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여기 또 하나의 아프디 아픈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동안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 ‘여수병란’ 등으로 불리며 제주4·3항쟁과 함께 비극적 사건으로 현대사에 기록된 역사. 하지만 여순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면서 사건의 성격을 정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 역사는 제주도민들이 기억할 필요가 있는 또 하나의 아픈 역사다.

그러나 제주가 아닌 타지에서 발생한 일이기 때문일까, 제주4.3 70주년이 코앞이지만 내년 제주4.3과 함께 70주년을 맞이하는 ‘여순사건’의 원인과 의미를 인식하고 있는 제주도민들은 많지 않다. ‘여순사건’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서 반란이나 폭동, 사건이 아닌 ‘항쟁’이라고 바르게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결론을 낸 사람이 있다.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다.

그는 여수에서 나고 자랐으며 해당 역사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쓴 두 명의 역사학자 중 한 명이다. 주철희 박사는 지난 11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1차 사료 조사를 집중적으로 연구 검토해 ‘여순항쟁’의 원인과 과정, 의미를 파악한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도서출판 흐름)>을 출간했다. 제주4.3 70주년을 앞둔 현시점에서 “(제주)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며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킨 역사를 연구한 주철희 박사를 인터뷰했다.

 

'여순사건 순천유족회 사무소'. 제주 도민들을 학살하지 않겠다며 총구를 돌렸으나 군사반란이라는 불명예로 얼룩져버린 망자들의 명예를 회복을 유족들은 바라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순천시외버스터미널 옆에 위치한 ‘여순사건’ 순천 유족회 사무실을 본 적이 있다. 사무실에 걸린 현수막 문구를 보면 유족 분들이 제주4.3 특별법이 제정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은 모습 등을 지켜보면서 소외감 또는 고립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내년 제주4.3 및 ‘여순항쟁’ 혹은 ‘여순사건’ 70주년을 맞는데 여수, 순천 지역 유족회들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여순항쟁’과 관련해 세 개의 유족회가 있다. 순천유족회, 여수유족회, 구례유족회가 있는데 유족회의 입장을 내가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나는 역사학자로서 학문적으로 연구한 내용과 입장만 전하고자 한다.

 

-이번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는 책을 내며 여순군사반란 등으로 표현되는 역사를 ‘여순항쟁’이라고 정명해야 한다고 밝혔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달라.

해당 역사를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학문적으로 연구한 결과 ‘여순군사반란’이 아니라 ‘여순항쟁’이라고 결론을 내고 정명하게 됐다. 그 이유와 과정을 책에 자세히 써서 담았다. 항쟁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성격과 원인을 분석하고 정확하게 밝혔다. <동포학살을 거부한다>는 여순항쟁만 다룬 것은 아니다. 제주 동포를 죽일 수 없다면서 봉기를 일으키며 시작된 여순항쟁에 대해 쓰면서 제주를 빼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최근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를 출간한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

-제주도민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다. 제주 사람들이 주 박사를 직접 만나서 얘기들을 기회는 없을까.

지난 9월 서울에서 육지사는제주사름들의 초청으로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처음 강의를 하게 됐다. 제주에서는 지난 4월에 강의를 했다. 육지사는제주사름들을 중심으로 제주4.3항쟁 70주년을 앞두고 또 다른 자리가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민들이 여순항쟁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14연대 군인들이 제주의 동포들을 죽이러 가라는 명령을 받고 반발했지만 연대장과 장교들이 끝내 그들을 제주로 보내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 군인들로서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면서 장교들을 사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주도민들을 학살할 것인가 장교를 죽일 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서 제주도민들을 살리고 장교를 죽이는 쪽을 택했다. 항쟁의 시작이었다.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설명해달라.

미 임시 군사고문단과 이승만이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만들면서 제주에서 초토화작전을 벌인다. 이건 제주도민들을 학살하는 작전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수 군인들을 제주로 보내려 했다. 그러자 제주도민들을 동포로 본 군인들은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면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 군인들의 행위에 민중들이 지지하고 합세했다. 왜일까. 당시 이승만 정부, 미 군정이 지배하던 시기에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노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참고 참던 민중들이 폭발한 것이다. 그래서 군인들의 봉기에 민중들이 합세하며 항쟁으로 발전했다.

동포를 학살할 수 없다며 봉기를 일으킨 군인들(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의 호소문.

-장교 사살 등 폭력적 행위 때문일까. 부정적인 인식들도 존재하다.

일부 장교들을 사살했지만 항쟁의 역사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시민계급이 문제를 제기하다가 안 되니까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다. 동학농민운동 역시 무기를 만들고 관아를 습격하면서부터 비로소 항쟁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14연대 군인들이 왜 장교를 죽였을까. 군인들이 제주도민들을 죽이러 가지 않겠다고 하는데 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14연대장의 기자회견에 그 내용이 들어있다.

 

-제주도민과 제주4.3 학계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제주도민들 학살하는 일을 거부하기 위해 들고 일어난 항쟁을 반란이라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을 제주도민들 역시 정확하게 인식해줬으면 한다. 제주4.3평화공원을 가서 설명을 들었는데 몇 차례나 반란이라는 말을 듣게 돼 기분이 좀 좋지 않았다. 반란은 체제 정복이나 정부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데 여순 사람들은 그러한 목적을 갖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키며 발표한 호소문에 잘 드러나 있다.

 

-제주에서도 제주4.3을 항쟁으로 정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진 않다.(<제주투데이> 기사 "항쟁으로서 제주4.3문학 가능성 타진해야"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384)

‘제주4.3’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하고 있는데, ‘제주4.3항쟁’이라고 정명하길 바란다면 왜 항쟁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있어야 한다. 제주에서는 그러한 연구가 지금까지 조금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제주 사회와 학계에서도 이런 부분을 고민해 봐야만 한다.

 

-<동포학살을 거부한다>는 역사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나.

제주4.3과 여순항쟁 등 현재 대부분의 역사 연구 성과는 국가와 군의 관점에서 쓰인 것들이다. 군과 국가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을 때는 반란이라 표현될 수 있겠지만 주체와 민중의 관점에서 연구해보니 항쟁이라는 결론이 도출됐다. 새로운 정설을 세워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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