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 재경 제주사회문제협의회 대표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동할 때마다 나타나는 사막.

그리고 과거 이 지역이 바다였음을 말해주는 노지의 소금.

쿠무타크 사막. 타클라마칸사막의 일부.

타클라마칸이나 고비사막은 자갈이 섞인 흙 형태의 사막이지만, 신강지역에는 사하라사막처럼 모래사막도 있다.

사막지대와 명확히 구분되는 오아시스지역. 이 오아시스지역이 척박한 사막지대에 그나마 드문드문 있어서 문명의 꽃이 피워졌고 동서 문화교류도 이어질 수 있었다.

화염산옆의 고창국 성터.

한족출신의 국문태가 서기 500년경에 세워서 640년 당에 멸망할 때까지 고창국은140년간 존립한 불교를 숭앙한 국가였다. 궁전부근 절터에서 밑에 사진처럼 인도식 방형탑 흔적을 볼 수 있다. 불교의 동전을 말해주는 유적이다.

투루판

하필이면 왜 이 뜨겁고 숨 쉬기 힘든 이 부근 척박한 땅에 투루판의 여러 문명들이 꽃을 피웠을까?

사막에 오아시스 지역이기도 하지만, 잠깐 벗어나면 이런 척박한 사막지역인데...

돌궐어로 '풍요로운 곳"이라는 뜻의 투루판.

사방이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동서 120키로, 남북 60키로의 사막속 작은 분지 오아시스다.

투루판 지역 중 80%가 해수면보다 낮다. 해발 -154미터인 지점도. 높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고도마저 낮으니 태양열이 주위로 발산 할 수 없어 더울 수 밖에 없는 지형이다. 火氣에 숨이 막힐 지경.

한여름 낮에는 평균 섭씨 50도에서 약간 밑돌며 지열까지 더해지면 최고 80도 가끔 넘고 게다가 강풍이 불어대기도 한다.

한여름과 한겨울의 기온 차는 60-70도 증발량은 강우량의 180배인 최악의 極限지대다.

고온, 건조, 강풍이라는 세가지 특징의 이 투루판 지역은 옛날부터 火洲(불의 땅), 沙洲(모래의 땅), 風洲(바람의 땅)라고 불려왔던 곳이다.

문명은 온대지방, 그리고 강물이 많고 심지어 범람해서 비옥한 토양인 곳에서 발전하기 쉬운데, 이 지역 사람들은 극한의 조건인 불, 고온은 포도나 면화 생산으로, 모래지역이라는 환경은 카레즈라는 관개시설로, 바람은 오늘날 에너지 자원으로 전환해서 활용하고 있다.

인간의 생존 능력은 어떤 상황까지 가능한가?

물론 인류는 신생대의 빙하기를 이겨온 존재지만 그 생존력의 무한함에 놀라울 뿐이다.

빠른 온난화의 진행으로 앞으로 지구의 평균 기온이 3도만 높아져도 생태계는 현재와 달리 급격하게 변화되어 추운 지방으로 대 이동이 있을 수 밖에 없고, 사람처럼 숲이 빠르게 이동하지 못하고 따라서 숲에 의존하는 동물 역시 이동이 느려지는 상황과 함께 여러 문제들이 나타나게 될거라는데..(지구의 변화와 4차산업혁명 관련 수많은 저작들을 계속 내고 있는 제레미 리프킨)

투루판은 다양한 문화가 합류해 독창적인 투루판 문화를 창출했는데, 수많은 유적지가 밀집해 있어 세계적으로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높은 유적 분포밀도를 보이는 뚜렷한 문화사적 위상을 갖고 있는 지역이다.

투루판은 이질적인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혈통을 달리하는 다민족 지역으로 변했고, 민족적 다양성보다 폭이 더욱 넓은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데 그 중심에 종교가 있다. 고대에는 주류인 불교에 유교, 마니교,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등의 동서 종교가 합류되었다가 중세이후에는 이슬람 일색이다.

이 지역은 7천년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 유물로 나타나고 있고 3천년전부터 정착 농경이 시작되었고 춘추전국시대 미이라등이 유구한 역사를 말해준다.

아리안족이 BC1500년경 중앙아시아 습지 지역에서 기후변화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두갈래길로 민족이동을 할 때 천산산맥을 거쳐 인도지역으로 지나간 곳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8-6세기에 스키타인들의 일부도 이곳으로 이동해왔다.

원래 토착민들은 이란계 유목민족인 차사인으로 천산산맥 북쪽에서 남하하여 차사전국(전한시대, 즉 기원전 3-기원후 1세기)을 세웠고 후에 한나라와 누란의 협공에 의해 멸망했고, 타림분지쪽에는 월지도 있었다.

이 지역은 후에 흉노와 한나라가 지배하다가 500년경 한족 출신 국문태에 의해 건설된 고창국이 140년간 지배하다 당에 멸망했는데, 신강과 천산산맥 위쪽의 지역은 한때 36개에서 50개이상의 조그만 도시국가들이 있었고, 당의 경우 천산산맥 넘어 오늘날 키르키스탄 전역과 카자흐스탄의 일부, 우즈베키스탄의 상당 지역과 파미르고원까지 지배하면서 안서도호부를 설치해서 이슬람제국의 동진을 저지하며 여러 차례 승리하다가 탈레스전투의 패배(고선지 장군)와 국내 사정(안록산의 난) 때문에 물러났다.

그리고 이 지역은 힘의 공백기에 9세기 중엽부터는 북쪽 초원에서 강대해진 위구르족이 남하해서 차지했는데 한때 서하와 주변 지역의 여러 나라들간에도 생존의 싸움을 벌이다가 13세기 초에는 원에 의해 점령되어 차카타이 칸 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17세기 중엽에 다시 청에 의해 설치된 중가르부에 속하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척박한 사막과 천산산맥 넘어 스텝지역의 부족들 또는 도시국가들은 목축, 대상무역에 의존해 생활하면서 농경민이던 주변 발전된 문명과는 종교적, 문화적으로 독립적이었는데, 그들 도시국가간에 이해 대립이 발생하면 그리고 주변지역인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쪽의 국가들과도 힘이 기울어지면 서로 창끝을 노리는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침략과 약탈 또는 이주, 병합, 몰락의 길을 걸었다. 즉 이 지역 국가들은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 속에서 서로 각축하며 생성, 몰락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신강 이 지역의 민족들은 중국이 내분에 처하거나 영향력이 약화된 시기, 예를 들어 당말오대와 송대때는 독립뿐만 아니라 서하처럼 송의 침공에 싸워 이겨 매년 송으로 부터 막대한 물품을 전리품으로 받기도 했었고, 늘 독립의 기운이 강했다.

근래 1800년대 중엽에도 대규모 반청 독립운동이 일어나 일시 우루무치를 장악했다가 진압되었고, 1944년에도 위구르족과 카자흐족이 주동이 되어 쿠처에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세웠지만  중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국 군이 진주해 이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오늘날도 계속 독립을 위한 몸부림과 저항은 지속되고 있다.

현장법사가 고창국에 머물 때 설법을 했다는 절터

자기 땅에서 쫒겨나 지금은 주로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위구르족.

유적지에서 악기연주로 구걸하는.

아스타나고분에서 가장 먼저 맞이하는 12지신 상과 복희여와도 상.

고창국과 당나라 시기의 무덤 군인데 40호 묘실 천장에 부착되어 있던 복희여와도는 중국 신화속에 인류의 시조로 전하는 복희와 여와를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중국 신화속의 삼황이 이 지역에서도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이 고분군에서는 불교, 마니교, 경교등의 많은 양의 문서들과 유교의 가르침을 풀이한 병풍도 나온 다양한 문명의 접촉 지점이다.

타다 못해 이글거리는 화염산

현장법사가 손오공과 함께 천축국으로 갈 때 마주친 화염산. 파로선을 빼앗아 불을 껐다는.

문명의 파괴..베제클리크 석굴

위그르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는 뜻의 이 석굴은 중국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물인데 이 석굴을 보면서 유물을 독점할려는 인간들의 문명 파괴의 사악한 이기심과 만행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일까라는 생각과 함께 분노가 치민다.

베제클리크는 화염산 옆 계곡을 낀 절벽에 6세기 이 지역의 고창국때부터 시작해 당과 원나라때까지 조성됐는데 특히 10세기 위구르 칸 국시대때 절정기였다고 하며, 한문, 산스크리트어, 서하어 위구르어등 각종 언어로 쓰인 불경사본과 소상과 벽화가 극치를 이뤘고, 당시 생활상과 교류의 실태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들이다.

유물의 파괴는 자연적인 파괴와 인위적인 파괴가 있을 수 있는데, 자연적인 파괴야 어쩔 수 없지만 이 석굴은 20세기 초 소위 현대인이라는 작자들에 의한 인위적인 문명파괴의 처절한 현장이다. 

여러 굴들을 봤는데 33호굴 중 일부의 벽화, 즉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기 위해 온 신라의 왕자로 추정되는 인물을 포함한 각국의 100여명의 왕자들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모든 굴의 벽화와 소상들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독일인 불교미술 연구가 그륀베델, 특히 대무기상 크루프의 재정 지원을 받은 르콕이라는 작자가 벽화등을 벽채로 뜯어 도려내서 가지고 갔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훔쳐갈 때마다 등장하는 영국의 스타인과 일본의 오오타니등도 베제클리크의 파괴에 동참했고, 일부 무슬림들이 불상의 눈을 도려내거나, 청소한답시고 물로 알카리성 황토벽을 씻어내다가 시커멓케 변색되기도 했고, 문혁때 홍위병의 난동도 문명파괴에 일조했다.

이 유물들은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흩어졌는데, 상당수의 유물은 독일이 2차대전때 폭격을 받아서 재로 변해버렸다.

이 굴의 수난에 대해 반달리즘의 극치라고 표현한 글도 봤는데 반달족이라는 미개한 민족에 의해 자행된 문명파괴로 반달리즘이 거론되는데, 현재는 반달족의 로마 침탈후의 약탈이 과장되었다고 이야기되고 있고, 오히려 로마의 카르타고에 대한 철저한 파괴과정을 생각해보면 베제클리크처럼 문명국에 의한 문화파괴 행위의 정도도 극심했다는 점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나마 약간의 벽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굴

베제클리크 옆 옛 거주지

숨 쉬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뜨거운 대낮에 야외에서 양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폭염이 조금 누그러지면 시내 산책을 할까 생각하고 오후 6시, 7시, 8시에 밖으로 나가봤지만, 100미터 나가서 걷다가 숨이 막혀 돌아왔는데..

양과 소가 사람을 잡아 먹는다.

대 사상가 토마스 모어는 "양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라고 엔클로저 운동시기에 이야기 했는데 그때는 양모 생산을 위해 생산수단인 땅으로부터 농민이 축출되는 비참한 상황을 묘사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훗날 축출된 농민들은 빈민이 되어 도시로 모여들고 도시의 극도로 열악한 주거지에 밀집해서 거주하면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자로 비참한 생활을 한다(엥겔스,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의 생생한 묘사)

중국은 오늘날 날로 사막화가 진행되어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는데도 양과 같은 짐승을 방목하고 양고기를 즐겨 먹으니 사막화에 대처할 의지가 있는건지 없는건지.. 나무의 뿌리까지 다 먹어버리고 있는데.

지구 지표면의 35%가 사막화가 진행중이고 인구의 20%가 사막화에 고통받고 있는데, 중국이 소고기를 즐겨 먹기 시작하는 날, 오늘날 미국의 식단에 소고기가 올려지기 위해서 중미, 남미의 원시림이 파괴되고 농민이 땅에서 쫓겨나 빈민이 되고 농산물 값이 폭등하는 비극은 중국에서도 재연되면서 지구는 전 지구적 차원의 재앙을 맞게 될 것이다.

오늘날 중남미의 국가, 대지주, 대자본가는 미국, 유럽등지의 대자본가와 결탁하여 그동안 소유권이 애매했던 땅에서 농민들을 몰아내서 결국 농민들은 대도시 주변의 빈민가로 몰려들고 있고, 생산하는 농업 품목 역시 미국, 유럽지역에 필요한 특용작물 위주로 전환하여 생산함으로써 중남미의 서민, 빈민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전에는 자신들이 생산하던 생활 필수 작물을 아주 높은 가격에 역수입해서 사먹게 되었다.

그리고 삼림의 파괴는 숲과 밀접하게 관련된 동물 다양성의 감소, 새 소리가 안들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오늘날 주로 남반부의 8억 인구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잠 들며, 멕시코 같은 세계 경제규모 상위 국가도 농부들 중 1/3이 평생 소고기를 못먹어보고 소 사료와 특용작물을 재배하면서 살다 죽는다

반초. 교하고성 입구에 장건 소상옆.

장건까지는 이해되는데 이 지역 침략군 점령군 장수들의 소상이 나열된 모습은 한족에게는 자랑스러울 수 있겠지만, 민족간 대단결 주창하는 상황에서 위구르족이나 카자흐족과 같은 이 민족들에게는 어떻게 비춰질까. 

관광지든 어디든 여러 민족의 단결을 외치는 구호와 검문수색 절차가 있다.

점령과 철권 통치가 자행되면서 단결 요구란 체제 순응과 복종을 요구하는.. 뺨 때리고나서 같이 노래하자는?

교하고성. 양쪽에 물을 낀 높은 절벽의 섬에 천혜의 요새 형태를 띠고 있다.

과거에는 양옆의 물에 물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거의 없다.

2천년전 차사전국의 수도로 불교 사원구역이었다. 초기 인도 사원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이 지역 어디에서나처럼 특유의 토성이다. 흙을 쌓으면서 건축물을 만든 것이 아니고 땅을 파서 지은 형태. 그래서 더 이전의 유적인데도 고창국 성터보다 보존 상태가 좋은 듯.

교하고성 입구의 판매대. 오래 된 마오의 선집과 죽간등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죽간 형태의 삼자경도 보인다.

삼자경은 중국 어린 애들 교육용 대표적 경전.

위구르 가정 포도 농가.

투루판하면 포도일 정도로 투루판 포도는 잘 알려져 있다. 덥고 건조한 이 지역에서 포도는 잘 자라며, 8월 중순경이 수확기이다. 특유의 고온 건조한 날씨와 바람을 이용해 이색적인 모양의 건조장에서 말려 건포도를 생산한다.

포도는 세계 과일 총 생산량의 1/3에 해당할 정도로 압도적 1위다.

이 지역의 과일은 날씨 영향으로 정말 달다.

수박등 모든 과일이 달지만 하미과라는 이 지역 특산물은 너무 달고 맛있어 입에 대니까 먹고 또 먹고 한참 먹었다. 언제 또 먹어 볼 수 있을까 싶다.

이곳 포도나무의 평균 수명은 150년이나 되며 400년이 넘은 것도 있다고 하고 포도 종류만도 200여종이나 된다고 한다.

다남을 상징하는 포도 무늬는 복식이나 회화, 공예품의 무늬로 널리 쓰이는데, 포도는 우리나라에 고려때 들여 왔다

지하 수로 카레즈

카레즈 박물관. 극한의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곳'이라는 뜻의 투루판으로 가꾸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 카레즈.

인간의 피와 땀, 고통으로 타는 듯한 더위의 이 지역 조건을 극복해낸 산물.

저 멀리 천산의 빙하가 녹은 물이 화염산 바닥을 뚫고 이곳까지 내려온 카레즈(지하수로).

만년설이 녹아 지하로 스며들어 화염산 밑으로 흘러든 물길을 찾아 20-30미터 간격으로 우물을 파고, 우물과 우물을 연결한 지하수로는 5-6키로에서 길게는 수십키로, 1000여개의 물길 카레즈는 총 길이가 5000키로.

한 갈래를 파는데 3-5명이 한조가 되어 땅속에서 수개월에서 수년을 파고 흙을 밖으로 실어 내보내는 노력과 희생, 지혜가 건조한 날씨로 인한 물의 증발을 최소화하고 강풍과 모래로 인한 피해나 오염으로부터 수질을 보호하며, 질 좋고 시원한 물을 인간과 자연에 공급하여 생활용수와 면화 및 포도농사등을 가능하게 해 준 투루판의 생명수요 혈맥이다. 

이러한 지하수로는 건조한 중동지역에도 있으나 투루판의 지하수로만큼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다고 하며, 서역에서 5세기경 조로아스터교가 들어오면서 함께 만들어졌다고 하나 여러 견해가 있다.

이 카레즈를 보면서 구찌터널이 떠올랐다.

미군의 엄청난 융단폭격과 대량의 고엽제 살포에도 불구하고 기어다닐 정도의 가느다란 굴을 끊임없이 파면서 싸운 베트남인들의 독립투쟁의 뜨거운 피가 미국과 싸워 유일하게 이긴 위대한 베트남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인간의 생존과 지고한 목표를 향한 열정의 힘이 위대함을 절감한다.

투루판 군왕부

소공탑 입구

신강지역에서 가장 높다는 소공탑

해수면의 높이와 일치하는 지점이라고.

CCTV를 잠시 보다가.

CCTV는 다양한 채널의 방송을 하고 있는데 이 지역을 포함한 서북지역을 해방하기 위한 인민해방군의 노력과 희생을 위구르족등을 포함한 중국인들에게 선전하는 영화인 듯.

처음에는 마오, 주덕등도 등장하다가 끝에는 해방후 이 지역의 이민족들로 부터 환영 받는 팽덕회의 모습이 나온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떠오른 생각.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내부 노선투쟁을 거치면서도 큰 줄기가 면면히 이어져왔구나. 마오도 1921년 상해에서의 중국 공산당 창립때부터의 대표자였고 진독수나 이립삼, 28인 볼세비키그룹등과의 노선투쟁, 대장정과 존의 회의, 중일전쟁과 내전등을 거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때까지 계속된 당의 중심 역할.

반면에 일제시기 조선공산당의 찢어지며 이어진 역사..

팽덕회.

이후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에 대한 마오에게 보낸 진심어린 직언의 서신 때문에 팽 당했고

특히 문혁때 홍위병들로부터 폭행과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후에 복권.

몽골에서 여러 시간 타본 경험이 있어선지 조금 달릴 수도 있었다.

천산과 빠리쿤 초원에서 물가에 말들이 방목되어 있는 것을 봤는데 여기는 카자흐족이 계속 터를 지켜온 방목지다.

명마의 고장. 汗血馬

중앙 아시아 어디를 가나 말은 생활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말은 기마 유족민족들에게는 숭상하는 영물이자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자 밑천이다.

운반과 교통의 수단이자 동력이고 전쟁시에는 전력의 중추인 기병의 근거다.

한혈마는 전설적 명마로서 천마의 후손이라고 간주되고, 달릴 때 땀과 피를 흘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강인하고 주력도 뛰어나 하루에 천리씩 달린다고 '천리마'라고도 한다.

한 무제는 전쟁에 사용할 최상의 말을 구하기 위해 페르가나에 몇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겨우 순종 몇 마리를 구해다 번식시키기 시작했고, 오손국(현 키르기스탄 중서부)으로 부터 '서극마"를, 후한때에는 월지(현 아프간 동부)로부터 '월지마'를 들여왔다.

한 무제때 이미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군마만 40만 마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말들의 관리는 민간에도 맡겼는데 기르다 만일 죽이거나 잘못되면 기르는 사람을 처형할 정도로 말을 엄청 중시했다.

한혈마나 서극마 같은 명마의 주산지는 천산산맥의 남북쪽에 펼쳐진 초원지대다.

당대의 시선 두보는 고구려 유민이자 이슬람연합군의 남진을 막기위해 전장을 누비던 고선지장군과 그의 총마(한혈마)를 찬양해서 "사람(고선지)과 더불어 한 마음이 되어 큰 공을 이루었도다"라고 시작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현재 말의 품종은 다양해서 약 40종으로 나뉜다.

크게 북방종과 남방종이 있는데, 북방종은 털이 길고 육중하고 남방종은 털이 짧고 날씬한 편이다. 북방종은 몽골계통 말의 조상으로서 중국이나 한국 말의 재래종 말이 여기에 속하고, 남방종 말은 아랍계통 말들이다.

鐙子

방법이 맞는지 모르지만 말을 더 빨리 달리게 할려고 말의 배를 발로 차는데, 등자 때문에 세게 차지를 못해서 영화에서는 말의 배를 힘 차게 차던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

이 단순하고 하찮은 것 같은 도구가 서구 중세 봉건제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발명품이었다는 글들이 떠올랐다.

등자가 발명되면서 말을 전속력으로 달리며 긴 창으로 공격해도 찌르는 순간의 충격으로 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가능하게 되면서 막강해진 기마병. 그래서 토지를 받은 충성스런 중세 기사집단이 활성화되었다는 주장.

그리고 기병의 역사와 기병들이 등자를 사용하게 되서 이긴 여러 전투들에 대한 설명(린 화이트 2세,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우루무치의 신강역사박물관

신강지역내 주요 출토품들을 거의 다 모아 전시하는 소장품만 3만점. 석기시대부터 청나라까지의 각종 출토품과 생활용품, 장신구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유명한 누란의 미녀를 비롯한 여러 미이라도 전시되어 있는데, 이집트처럼 약물처리되지 않고 이 지역의 건조한 기후로 인해 자연 건사된 것들이었다.

동서문화 교류와 관계된 대표적 유물들로는 채도항아리나 페르시아계 유리그릇, 알타이계 구리솥, 시베리아계통의 토기, 북방계의 석관묘등이 대표적인데, 사진기를 사용 못하게 해서 핸드폰을 중간에 잘못 만져 칼라가 아닌 흑백으로 찍게 되어 뭐가 뭔지 모르게 된 점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보지 못한 점이 아쉽다.

누란의 미녀 상상도

누란의 미녀

우루무치의 국제 바자르.

카자흐족의 거대한 국제시장. 온갖 물품을 파는 명물.

신강일대 지도.

동서문화 교류에 대한 깊이있는 관찰을 위해서는 파미르고원 초입의 카슈가르, 구마라습의 고향 쿠처, 그리고 사라진 왕국 누란도 봐야 할 듯.

누란은 지도상으로는 돈황 바로 서쪽 옆인데, 누란은 후에 鄯善으로 이름을 바꿨다.

선선을 잠깐 지났어서 위치는 약간 다른 것같은데 누란을 들린건지 약간 혼동. 들린 곳은 청대에 새로 생긴 선선현 지역으로 투루판 동쪽 바로 옆이자 과거 누란국의 바로 위 북쪽지역인 것 같다.  

우루무치 공항

멀리 눈덮인 천산산맥, 그리고 공안 차가 절묘하게 이 신강의 자연과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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