐고 이야기 하다가 아나우 채도에 이어 하미지역처럼 신강일대에서도 채도가 연이어 발견됨에따라 난감해 하는 입장.

즉 채도문제는 이것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문물, 문화의 서래설 즉 고대 중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깨져 들어가는 문제가 연관되어 있어서 찜찜한 것이다.

이렇게 채도를 통해서도 아시아의 동서에 문명요소를 공유한 하나의 긴 문화대가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리공예, 금관과 같은 금 장식 문화의 전파 과정도 나타나고 있듯이, 한나라이후의 비단이나 종이, 그리고 유명한 중국의 3대 발명품 화약, 나침판, 인쇄술도 전파되었지만 그 이전 아주 오래전부터 이 지역은 그 혹독한 날씨와 타클라마칸과 중가리아분지라는 죽음의 사막, 거대한 천산산맥, 심지어는 고비사막까지 넘나들면서 서로 간헐적인 교류가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혹독한 날씨를 잠시나마 맛본 경우지만, 역경을 극복해온 인간의 의지와 능력이 대단하구나 절감했다

그런데 이 토기의 시원과 관련해서 학자들 사이에 큰 의문점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자리가 잡힐 수도.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책 [총, 균, 쇠]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는 일본에서 약 12700년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기술하면서 중국과 블라디보스톡 지역의 토기들이 그 뒤를 잇고,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유럽보다 1천년 오래된 세계 기록을 보여주는 이유에 대해서 의문점을 제시한다.

즉 1만3천년전에 전 세계 빙하는 급속도로 녹기 시작했지만, 그 전까지 일본은 한국, 러시아 연해주, 중국 남부지방과 연결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문물들이 한반도에서 도래되었다는 점과 일본의 느린 문명 발전과정을 생각하면 일본의 세계 최초 토기라는 점은 이상하고, 언젠가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더 이른 시기의 토기가 발견되지 않을까 서술하고 있다.

멀리 만년설산이 보인다. 누군가 저곳도 천산산맥이라는데 지도상 위치를 보니 몽골과의 경계선인 알타이산맥 같은데..

熱風

사막지대에 이상한 모습의 돌산들이 있어서 마귀성이라고 부르는 곳.

하미도 넓게는 투루판 분지에 포함된 지역이라서 일까 다음에 며칠 있게 되는 악명 높은 투루판의 날씨를 미리 맛보게 해줬다.

게다가 걷기도 힘든 온도에서 열풍이라는 것 또한 평생 처음 느꼈다. 사막지대에는 바람이 강하게 불면 무섭다는데 높은 기온에 바람이 몰아오는 열풍은 내가 잠시 느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데도 정말 대단해서 안경 안으로 코로 입으로 들어오는데 엄청났다

이런 척박한 기후에도 사막을 건너는 대상들을 습격하기 위해 여기서 산적들이 기다리며 살았다고. 굴이 파인 흔적이.

당시 상인들은 목숨을 건 교역이었다. 저멀리 떨어진 산이나 언덕배기들을 기억하면서 산적들을 피하면서 사막에서 길을 잡고 건넜을텐데 , 지구상 최 고온 지역중의 하나인 이곳은 대륙성 기후지역이기도 해서 년간 심지어 하루 중에도 기온 차가 극심한 한계 상황의 날씨를 견디면서 그리고 아라비아 대상들이 이용해서 발전하게 된 천문학의 경우처럼 해와 달, 별을 연구하면서 낙타에 의지한 채 고행의 교역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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