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이양재 (李亮載) / 20세 때부터 고서화를 수집한 민족주의 경향의 ‘애서운동가’로서, 서지학과 회화사 분야에서 100여 편의 논문과 저서 2책, 공저 1책, 편저 1책 있음. 현재 ‘포럼 그림과 책’ 공동대표, ‘고려미술연구소’ 대표.

1980년대 초 정통성 없는 전두환의 신군부 군사정권은 미국의 눈에 들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를 부정하였다. 미국이 다인종 다민족국가이므로 민족주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미국은 민족주의를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유태인이나 앵글로색슨 등등의 소수 민족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민족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을 말한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현재 중국에서는 56개 소수민족을 합하여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몰지각한 반민족 성향의 일부 친일친미사학자들은 “우리나라는 민족국가가 아니라”고 애써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는 망국적 반민족 행위이다.

친일파들을 중용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 1902년~1999년) 박사가 주창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정치이념으로 내세웠다. 필자는 20대 초반에 한때 안호상 박사의 ‘국사찾기운동’을 도운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의 F재단 한국지역책임자 P씨는 안호상 박사의 일민주의를 독일의 나치와 같은 유형의 정치적인 파시즘으로 매도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안호상 박사는 일민주의를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에 의거한 민족주의”로 설명한 바 있다. 그의 일민주의는 아래의 4가지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

“①경제적으로 빈곤한 국민의 생활수준을 높여 누구나 동일한 복리를 누리게 할 것, ②정치적으로 대다수 민중의 지위를 높여 누구나 상등계급의 대우를 받도록 할 것, ③지역적 차별을 타파하고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한 민족임을 표명할 것, ④남녀동등주의를 실현할 것” 등등. 즉, 일민주의는 사회 평등적 민족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나마 일민주의를 표방한 이승만 정권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군관출신으로서의 친일 전력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그 역시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라는 저서에서 민족주체정신을 주장하였다, 이는 정권연장의 유신에 이르러서는 다소 변질되어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기만적 표어로까지 나오게 하였다.

그런데 공교로운 것은 박정희 정권이 민족주체를 주장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북한은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으로 강화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박정희 정권이 갖고 있었던 그 나마의 민족주의 추구의 정치적 기조는 미국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낳았다. 결국 5공에 이르러서는 민주적 정통성이 없는 신군부가 미국을 위식하여 민족주의 이념을 부정한 것이다.

심지어 신군부의 전두환은 해외 순방을 가는 곳마다 대한민국이 과거 일본 식민지시대로부터 자주독립하여 기적적 번영을 이루었다고 언급하여, 마치 대한민국이 신생 독립국인 것처럼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 매우 나쁜 인상을 남겼다.

5공 정권부터 정치권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구호가 점차 줄어들면서, 동시에 민중민주운동권에서는 민중(民衆)이란 용어의 사용을 민족(民族)이란 용어도 대체하여 나갔다. 또한 학생운동권에서는 사대주의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민족주체정신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이후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세계화를 표방하면서 차츰 친일성향의 어용사학자들은 “대한민국은 다민족 다혈통으로 구성되고 있으므로 민족국가가 아니다”라는 얼치기 국가론을 널리 퍼트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5공의 반민족 반민주적 틈을 타고 1990년대 초부터는 민족이란 단어가 좌파의 전용 단어로 고착되었다. 아울러 ‘북한바로알기운동’의 일환으로 일부 운동권에서 북한의 주체사상이 학습되기 시작하면서, 결국 현재에 이르러서는 “지킬 가치가 있는 우리 것을 지킨다”는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진짜 보수파마저도, 주체사상 신봉자와 함께 묶여져 좌파로 몰리게 되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친일 반민족적 사대수구가 우파의 위치를 점령하는 말도 안 되는 비정상적 비상식적 비양심적인 정치현상이 현재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시도는 결국 우리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우리 내부에서 민족주의를 파괴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가, 우리나라를 다민족 국가로 씨족별로 분리하여 포장하는 방법이다. 과거 고려나 조선에 귀화한 일부 외인들 자손을 내세워, 그 씨족의 시조가 중국이나 일본, 월남,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온 귀화인이었다고 주장하여 민족주의를 훼손 분열시키는 것이다. 이 시도는 사대주의와 큰 맥이 닿아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민족이란 용어의 정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민족주의를 혈통주의로 인식할 때 크게 퍼져 나간다.

유태인들은 과거의 혈통주의를 기반으로 하지만, 유태교로 개종한 사람도 곧 유태인이라는 정신적 종속주의를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유태인 혈통이지만 유태교로부터 돌아선 사람은 제대로 된 유태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 배교한 유태인들은 유태인의 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를 파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 민족의 실체를 과대 포장하는 행위이다. 마치 중국의 당나라와 명나라만 한족이고 다른 모두는 북방민족이 만든 나라이며, 그들은 우리와 동족이라는 주장으로 과대 포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도 훨씬 후의 청나라도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고려와 조선이 그들의 침입을 받은 역사를 망각케 하는 고도의 전술이다.

요금원청(遼金元淸)은 같은 북방민족일 뿐 우리 민족의 조상이 아니다. 그들을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들을 적대하여 죽음으로써 피 흘려 싸워 나라를 지켜 온 우리의 선조들을 배신하는 패역(悖逆) 행위가 아니겠는가?

부언(附言)하면, 필자의 부계는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그러나 모계는 14세기 말 청해이씨(靑海李氏) 시조 이지란(여진족)의 후손이다. 또한 부계의 15세기 상대(上代)로 올라가면 처가가 교하노씨(交河盧氏)이며, 그 외조는 고려 왕가인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올라간다. 다시 고려의 왕가는 원나라와 국혼을 하였으므로 결국에는 13세기 초의 ‘징기스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필자의 본가나 외가 및 외외가의 대부분의 직계 선조는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 고려와 조선의 백성이 대다수이다. 필자의 혼(魂)과 체(體)는 우리나라의 건국시조 단군의 자손이다. 필자는 민족주의자이지만 요금원청이 우리 민족이나 우리 조상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에 동남아의 여성과 결혼하여 태어난 이른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도 우리 민족의 정신을 갖고 우리 영토에서 거주한다면, 그리고 앞서 제시한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에 의하면, 이들도 역시 우리 민족에 속하며, 그 가정도 우리 민족의 한 가정인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민족주의가 약화된 상황에서 다시, “민족이란 무엇인가?”란 정의를 생각해 보자. 위에서 제시한 민족이란 용어의 정의를 미루어 생각하면, 지금 제주에서 나타나는 일부 비주체적 문화현상은 심히 우려스럽다. 서복기념관의 예에서 보듯 “현재의 제주 도민들 일부에서 스스로를 한족(漢族)이라 생각하거나, 탐라족이 우리 한민족(韓民族)과는 별개의 족속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삼성(三姓)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제주에 원주민이 있었다. 그 고대의 원주민들은 차츰 삼성의 부족에 흡수되어 한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삼성 부족의 후손들을 제외한, 현재 제주도민 대다수는 입도인들의 후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제주의 독립을 말하는 일부 사람들은 대개 입도인들의 후손”이라 한다. 필자가 보기에 “그들의 행동은 민족국가임을 부정하는 5공의 정치이념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탐라국 시대까지 제주는 독립국가였다. 현재 제주의 구시가 한 복판에 삼성혈(三姓穴)이 있다. 그 삼성혈을 중국인 관광객은 별로 찾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인 관광객은 성지처럼 흔히 찾는다. 그 이유는 삼성인의 배우자가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이고, 조선강점시대에 일본의 내선일체 사학자들은 벽랑국을 “일본 내에 있던 소국”으로 주장하였기 때문인데, 벽랑국은 도저히 일본과는 연관 지을 수가 없다. 요즘에는 벽랑국을 전남 탐진 지역의 부족국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제주에는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고인돌이 있다. 그러나 고양부 삼성인은 청동기시대에 제주로 표착해 들어온 부여나 예맥 계통의 무사 세력으로, 삼성혈은 그들을 한 가족의 삼형제로 규합하며 지신(地神)에 제사를 지낸 장소로 보아야 한다. 고양부 삼성인이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 지역에 각기 부족국가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면,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 구석기시대 유적지라든가 한경면 고산리 신석기시대 유적지와 삼양동의 청동기시대 유적지는 이들 삼성인과는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관련이 없다. 삼성인 시대에도 고양부 이외에 다수의 부족국가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에 통합한 국가로의 탐라국이 전개(全開)된 시기는 기원전이 아니라 기원후 3~4세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양고부 삼성과 그 후손들은 역사시대 탐라국의 주역이었다. 삼성혈은 우리 민족의 신화학과 민속학 연구에서 육지의 천강신화(天降神話) 및 난생신화(卵生神話)와 대비되는 용출신화(涌出神話)의 본 고향이다. 다른 신화에서는 경주의 계림(鷄林)이라던가 김해의 구지봉(龜旨峯)이라는 대체적인 넓은 지역을 가리키지만, 삼성신화에서 만큼은 아주 자그마한 특정 지점인 삼성혈을 가리킨다. 세계에 이런 성씨의 발상지 신화를 삼성혈 아니고서는 달리 찾아 볼 수가 있을까?

따라서 삼성혈 권역은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철저히 보존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제주도(濟州島) 자체는 지리적으로 길쯤한 알(卵) 모양을 하고 있어 용출신화와 난생신화의 연결성을 생각해 보게도 한다.

한편, 필자는 삼성혈로부터 산지천으로 물이 흘러 나가는 지하수로나 지하통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여 왔다. 얼마 전까지 오현고등학교의 교장을 지내셨던 백광익 화백을 통하여 “삼성혈로부터 동문시장 쪽으로 지하 통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소문해 보니 “삼성혈 북측에 칼 호텔을 건설할 때 지하에 동공이 있어 상당히 많은 양의 레미콘을 들어부었다”는 말이 있었다고 하며, “이후 칼 호텔 북측 일부지역의 용출(湧出)이 끊기게 되었다”고 한다.

양고부 삼성의 후손들은 탐라가 고려에 복속한 이후에 출도하여 고려와 조선의 백성으로 국가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임진왜란 시에 순국한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라던가 양대박(梁大樸: 1544~1592)을 생각하여 보면, 탐라국의 후손들은 고려와 조선시대 외침시의 항쟁과 항일독립운동 및 정부수립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즉, 민족의 개념에서 볼 때 탐라국 후손들도 현재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정치주도세력이자 역사주체세력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문화제주를 함께 꿈꾸는 제주도민들이여, 삼성혈을 바라보며, 이미 변질되어 가는 우리 민족문화 가운데서 유독 제주다움만은 그대로 존속시키며 미래의 문화제주를 창달해 나가는 방안을 다 함께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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