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공항 반대대책위원회 김경배 부위원장의 단식이 일주일을 넘었다. 일체의 곡기를 끊는 단식은 자신의 몸을 담보로 한 최후의 저항이다. 미약한 개인이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는 마지막 수단이다. 황석영은 자신의 자전 <수인>에서 투옥 중에 있었던 단식의 경험을 고통스럽게 떠올린다. 황석영은 교도소에서 첫 겨울을 지낼 무렵 20일 동안 단식을 했다. 이때 단식의 후유증으로 황석영은 이가 열 여섯 개가 빠졌다고 고백한다. “칼을 대지 않는 수술”. 황석영은 단식의 위험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경배 부위원장은 제2공항 건설계획이 발표되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우리 이웃이었다. 그의 목숨을 건 단식이 계속되고 있지만 원희룡 도지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행정은 천막 농성이 불법이라면서 철거 계고장을 발부했다. 개인의 저항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행정의 폭력성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탄압의 방식이다.

어떤 이들은 현 공항의 포화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2공항 건설이 불가피하도 말한다.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더 큰 재앙이 올 수도 있다고 말한다. 백번 양보해서 이들의 말이 맞다고 해도 평범한 이웃이 단식으로 저항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당위론은 공허하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비윤리적 태도이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유민 아빠’는 진실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을 이어갔다. 세월호 유족들의 단식을 비아냥하는 무리들은 그 앞에서 이른바 ‘폭식 투쟁’을 벌였다. 일베 수준의 일그러진 윤리감각이었다. ‘폭식 투쟁’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벌인 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일부 언론을 포함한 지식인들도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그들의 행동을 꾸짖었다.

김경배 부위원장의 단식을 보면서 제2공항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들이대는 것은 객관을 빙자한 비열함이다. 불편부당이라는 말의 뒤에 숨어서 자신을 현실의 외부에 위치하려는 음험한 위장이다. 흔히 언론은 공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공정함은 말 그대로 객관적 중립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공정의 자세는 사회의 맥락 속에서 공공선을 수행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제2공항에 반대하는 주민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한 시민사회의 진영을 향해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말하는 일부 언론과 지식인의 태도는 그래서 옳지 않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정치학의 고전,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민주주의란 스스로가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라고 규정하면서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고안”됐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링컨의 유명한 연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이라는 인민 주권이 사실상 허구이며 그것이 대중민주주의 한계라고 지적한다. 대의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4년마다 한 번 돌아오는 선거일에 투표를 성실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으며 그러한 민주주의는 ‘절반의 인민주권’이라는 그의 지적은 우리가 상상하는 민주주의가 완성형이 아니라 불완전한 정치체제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옳지 않다. 우리의 판단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의 판단을 끊임없이 수정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제주의 미래를 위해 제2공항이 필요하다는 정책 결정은 절대선이 아니다. 제2공항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절대선이 아닐 수 있다. 갈등은 제2공항 건설을 기정사실화하면서 그것만이 제주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는 행정의 무오류, 불완전성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 몸뚱이가 전부인 한 시민이 목숨을 건 단식을 이어가는 와중에 이들의 요구를 외면하는 태도는 그래서 옳지 않다. 이러한 외면이 계속된다면 원희룡 도지사는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이 공공선인지 토론하고 토론해야 한다. 마치 자신은 제3자인 것처럼 근엄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훈계하는 태도는 객관을 가장한 행위이다. 그 누구도,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다. 

#관련태그

#N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