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영수/ 전, 제주대 교수, 소설가

어떤 대학교수가 학생들에게 정치학 논제를 하나 제시했다. <정의가 부재하는 평화는 있을 수 없다. 이를 논하라.> 그는 몇 년 간 심사숙고를 거친 끝에 약간 수정된 논제를 제시했다. <정의와 함께하는 평화는 있을 수 없다. 이를 논하라.>

정의가 부재하는 나라에서는 끊임없는 불만과 저항, 폭력항쟁이 터져 나오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가 없을 것 같다. 반면에, 인간성의 한계나 사회구조의 타성 등 제약이 있는 한 완벽한 정의사회란 불가능한 것이고, 불만 요인이 없는 정의의 구현이 인간역사에서 있어본 적이 없음을 생각하면 후자의 논제가 나올 법도 하다. 또한, 어느 정도의 비리라면 참고 견딜 만하지만 도저히 인내할 수 없을 정도의 폭압정권이란 것도 있을 것임을 생각하면, 이 같은 두 가지 논제가 모두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닐 것도 같다.

정의를 위해서 평화를 포기할 것인지, 평화를 위해서 정의를 포기할 것인지, 정의가 부재하는 조국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충성을 바칠 것인지, 정의사회의 이상과 불의의 현실 사이에서 고민했던 한 정직한 교수의 이야기는 필자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영국 코벤트리대학의 정치학교수 앤드류 릭비의 저서 『응징과 화해(Justice and Reconciliation)』에 나오는 이야기를 윤색하여 따온 것이다.

70년 전 좌-우익간 극한대립의 해방정국에서 우익 정권의 폭압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제주도 좌익세력의 무장봉기를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볼 때, 이 영국인 교수의 고민을 생각하게 된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에는 분명히 불의와 반민주의 요소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정권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폭력집단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폭력진압이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것이 그 당시 집권자들의 변명이었다.

정권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폭력수단을 선호하는 것이 좌익운동가들의 속성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이었을 것 같다. 1947년 10월 대구에서의 폭동사건과 1948년 4월 제주에서의 무장봉기 같은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한반도 분단을 초래할 남한만의 단선에 반대하기 위해 폭력수단을 쓴 것은 반대집단의 진정성과 적극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단선에 의한 정부수립이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어느 쪽인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지만, 그 동안 우리가 거쳐 온 영욕의 역사와 우리가 이루어놓은 업적 자체를 부정할 도리는 없다.

살아남은 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죽은 것이 되살아날 수는 없을 터인즉, 사실은 사실대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보다 더 정의롭고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섰더라면 분열과 갈등의 고통은 덜했을 것이라고 상상은 되지만, 사실세계와 상상세계를 어떻게 비교하겠는가. 그 당시 다수의 국민들이 단선과 분단의 노선에 반대했던 것은, 통일조국의 노선이라는 절대선의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노선을 선택할 것인지를 놓고 비교할 대상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분단 이후 멀리 달려온 조국의 진운을 고민함에 있어서 정통성이 부족했던 정권이라고 해서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이 지구상의 어느 나라를 사랑해야 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제주출신 재일본 작가 김석범 선생은 그의 역작 <화산도> 소설 속에서 제주도 4.3사건의 아픈 과거사를 예술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제주 또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의미를 심화시켜 주었다. 제주도 현지 주민들도 갖기 어려운 향토사적인 지식과 감각이 이 작품 안에 푸짐하게 담겨있음을 생각하면, 작가의 고향사랑이 얼마나 지극했을 것인지 존경을 금할 수 없다.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의 소속 국적에 관한 논란이다. 그는 한일수교 이후 양국간 입출국이 정상화된 다음에도 오랫동안 고향방문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였다. 그가 조국으로 생각하는 나라는 정의로운 통일민족국가이며 반민족적인 이승만 집단에 의해 수립된 대한민국의 국민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정부의 입국허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화산도> 작품의 조연급 주인공 이용근은 제국주의 일본에 충성을 바치겠음을 공언하여 가족들과 의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방 후 조국의 혁명사업에 조력하는 상당액의 성금을 비밀리에 쾌척하는 휴머니즘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에게 감동을 자아낸다.

이 같은 작품을 쓴 작가가 한 언론인터뷰에서 했다는 말이 당혹스러웠다. ‘4.3학살의 만행에 복수하는 것이 나의 한평생 삶의 동력’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했다. 나라 없는 백성으로 외국에서 살다보니 국적 상실자로서의 자의식이 그냥 고착되어버린 것인지 모르지만, 복수의 주체와 대상을 어떻게 갈라놓을 것인지 막막하고 섬뜩하다. 어쩌면, 얼떨결에 나온 표현이든가, 취재기자가 말을 잘못 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근래에 우리 지방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4.3의 비극을 초래한 미국의 내정간섭 사실을 밝힘으로써 우리의 답답한 마음을 많이 달래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 민족의 비극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그의 저술이 북한과 김일성 찬양으로 이어진 것을 본 나는 당혹스러웠다. 항일투쟁 게릴라전의 영웅, 민족주의 신념에 찬 주체사상 지도자, 가족존중의 유교전통을 되살린 권력승계, 거지나 부랑자가 없는 평등사회, 이 같은 미사여구가 김일성 정권에 대한 그의 찬사의 요지이다. 김정일에 대한 그의 평가도 대동소이하다.

그는 한국인들이 미국 때문에 공산주의 혁명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을 애석해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우리 대한민국은 해방 후 혼란시국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산주의 이상사회의 환상을 떨쳐버릴 수 있었음을 천행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주류가 되어 있는 나라이다. 우리 국민들 대다수가 북한사회는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하는 대남방송을 믿지 않을 것 같은데, 낯설고 생뚱맞은 이 외국학자의 말을 어떻게 새겨들어야 할지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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